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라진 남자, 찾는 여자
“뭘 좀 드셔야죠.”
“이안 경은 뭐 좀 드셨어?”
“…….”
“나도 괜찮아.”
장성한 다 큰 어른이 밥도 안 먹고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으련만.
그렇게 화를 내고 투정 부린다면, 무언가 반응을 해줄 수 있을 텐데.
지금 이안의 태도는 확실히 미아를 피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미아가 스스로 깨우치기라도 바라는 것일까?
혼인할 수 없다는 말을 철회하고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그에게는 유감이었지만.
그녀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짐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그의 존재를 위협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
“애니!”
밖에서 애니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애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미아의 앞에 비스킷과 쿠키를 내려두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꼭. 아셨죠?”
“바쁜 것 같은데, 얼른 가봐.”
“이따 확인할 거예요!”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애니를 보던 미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식욕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안이 굶고 있는데 이런 게 눈에 들어오겠는가.
‘아직 방에서 나올 마음이 없나 보군.’
돌아서는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씁쓸하고 서늘해 보이던 입가에 서린 조소도.
카일렌의 마음을 받지 못했을 때와는 다른,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그건 고통도 아니었다.
이안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를 밀어내는 일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게 하는지.
“……이안?”
미아는 갑작스레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창문 밖으로 말을 타고 선 이안이 보였다.
옷까지 갈아입은 것을 보니 숲으로 향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사냥이라도 가려는 건가.
금세 해가 질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나가도 괜찮은가?
게다가 혼자서?
“위험할 텐데.”
같이 가겠다며 다가오는 듯한 시중을 물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타고 숲으로 향하는 이안을 바라보던 미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창을 짚었다.
얼핏 이안이 그녀가 있는 침실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미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되겠어, 뭐라도 하자.”
가만히 있는 것은 결코 답이 아니었다.
미아는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을 지키고 있던 잭이 놀란 듯 미아를 보았다.
“나오시면 안 돼요.”
“잭?”
“네. 이안 님이 저에게 미아 님이 나오시는지 안 나오시는지 감시하라고 이르셨어요.”
“너에게?”
왜 하필 잭에게?
잭이라면, 내가 나오더라도 다른 시중들보다는 설득하기 쉬울 것이라는 걸 뻔히 알 텐데.
“어디 가시려고요?”
“아, 그게…….”
“식사도 통 안 하신다면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맞아! 나 입맛이 영 없어서 내가 즐겨 먹는 요리를 해보려고 하는데 혹시 괜찮으면 주방에 가도 될까?”
“주방에 가서 직접 요리를 하시게요?”
“응. 지금 나오는 음식들도 훌륭하지만, 갑자기 너무 먹고 싶은 게 있어서.”
잭은 잠시 머뭇거렸다.
잭의 시선이 힐긋 미아의 배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 티가 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은 잭이 미아에게 속삭였다.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알았죠? 이안 님이 오시기 전에요.”
“알았어. 고마워, 잭.”
미아는 방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잭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미아는 그런 잭을 뒤로 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미아 님! 여긴 또 갑자기 왜 오신 거예요!”
“이안 경이 돌아오면 먹을 음식을 해야겠어.”
“음식이요?”
“밥을 안 먹는다며? 고기를 좋아하시니까, 고기가 들어간 파이를 구울 거야. 저번에 보니까 사과도 잘 드시는 것 같고. 아이가의 찻잎을 조금 넣으면 너무 달지도 않을 테니까.”
“고기로 파이를 구운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애니에게 미아가 씩 웃어 보였다.
아이가의 찻잎을 향신료로 이용해 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맛이 나는 재료로 요리를 해본 적은 있다.
금세 자리를 잡고 앞치마를 매는 미아의 모습에 결국 두 손을 든 애니가 제가 도울 것이 없냐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쩜 이렇게 손이 빠르세요?”
성질이 급하신 황후 폐하를 모시다 보면 그렇게 돼.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 그저 웃은 미아가 땀이 흐르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저거, 이안 님의 말 아니야? 저 말이 혼자 왜 돌아온 거지?”
뭐? 한 시중의 말에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급히 뛰쳐나가 말을 확인하는 미아의 눈에 핏자국이 들어왔다.
다리를 절룩이는 말의 몸에 묻은 피가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이, 이안이 사라졌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말만 돌아오는 경우는 처음 봤는데. 말이 이안 경을 따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거, 이거 피 아니에요? 설마 낙마하신 건가.”
낙마라니.
미아는 그 자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안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찾으러 가야겠지?”
“그럼 어째요. 그냥 둬요?”
“…….”
애니는 답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물론 모두 이안을 무서워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안은 이들의 주인이었다.
