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풀 수 없는 오해
“…….”
이안이 기분이 상할 말이었나?
어린 시절에 만나, 이안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것은 순순한 진심이었다.
그가 외롭지 않도록, 그가 힘들지 않도록 사랑을 듬뿍 주고 돌보아 주고 싶다는 것 역시 그러했다.
외롭고 쓸쓸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안타깝고 마음에 쓰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안의 태도는 기분이 상한 사람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안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미아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날들은 오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다만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일렁이는지 그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알 수 없을 테니까, 알아서도 안 되니까.
이안은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무엇이라고 했건, 어떻게 생각하건. 네 배 속에 든 아이는 내 아이야.”
“이안 경,”
“그렇게 정리를 하지. 어차피 언젠간 아이를 가진 것을 들킬 테고 너는 아이를 낳아야 할 것이다. 내 아이로 키울 것이니, 이 아이는 내 아이인 것이 마땅하지.”
“하지만 이안 경.”
미아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전부터 쭉 해오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안이 비록 지금은 아이를 만나기 전이라, 이 아이를 자신의 아기라 여기고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이가 나오고 나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미아조차도 이 아이가 낯설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배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 못 할 때가 더욱 많다.
이안은 오히려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아이지만, 속을 모를 때가 많아. 힘들었어, 정말로.’
미아의 엄마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의 아이라도 책임지고 키운다는 것이 어려운데, 남의 아이라면 얼마나 더 그럴까.
이안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안에게 괜한 짐을 지우는 게 아닐까 싶어 미아는 조심스러웠다.
“이 아이는 제 아이예요.”
“그래. 그 아이는 나와 너의…….”
“아뇨.”
이안의 얼굴이 곧장 굳었다.
설마 아직까지도 이 아이를 카일렌 그 자식의 아이라 생각하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서 미아가 한 말은 그런 그의 오해를 풀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이 아이는 카일렌 전하의 아이도, 이안 경의 아이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저는 이안 경과 혼인하지 않겠어요.”
미아는 결심한 듯 말했다.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동안 그의 곁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그녀가, 아까까지만 해도 그의 어린 시절에 함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던 그녀가.
지금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혼인하지 않겠다’고.
이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아는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는지.
오해하지 말아야 했다,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그녀의 마음이 곡해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반드시 제대로 전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야속히 빗나갔다.
이미 그의 마음이…….
“듣지 않은 것으로 하지.”
“이안 경, 제 말은.”
“당분간 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좋겠어.”
“예?”
“어머니가 갈 때까지 말이다.”
단단히 토라진 탓이다.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황급히 따라 나가려는 미아의 코앞에서 문이 쾅하고 닫혔다.
❀ ❀ ❀
닫힌 문은 꼭 닫힌 마음과 같다.
그날 밤, 이안은 미아에게 오지 않았다.
그의 침실에서, 온통 그의 향이 나는 가구들 사이에서 미아는 어렴풋이 잠들었다 깼다 하며 기나긴 밤을 보냈다.
밖에서 나는 작은 기척에도 눈이 자주 뜨였다.
아침을 퀭한 얼굴로 맞이한 미아의 모습에 놀란 애니가 다급히 물었다.
“미아 님!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응. 좀 설쳤어.”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둘이 다툰 걸까.
이안 역시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이안이 서재에 있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뜻이자,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뜻인데.
역시 베아트리체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이라도 한 것일까?
애니는 미아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불안한 애니의 기색을 느낀 미아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괜찮아, 애니. 그래도 저번보다야 낫잖아.”
“저번이요?”
그래. 저번엔 이 방 꼭대기에 가뒀었지.
그때에 비해서 지금은 나았다.
지금은 적어도 이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으니까.
“아, 그때요. 그땐 정말 무슨 일 나는 줄 알았어요. 저랑도 못 만나게 하시고.”
“맞아. 애니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하지만 그때에도 이안 님께서는 미아 님이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내내 걱정하셨어요.”
“……나를 걱정했다고?”
“그럼요. 이안 님이 안 그래 보이셔도 미아 님에게는 무척 다정하고 자상하시다니까요!”
애니는 확신에 차 말했다.
이번 둘의 다툼도 단순한 애정 싸움 중의 하나일 거라 굳게 믿는 말투였다.
