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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숨 막히는 예비 시어머니와의 독대 (45/95)

45화. 숨 막히는 예비 시어머니와의 독대



 

“이안, 억측이 지나치구나.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저 벽을 부수니. 내 가녀린 팔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니?”

“직접 하셨단 얘기는 한 적 없습니다.”

이안은 베아트리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 선을 긋듯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해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그녀를 보며 당황한 것은 미아였다.

“가만히 두면 얼음이 녹아 성벽을 복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와서 손수 재촉하셨다죠?”

“그거야, 황태후가 있는 곳이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되어 있을 순 없으니까.”

“여기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셨다면, 돌아가시면 될 일입니다. 수족처럼 부리시던 이들도 이 근처 어딘가에 다 숨어있을 것을 압니다.”

이안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역시 혼자 온 것이 아니었구나.

베아트리체가 대뜸 홀로 등장하여 미아는 당황하고 놀랐었다.

아무리 아들을 보러 온다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긴 쉽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설령 이안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도, 그걸 저렇게 대놓고 앞에서 말해도 되는 걸까?

만약 정말 베아트리체가 이안을 해치기라도 할 생각이라면, 저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은 아닐까?

괜히 베아트리체를 자극했다가 이안이 위험해질까 걱정이 되었다.

아이가의 경비가 허술하고, 병력이 약한 것은 군사력에 대해 거의 무지한 그녀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태연한 기색이었다.

베아트리체가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그의 계산 안에 있는 듯했다.

역시 가족은, 가족이 가장 잘 아는 법이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란다.”

“예, 그러시겠죠.”

전혀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는 말투다.

미아가 슬금슬금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었다.

“왜 그러는 것이지?”

이안이 작게 미아에게 물었다.

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베아트리체를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베아트리체가 작게 미소 짓더니 입을 열었다.

“미아 양.”

“네, 네?”

“잠깐 저와 따뜻한 차 한 잔 안 나누시겠어요?”

“미아. 들을 필요 없다.”

하필 또 차였다.

차 때문에 곤욕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구태여 차를 고르는 저의를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미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베아트리체는 그 뜻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는 미안했습니다. 미아 양께서 아이를 가진 줄 몰랐거든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리 들켜서는 안 됐다, 아이가 누구의 아이든 곤란해지는 것이 뻔했다.

미아의 마음에 일렁이는 불안을 눈치챈 이안은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을 단독으로 둘 수는 없었다.

불쾌했다.

미아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것이.

“이번엔 미아 양이 준비한 차를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안, 걱정할 거 하나 없다. 네게 미아 양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알았는데 함부로 대하겠니?”

“…….”

그걸 알고 있으니까 불안한 거다.

이안이 미아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베아트리체가 알아버렸으니까.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미아는 고민이 됐다.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인 베아트리체의 말을 거절할 힘이 제게 있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황위에 위협을 주는 아이의 존재가 마뜩잖을 테고, 그런 베아트리체가 또 저를 시험하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저, 이안 경.”

“왜 부르지.”

한참만에 고민을 마친 미아가 입을 열었다.

미아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몸을 녹일 겸, 황태후 전하와 티 타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대체 무슨 생각이지, 미아.’

하지만 그 계획을 알 수 있을 리 없는 이안은 묻고 싶었다.

미아는 저만 믿으라는 듯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단칼에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단 한 순간도 그녀의 뜻을 맞춰준 적이 없는 그여서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바란다면 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조심해.”

이안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허락의 의사를 내비쳤다.

미아는 고맙다는 듯 이안의 손을 힘주어 꾹 잡았다가 놓았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그 둘의 애틋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 ❀ ❀

“아이가는 첫맛은 쓰고 끝맛은 단 가시나뭇잎 차가 인기예요. 드셔 보시겠어요?”

“첫맛은 쓰고 끝맛은 달다라. 마치, 삶과 같군요.”

베아트리체는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미아를 보았다.

삶과 같다.

하긴, 무언가 쓴 것을 먹으면 단 것이 따라왔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 잔병치레로 약을 먹을 때마다 각설탕을 챙겨주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잘 계시려나.

어머니도 이 차를 좋아하실 텐데.

“따라주시겠어요, 미아 양. 몹시 기대되네요.”

“네! 따라드릴게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미아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쓸데없이 상념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자리를 잡은 이상, 최대한 많이 알아내야 했다.

베아트리체가 이곳에 온 이유, 이안에게 죽으라는 말을 한 이유, 그리고 미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아낸 지금의 계획.

