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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숲속에서 두 사람은 (49/95)

49화. 숲속에서 두 사람은



 

미아는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자신에게 뛰어드는 늑대들을 생각하면 멈출 수 없었다.

너무 무서우니, 목소리조차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악!”

발치에 무언가가 걸려 아래로 넘어졌다.

푹 하고 떨어진 곳은 나무 그루터기 아래의 작은 구덩이었다.

늑대들이 그 위를 지나쳐 가더니 코를 킁킁 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미아는 척추뼈를 타고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숨을 죽였다.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눈을 뜨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늑대 한 마리였다.

맹렬한 늑대의 두 눈이 번뜩이며 내려보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늑대는 그런 미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더니 고개를 돌렸다.

‘설마 살려주는 건가?’

그녀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멀어지고 있는 늑대들의 모습이 보였다.

곧 그들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온몸의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아는 구덩이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어느 방향으로 뛰어왔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까 늑대를 조우한 곳으로 겨우 도착한 미아가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 분명 있어.

있을 것이다.

미아의 이런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이안 경!”

눈을 감은 채, 흐트러진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하고 나무에 기대앉은 이안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이안은 미아의 부름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당황한 미아가 이안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뺨을 조심스럽게 짚자,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온기가 느껴졌다.

미아는 안도했다.

설마 이안이 죽기라도 한 것일까봐 순간적으로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늑대를 조우한 순간보다도 더 두려웠다.

“이안 경, 눈 좀 떠보세요. 이안 경.”

깜빡, 깜…… 빡.

그제야 이안의 눈꺼풀이 올라왔다.

이안은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미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

꿈인가.

미아가 나를, 이 숲속으로 데리러 올 리가 없을 텐데.

그녀가 여기, 그 앞에 서 있을 리가 없는데.

이안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달빛에 물든 미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따뜻해.’

온기는 실존했다.

그제야 감각이 생생히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이안의 전신을 훑었다.

정신이 조금이나마 드는 것 같았다.

“네가 왜 여기…….”

“뭐예요. 정말 이안 경을 잃는 줄 알았잖아요!”

설움이 북받친 미아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가 여기 있다는, 그가 살아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미아는 손을 뻗어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안은 믿을 수 없었다.

미아가 정말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자신을 찾아 이 숲을 뒤졌다는 게.

그리고 뒤늦게 서야, 엉망이 된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하게 여기까지 혼자 왔어? 대체 생각이…….”

“생각이 없는 건 이안 경이죠! 늦은 시간에 사냥을 나가면 어떻게 해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왜 이렇게 무리를 한 건데요. 대체 뭘 잡겠다고. 아니, 생각해 보니까.”

사냥을 간 사람이 무슨 활 하나 안 들고 있지?

이안은 확실히 사냥복 차림이기는 했지만, 활이나 화살 등 무기가 될만한 것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검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왜 활을 챙기지 않았어요?”

“…….”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친 곳은요. 아까 보니까 피가 난 것 같던데.”

“나는 피가 난 곳이 없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말이 혼자 돌아왔으니까, 어디선가 낙마하셨을 것 같아서. 그래서 급하게 찾은 거예요.”

“만약 말에 묻은 피가 있다면 그건 내 피가 아니라 말의 피일 것이다.”

미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다친 곳이 없는지 샅샅이 찾겠다는 듯 이안의 몸을 살폈다.

그의 발목이 조금 돌아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안 경, 발목이!”

“조금 다쳤을 뿐이니 걱정할 것 없다.”

“이렇게나 부었는걸요? 기다리세요.”

미아는 급하게 제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박력있게 찢어냈다.

의연한 모습과는 다르게 눈물은 여전히 줄줄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옷자락을 찢는 여자의 모습이, 이럴 줄은 몰랐군.”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훔쳤다.

그녀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가 시선을 거둔 뒤 능숙한 손길로 발목을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좀 아파도 참으세요.”

“윽.”

이안의 입술 새로 낮은 신음이 샜다.

틀어진 발목을 원래 자리로 돌린 미아가 천으로 발목을 둘둘 말아 세게 고정시켰다.

이안은 그런 미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

“그대가 있는 게 여전히 안 믿겨서.”

“…….”

미아는 옅은 한숨을 내뱉고 손을 뻗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그는 평소의 냉하고 차가운 모습을 거둔 채 온순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미아에게도 꿈만 같아서.

“이렇게 엉망이 된 제 모습이 안 믿기는 건 아니고요?”

“…….”

“부정 안 하시네요?”

미아는 제 머리를 대충 쓸어내렸다.

얼마나 거지꼴일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됐다.

다만 그런 미아의 모습도 그에겐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그녀가 알지 못할 뿐이었다.

“무모했다.”

“무모했죠.”

“왜 이런 짓을 벌였지. 밤이 깊어 지금은 나갈 수도 없다, 이 숲에서.”

“…….”

“혼인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어.”

“…….”