미아는 그런 애니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유부터 설명했어야 했는데, 괜히 선언부터 해서 그의 마음을 단단히 상하게 해버렸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미아가 단지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험에 처했다.
카일렌의 아이를 가졌다는 의혹은 꼬리표처럼 두 사람을 따를 것이었다.
게다가 그 말은 진실이었다.
아무리 이안이 그녀를 아껴준다고 해도, 원한다고 해도.
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지 말걸.
가까워지지 말걸.
“미아 님.”
“응.”
“이번에 먼저 손 내밀어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응?”
애니가 조심스럽게 미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두 주인이 싸웠으니, 둘을 화해시키는 것도 그녀가 할 일이었다.
“이안 님은 마음을 표현하는 법에는 익숙지 않은 분이세요. 그건 미아 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까 이번에도 미아 님이 먼저 손 내밀어 보시면 분명 이안 님이…….”
“애니.”
“네.”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지금이라도 달려가 이안을 끌어안고 싶지만.
오해라고, 당신이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고.
당신을 믿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게 과연 이안에게 도움이 될까?
둘에게 정말, 미래가 있을까?
괜히 미아가 이안을 뒤흔드는 것은 아닐까.
이안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황태후 전하께서 돌아가시겠답니다.”
복도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아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시는 길에 인사는 해야지.
애니는 불안한 표정이 되어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망설임 없이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
이안이었다.
이안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미아를 바라보았다.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인사는 해야죠.”
“…….”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허락한 건가?
아니면 설마, 나랑 말을 하기 싫은 건가.
미아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따라오지 말란 말은 하지 않았으니 허락한 것 같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정원에 사람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모두 황태후를 모시는 사람들인 듯했다.
이 많은 인원이 지금까지 아이가에 감쪽같이 숨어있었다고?
새삼 미아는 놀랍고 두려웠다.
“황태후 전하를 뵙습니다.”
“미아 양!”
베아트리체는 미아를 보고 환히 미소를 지었다.
마치 대단히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미아는 그런 베아트리체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태연한 척 웃으며 베아트리체가 뻗은 손을 맞잡았다.
“벌써 가시다니 아쉽네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지는 몰라도, 그걸 알아내지 못해서…… 더 아쉬워요.
차마 그 말은 뱉지 못했지만, 그것이 미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네요. 무슨 일 있나요?”
“아…….”
미아는 말끝을 흐렸다.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베아트리체의 말이 날카로웠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미아를 대신해 답한 건 이안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내가 너에게 물었니?”
“괜히 시간 지체 말고 출발하시죠.”
“알았어.”
베아트리체는 이안의 성화에 못 이겨 말 위에 올랐다.
말의 고삐를 잡은 남자의 인상이 험악했다.
베아트리체의 호위 기사인 것 같았다.
“미아 양. 조만간 이안과 함께 황궁으로 초대할 테니, 꼭 와줘요.”
“네, 조심히 가세요.”
미아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정말 바르트 황궁에 갈 확률은 희박해 보였으나 갈 채비를 다 마친 그녀가 하는 말을 부정하기도 그랬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힐긋 보더니 걸음을 물렀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 베아트리체가 성문을 빠져나갔다.
성안에 있던 시중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성안의 식솔들보다 황태후를 보좌하러 아이가에 온 인원이 더 많았다.
새삼 바르트 황국의 크기와 힘이 느껴졌다.
저것이 이안이 있던 세계구나.
이안은 저 세계에서 살던 기억을 전부 가진 채로 여기서 지내고 있구나.
“저, 이안 경…….”
그런 생각을 하니 미아는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안의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나와 혼인할 생각이 들었나?”
이안이 물었다.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내 그것을 묻고 싶었을까.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또 거절당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두렵지 않았을까.
“…….”
하지만 그녀는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아니, 미아는 혼인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에게 끌리는 내밀한 마음의 욕망을 알면 알수록.
미아는 그에게 전혀 다가설 수 없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제서야 처음으로 미아는 올리비아가 부러웠다.
적어도 올리비아는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질 것 앞에 충실했을 것이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새로운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아직 방에서 나올 마음이 없나 보군.”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미아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