주인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움직일 생각조차 안 하다니.
해도해도 너무 했다.
“제가 가겠어요.”
미아가 입을 열었다.
애니는 깜짝 놀라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이미 결심을 마친 듯,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미아 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이가의 숲이 익숙지도 않으시면서 어딜 혼자 가시려고요.”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나라도 찾아야지. 이안 경은 나의 은인이야. 내가 죽어갈 때 나를 구해준 은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겠어? 이안 경이 다쳤다고 생각하면 나는, 나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돌아올지도 몰랐다.
미아는 말을 하던 것을 멈추고 다짜고짜 말이 달려온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아 님!”
그런 미아를 보던 애니가 놀라 주위 남자 시중들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미아 님 가는 거 안 보여요?”
“아니, 우리도 가려고 했어. 가려고 했는데 옷이라도 갈아입고…….”
“이러다 미아 님마저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불길하게 해.”
“제 말이 현실이 되지 않게 빨리 움직이시라고요. 빨리. 안 움직여요?”
애니가 새된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제야 남자 시중들이 주춤주춤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미아와 엇갈려 이안 혼자 돌아올지도 모르니 애니는 성을 지키고 있으란 말을 남기고서.
애니의 불길한 시선이 숲을 향했다.
이미 미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 ❀ ❀
“이안 경! 이안 경!”
미아는 목이 터져라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찬 바람이 그녀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두렵지도 않고 아픈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이안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렇게 불러도 답이 없다는 건…….
“이안 경, 어딨어요. 제발, 제발 대답 좀 해줘요.”
생각이 나쁜 쪽으로 흐를 때마다 미아는 걸음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작은 나뭇가지들이 발아래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은 이미 부르튼 지 오래였다.
자갈들이 발밑을 구르고 아직 녹지 않은 땅이 자꾸만 걸음을 헛디디게 했다.
넘어진 횟수도 세지 못할 만큼 걸었을 때 그녀는 후회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
상처주지 말걸.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돌아서는 그 사람을 잡고 적어도 제대로 설명할걸.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고 앞으로도 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우리가 이어질 수 없더라도, 혼인할 수 없더라도,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수 없더라도.
내가 가끔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줄 수 있겠냐고.
그거면 된다고, 그거면 됐다고.
“……이안 경.”
한참을 헤매어 깊은 숲속에 들어온 미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돌아서는 이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뒤늦게라도 사냥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후회를 거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그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아우우우.
멀리서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스산한 기척이 주위에 느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안 경, 이안 경.”
미아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다가 들짐승의 밥이 될 수는 없었다.
절대로 혼자선 돌아가지 않아.
이안에게 구원받았던 것처럼, 나도 이안의 구원이 될 거야.
굳은 결심이 마음에서 샘솟았다.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안이 이런 숲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고 생각하면.
“저건!”
그때였다.
미아의 시야에 이안이 입고 있던 사냥복과 비슷한 색의 천 조각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걸려 찢긴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여기를 지났다는 것.
낙마한 지점이 어디일까?
평소에 말을 능숙하게 타던 것을 생각하면 낙마한 것은 말의 돌발행동 탓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닥을 샅샅이 뒤지듯 바라보던 미아의 시선에 두꺼운 나무의 뿌리가 지면에 나와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와 부딪친 듯 표면이 거칠었다.
“저기에 발이 걸렸구나.”
그러면 옷이 걸려 찢어진 것도 말이 돼.
순식간이었을 테니, 승마복이 걸린 줄도 몰랐겠지.
이안 경은, 이 근처에 있어.
확신이 든 미아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저 멀리 마치 이 숲을 지키고 있는 듯한, 커다랗고 나이 많은 나무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을 것이다.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우우우우.
그때였다. 짐승이 우는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리는가 싶더니, 늑대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
뚜욱, 뚝.
늑대의 입에 고인 침이 아래로 떨어졌다.
황량한 눈발 아래서 며칠을 굶주린 듯한 늑대를 마주치자 미아는 머리가 새하얘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들의 입가가 깨끗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안을 발견했더라면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이안에게 가서는 안 돼.
이안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
미아는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비록 큰, 야생의 늑대는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린 늑대라면 그녀도 본 적 있었다.
달브 황국의 황궁은 다양한 동물을 키우고 있었으므로, 미아 역시 많은 동물을 접하고 만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늑대에게 직접 우유를 먹인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까, 크든 작든 어리든 아니든 동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고 생각한 것이 그녀의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착하지, 착하지, 아가.”
하필 미아는 고기 파이를 만들고 있었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음식의 냄새와 훈훈한 온기는 그들의 입맛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미아가 힐긋 도망칠 길을 찾아 눈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늑대 한 마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두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