50화. 멀어진 둘의 사이
믿을 수 없다.
그가 단지 그 열매를 좋아해서, 그 열매를 따러 이 먼 곳까지 왔다고 믿는 그녀의 성미가.
이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아를 바라보자,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게 아닌가……?’
미아는 말이 없는 그의 반응에 추리를 시작했다.
로비체 열매는 톡 쏘는 맛이 매력이 있으면서도 뒷맛이 달아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음료로 타 먹었다.
다만, 숲 깊은 곳에서만 열매가 나와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굳이 이 열매를 먹는 것은 대대로 임신 중인 여자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둘은 싸운 상태였다.
분명 그녀를 원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상태였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위해 숲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좋은 것을 찾아주려고.
그 마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어떻게 느껴야 할지.
“괜한 오해는 않는 게 좋겠군.”
“무슨 오해요.”
“보아하니, 내가 그대를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용서요?”
“그래, 용서. 나는 그대가 나와 혼인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나의 청을 받아들일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이안의 단호함에 맞서는 미아 역시 물러섬은 없었다.
마음은 이미 이안에게 넘어간 상태였지만, 그럴수록 굳게 다잡아야 했다.
자신이 이안의 약점이 되지 않도록.
“하지만 이안 경, 어제 제가 말씀드렸듯…….”
“나의 약점이 그대라면, 그대의 약점도 나일 테지.”
“네?”
“그대는 그대의 가치를 낮춰 보는 경향이 있어. 어엿한 황태자비로서 사랑받는, 명망이 높은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폐위된 폭군보다야, 낫지 않은가?”
이안은 그렇게 웃어 보였다.
미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한 걸음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안이 미아를 위하고 있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런 이안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오히려 그녀를 괴롭게만 했다.
그럼에도 이안이 그렇게 말해준 것이 고마워서,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 마음 속 깊숙이 콕 박혀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안 님! 미아 님!”
멀리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와 이안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그들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을 한 시중들이 보였다.
“미아 님!”
그들은 주인이 이안임에도 불구하고 미아를 먼저 찾았다.
이안 입장에서 불쾌할 수도 있으련만, 이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도움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면 미아는 지쳐서 탈진할지도 몰랐다.
어젯밤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말이다.
“드디어 오셨군요. 저희를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미아는 늦게 온 시중들을 탓하긴커녕 고맙단 인사를 했다.
시중들은 미아가 무사해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쭈뼛거리며 이안의 눈치를 봤다.
이안은 잠시 눈을 흘기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이안 경!”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한 미아가 이안을 곧장 찾았다.
의사는 마침 그의 다리를 진료하고 있었다.
“잘 대응해주셨습니다. 며칠 동안 불편하시겠으나, 체력이 좋으시고 뼈와 근육이 건강하시니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매듭은 직접 묶으셨나요? 잘 묶어 매어 뼈가 어긋나는 것을 잘 막으셨던데.”
“…….”
이안이 물끄러미 미아를 돌아보았다.
미아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의사가 나가고 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이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없던 침실에, 그가 있는 것을 보니 반가워서 미아는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차고 외롭던지.
그새 그의 곁에서 잠드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처럼.
“이제 나가보겠다.”
“예?”
“그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그 명은 여전하다.”
“아, 아니요!”
미아가 나가려고 절뚝이며 몸을 움직이는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양팔을 벌리고 선 미아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안 경은 여기 계세요.”
“지금 무슨 말을…….”
“제가 나갈게요.”
“나가다니?”
“제가 다른 방에서 지낼 테니까, 이안 경은 이안 경의 침실을 지키세요.”
“비켜라.”
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그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껏 미아는 그의 이런 명령에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다른 방에서 지낸다는 것도 그에게는 마뜩잖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미아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침실은 이안의 것이었다.
잠시 자신이 지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회복하셔야 하잖아요.”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다.”
이안의 시선이 미아의 뺨에 난 생채기에 가 박혔다.