도무지 좋은 말이 오고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안과 베아트리체, 두 사람이 쉬이 나누지 못할 대화를 이끌어내야 했다.

그래야만 이렇게 공들여 티타임을 가진 보람이 생길 터였다.

“향이 좋군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미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

예부터 웃는 낯에는 침을 못 뱉는다고, 상대를 무방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미소가 최고였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미아를 마주보며 웃었다.

“좀 쌀쌀맞죠?”

“네?”

“우리 애 말이에요.”

‘우리 애’라고 했다.

우리 애라는 말은 애정이 담겼을 때나 할 수 있는 표현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 미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그런 구석이 있죠.”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래요. 원체 무뚝뚝한 사람이었거든요.”

“선황제 폐하께서요?”

“네. 아무래도 황국을 돌보는 것에 집중하시다 보니,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주지 않았죠.”

그런 비화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이안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것이 이해가 됐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풍기는 태도와 분위기, 그리고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방법까지.

이안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랬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베아트리체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자신의 손을 두었다.

장성한 두 아들이 있는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곱고 아름다운 흰 손이었다.

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그 손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마음을 잘 알아채지 못했어요. 그저 이안을 바르게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아버지는 무심하고, 어머니는 엄격하니. 아이가 얼마나 외롭게 자랐을지…….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요.”

“…….”

“그래서 미아 양에게 고마워요.”

자신에게 고맙다니, 그럴 일이 무엇이 있지.

그제야 미아가 손에 두었던 시선을 거둬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미아 양은 그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줄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도 분명 부딪힐 일이 많았을 텐데, 얌전히 옆에 있어 주었잖아요.”

“……그건.”

“폭군의 옆에 있는 것이 두렵진 않아요? 듣기에 달브 황국의 황태자인 카일렌은 무척 친절하고 다정한 성정을 가졌다던데.”

“…….”

미아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안을 사랑하는 것이 틀린 선택이었다 책망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쯤하고 그만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

확실히 카일렌과 이안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안은 미아를 배신하거나 속인 적은 없었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다정했고 따뜻했다.

“물론 정말 다정하고 친절한 이였다면, 그런 식으로 미아 양을 배신하지는 않았겠지만.”

“저, 황태후 전하.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죠?”

“네?”

“그 아이, 이안의 아이가 아니죠?”

“…….”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치밀하게 전부 알아내겠다는 전의에 불탔었는데.

지금에 이르니 오히려 기세에 밀리고 있는 것은 미아였다.

베아트리체는 금방이라도 미아를 꿰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거짓을 말할 일이 거의 없었던 미아로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그녀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카일렌의 아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은?

왜 카일렌의 아이를 가지고도 달브 황국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으면?

이게 얼마나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지 아느냐고 물으면?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겨우 생각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질문에 다른 질문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

하지만 이 정도는 베아트리체에게는 그저 애교였다.

‘이 여자애는 정말로 서툴구나.’

어쩌면 이런 면이 이안의 마음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이안은 평생 베아트리체를 증오했으니, 베아트리체와 다른 여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야…….”

“네.”

“이안은 여자와 손이 닿는 것조차 싫어하니까.”

“네?”

미아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뱉었다.

베아트리체의 말은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이안이 여자와 손을 잡는 것조차 싫어한다니?

그럼 미아에게 보였던 그 태도는 무엇이며, 미아를 한 손에 휘어잡던 그 모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베아트리체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지 않는 것을 보니 미아에게는 그렇게 굴지 않은 모양이군.

이안이 평소 그의 모습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아이가 이안의 아이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아닌가요?”

뒤늦게 미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너무 동요해버렸다.

하도 믿기지 않는 말을 들은 나머지.

뒤늦게 침착을 찾으려는 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매사에 여유롭고 능숙해 보이시기도 하고 전에 이미 혼인하신 전력이 있으시기도 하고.”

“그렇지만 혼인해 있었던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닌데 아이가 없잖아요?”

“아, 그건…….”

“올리비아 정도면 충분히 남자들이 동하고도 남았을 외모와 몸매를 지녔는데도.”

거침없는 베아트리체의 말에 미아의 뺨이 붉어졌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그 모양인가?

만약 정말로 이안의 아이를 가졌다면, 이안에게 미아가 타인에 비해 너무나 특별한 존재인 것이 명백한 사실일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계획대로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베아트리체가 음흉스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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