“혼인하지도 않을 남자를 위해 깊은 숲을 헤맨다? 발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나를 속였지.”

“속이긴 누가요.”

“나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는 말, 거짓이지?”

이안은 곧은 눈빛을 하고 미아와 눈을 맞췄다.

마치 미아의 마음을 전부 꿰뚫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을 그는 알까?

“하고 싶지 않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러면.”

“할 수 없을 뿐이에요.”

“어째서?”

“저는 이안 경의 약점이에요.”

“내 약점?”

“네. 제가 이안 경의 곁에 있을수록, 이안 경은 약해질 거예요. 이안 경을 노리는 이들도 많고요.”

이안은 잠시 침묵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와 달리 눈빛이 조금 서늘해져 있었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들 모두를 이길 수도, 죽일 수도 있어.”

“이안 경.”

“너를 위해서라면.”

이안이 손을 뻗어 미아를 끌어당겼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미아가 벗어나려 몸을 버둥였지만, 이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그는 혀를 입술 새로 미끄러뜨려 넣었다.

추운 숲속, 환히 밝은 달빛, 그리고 두 남녀.

그들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 ❀ ❀

“여기 기대요.”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걸을 수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이 아닌 거 알고 있잖아요. 그냥 기대요. 이래서는 종일 걸려도 숲을 나갈 수 없다고요.”

“길도 모르면서, 재잘재잘 말이 많군.”

이안은 미아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밤새 이안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미아는, 이제 자신이 그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낑낑거리며 그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오히려 이런 편이 속도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미아의 고집은 완강했다.

‘업혀요.’

‘뭐?’

‘내 등에 업혀요. 걸을 수 없잖아요.’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왜 안 돼요? 저 옛날부터 힘이 좋았어요. 어려선 오라버니도 업었다고요.’

‘…….’

‘이안 경?’

‘당신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

이안을 손수 등에 업겠다는 미아의 말이 진심일 것이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안과 미아는 그 문제로 실랑이를 꽤나 오래 벌였다.

결국 그는 미아에게 기대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갈무리 지었다.

해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에취.”

미아의 입술 새로 재채기가 나왔다.

불을 피웠다고는 하지만, 추운 밤이었다.

이안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미아의 얼굴과 다리에 자신 때문에 생채기가 난 것도 모자라 감기까지 걸린다면.

그거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불명예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일 터였다.

“미아.”

이안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미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미아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뭐 하는 거예요?”

“덮어라.”

“지금 환자가 누군데요? 저 춥지 않아요. 아까는 꽃가루가 날아들어서…….”

“한겨울, 눈이 내리는 숲속에 꽃가루라.”

“…….”

하필 핑계를 생각해도 꽃가루라니.

미아는 자신의 짧은 생각을 탓하고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이안이 그녀의 앞에 서서 망토에 달린 끈을 묶기 시작했다.

그의 다정하고 능숙한 손길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지난 밤일이 떠올랐다.

결혼할 수 없음을 말했으면서도, 두 사람이 이뤄질 수 없음을 말했으면서도.

결국 이안은 미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손 마디마디가 꼭 제 자리를 찾은 양 얽혀들었고, 그의 뜨거운 숨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몇 번이나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살결과 뼈의 굴곡이.

자꾸만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욕정.

그것이 두려워서 미아는 끝내 눈을 감았다.

‘…….’

그 탓이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눈을 감은 미아의 얼굴을 내려다본 이안의 눈동자에 넘실거리던 욕망을 그녀가 보지 못한 것은.

가만히 미아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뭐예요, 갑자기?”

“고작 끈을 묶는 것일 뿐인데 그대가 잔뜩 긴장한 듯해서. 뭐라도 기대하는 것 같군.”

“기대하긴, 무얼요!”

“아닌가?”

“아니거든요?”

“나는 아쉬웠어.”

“…….”

“물론 축축한 곳에서 그대의 몸을 뒹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간신히 참았지만.”

이안의 말에 미아의 뺨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르륵 달아올랐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그녀의 솔직한 얼굴에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걸음을 힘주어 옮기기 시작했다.

빛이 들자, 추위는 조금 가셨고 다리의 통증도 어제보다는 나았다.

“맞아. 왜 이곳에 왔는지 설명해주지 않으셨어요.”

“응?”

“사냥이 목적이 아니셨잖아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외진 숲까지 오신 거예요?”

“그건…….”

그때, 미아는 무슨 냄새를 맡았다.

망토에서 나는 것 같은 단 냄새였다.

이게 뭐지?

그녀가 망토 안으로 쑥 손을 넣자 놀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그녀의 손에 잡히는 것 같더니. 조금은 으깨졌다.

“이게 뭐야?”

당황한 미아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열매였다.

산에서만 나는 식물의 붉은 열매의 과즙이 그녀의 손끝에도 묻어났다.

이안은 전부 들켰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안 경.”

“…….”

“로비체 열매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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