자신이 마음을 준 여인을 이토록 다치게 하는 이가 어떻게 참된 사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아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른 방에서 회복하면 돼요.”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네?”
“그대의 모든 행동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
“그 마음이 가끔은 무모할 정도라, 나는 두렵기까지 해.”
이안이 손을 뻗어 미아의 등을 끌어안았다.
바싹 당기자, 두 사람의 몸이 맞붙었다.
쿵, 쿵.
다시 미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대를 잃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 그대를 만나기 전으로 1분, 1초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안 경, 이 아이는요.”
“……내가 그대의 아이를 포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군.”
이안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미아는 가슴이 저릿한 아픔을 느꼈다.
“그건 이안 경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저조차도 아직 아이가 낯설고, 이런 제가 낯설어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게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고요.”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기묘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만 쫓는 어머니의 아들이라서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
이안의 말에 미아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뱉은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늦었다.
미아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할 때도 그녀만은 그를 믿어주었으니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품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
“미아, 내 말은…….”
“저는 한 번도 이안 경에 대해 그리 생각한 적 없어요.”
미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에 이안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고,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은 그게 아니라고.
다짜고짜 그를 밀어내기만 하는 그녀에게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그저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지낼 수는 없는 거냐고.
다른 여인들처럼 혼인하자는 말에 기쁘게 응해줄 수는 없는 거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아.”
“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아버지가 되신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실 분이라는 건 제가 잘 알아요. 한 번도 이안 경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저는.”
“…….”
“그럼 즐거운 저녁 되세요.”
미아는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 ❀ ❀
“미아 님, 미아 님도 아무래도 진찰을 받는 게 좋으실 것 같은데.”
“난, 흡, 괜찮아.”
“미아 님? 우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애니는 복도로 나와 서성이는 미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보고 당황한 애니가 미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는 사이, 미아가 입을 열었다.
“애니, 내가 지낼만한 방이 있는지 좀 봐주겠어?”
“전에 지내셨던 방을 준비할게요.”
애니는 미아의 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을 정리하려 뛰어갔다.
미아는 그와 멀어지기 위해 열심히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섰다.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슬펐다, 그가 그녀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팠다.
그가 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이번에 미아는 자발적으로 방에 틀어박혔다.
이안을 무슨 얼굴로 마주 봐야할 지 모르겠다.
물론 처음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도 않고 서운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꼭 이안이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가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아니라 부정해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밥은 잘 먹고 있는 건가…….”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할 텐데.
미아는 옅은 감기 기운만을 가지고 비교적 빠르게 회복한 편이었다.
입덧도 전보다는 나아져 영양분이 담긴 음식도 잘 먹을 수 있었다.
애니는 그런 미아의 변화에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몇 번이나 미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이면서도 물어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애니의 배려까지도 미아는 고마웠다.
“바보 같아.”
미아가 중얼거리며 침대에 엎드렸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좋은 아빠가 될 것이라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기만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아버지 없이 키우기로 마음 먹고 있었으니까.
비록 어렵고 힘든 일이고, 길이겠지만.
‘너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찾아 엄마를 떠났고, 그 탓에 엄마가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이렇게 혼자 살게 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안을 갑자기 애 딸린 남자로 만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 이안은 젊었고 그에게는 기회가…….
그래, 기회가 있었다.
얼마든지 아름답고 좋은 여성을 만날 기회가.
그 기회를 이미 이안 덕에 목숨을 건지고 살아갈 희망을 얻은 미아가 가져가는 것은 부당했다.
아는데, 전부 아는데.
어째서 이안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자꾸 이안과 숲속에서 나눴던 그 밀담이, 서로의 열을 빼앗아가며 비슷해지던 체온이 생각나는 걸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
생각을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져왔다.
한편,
이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이안은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한 일이 없었다.
애초에 사과할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황제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상을 줄 이는 상을 주고 벌을 줄 이는 벌을 준다.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황제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아는 이안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한 번의 실수로 잃기엔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미아에게 이 마음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슨 수’가 도대체 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