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닥쳐오는 위험
‘드디어’ 죽어줄 것이냐니.
이안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솟았다.
정말이지. 제 어머니는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왜 그렇게 그를 죽이고 싶은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이안의 존재가 자신에게 위협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는 그 생각 자체가 우스울 뿐이다.
그녀가 어머니로서 그에게 저지른 일들이 얼마나 부정한 일이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
“혼인한 순간 죽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니, 그래. 없겠지.”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시네요.”
“희망 사항이라 한번 말해 본 것뿐이란다.”
베아트리체가 환히 웃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여인과 그와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미모의 남성이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이 보일 터였다.
이런 살벌한 대화 내용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괜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일을 신경 써서 일을 키우셨습니다. 저는 바트르 황국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 계집 하나만 있으면 된다?”
“…….”
순간 베아트리체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그의 고개는 순식간에 돌아갔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약해빠진 소리를 하다니.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비릿한 피 맛이 이안의 입 안을 감돌았다.
가르치다, 그래.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가르쳤더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베아트리체를 응시했다.
이안의 싸늘한 시선에 그녀가 움찔하는 것도 잠시,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아주 다정한 손길이었다.
“어머니는 저를 가르치신 적이 없답니다.”
“…….”
“어머니가 이러실수록 저는 꿈꾸어서는 안 될 것을 꿈꾸고,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랍니다.”
“……너.”
“그러니 조용히 돌아가세요. 여기는 저와 미아가 있을 곳이지, 어머니가 계실 곳이 아닙니다.”
이안의 단호한 목소리에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굳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자신의 삶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그러니 그녀가 친히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에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겠지.
베아트리체가 이안을 살려둔 것은,
이안이 그런 아들이라서다.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해칠 줄은 모르는 아들.
더 가지려 욕심 부리지 않고, 가진 것을 지키지도 않으며, 무엇을 놓치든 연연하지 않는 아들.
그것이 믿음직했다.
그런 아들이 지금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였다.
불쌍하게 버려진, 어떤 여자.
❀ ❀ ❀
“얼굴이 왜 그래요?”
돌아온 이안의 입술에 상처가 난 것을 보고 미아가 놀라 물었다.
이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제 입술을 쓱 쓸어내렸다.
그리고 제게 다가온 미아의 뺨을 틀어쥐었다.
곧장 입술을 맞춰 오는 이안에 저항할 새도 없었다.
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다시 맞닿았다.
‘화가 났나?’
미아는 그의 입술을 받아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베아트리체와 대화를 나누러 갔으니, 기분 좋게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기분이 상하고, 심지어 다친 채로 올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미아가 손을 뻗어 이안의 뺨을 그러쥐었다.
가만히 입술을 떼어낸 미아가 손을 뻗어 그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체격 차이 때문인지, 이안의 몸이 거의 구겨지다시피 하여 미아의 품으로 들어갔지만.
어쨌든 안은 것은 안은 것이었다.
“괜찮아요, 이안 경.”
“…….”
“저는 이안 경의 편이에요.”
“…….”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벌어지더라도. 저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의 편에 서 있어요.”
“미아.”
“제게 이안 경과 같은 아이가 있다면 무척이나 사랑해주었을 텐데.”
“……그게 무슨.”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겼을 거예요.”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가 내 어미라면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겼다고. 그래, 그랬겠지. 너라면,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그랬을 거야. 온화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당신이라면. 그렇지만…….’
“그대가 내 어머니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안은 단호히 말했다.
고개를 돌리며 손에서 뺨을 빼어내는 그의 태도에 당황한 미아가 조용히 손을 내렸다.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이었나?
자신 딴에는 오래 고민하고 한 말이었는데.
조심스럽게 그녀가 그를 살피자, 이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대가 내 어머니라니. 그럼 어머니를 사랑한, 희대의 막돼먹은 자가 되었겠군.”
그, 그 이유 때문이었어?
그런데 사랑이라니.
지금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게 맞나?
물론 어렴풋이 호감을 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네, 네?”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한 말이요.”
“그대가 내 어머니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그다음 말이요.”
미아가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금세 깨달았다.
그가 한 말이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으로 전달할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무리 경험이 없는 그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달리 어떻게 전하겠는가.
이안은 그녀를 조금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
“네,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글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군.”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미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방금 말했잖아, 바로 방금.
그 말을 그렇게 쉽게 뱉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그래.”
“아닌데, 기억이 안 나실 리가 없는데.”
“음…….”
“내가 희대의 막돼먹은 자라는 것?”
“아뇨! 그게 아니라…….”
미아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내리눌렀다.
이쯤 되면 그가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법도 한데.
미아는 정말로 그가 무심코 뱉은 말이라, 기억도 못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중요한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버리고 기억도 못한담?’
그때였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땅이 울렸다.
무슨 일이지?
미아와 이안은 서로 눈을 맞추다가 침실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미아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뒤에 두었다.
미아가 반사적으로 이안의 팔을 쥐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성벽이 더욱 크게 무너졌습니다.”
“어째서?”
“무너진 성벽을 보신 황태후 전하께서 빨리 복구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재촉하셔서.”
내가 그렇게 가만히 두라고 했는데!
이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미아, 그대는 여기 있어.”
“아니에요. 저도 가겠어요.”
“위험해.”
“그렇게 위험한 곳에 이안 경도 가는데, 제가 못 갈 일이 뭐예요.”
하여간, 말 안 듣는 건 누굴 닮은 건지.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이안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미아가 그 뒤를 따랐다.
“사람이 깔렸어, 사람이!”
“모두 이리 와!”
“하지만 더 무너지면 어떻게 해?”
성벽 근처는 아비규환이었다.
전에 무너졌던 성벽 근처가 전부 무너지고 금이 갔다.
이 상태라면 성벽 밖과 성벽 안의 구분이 어려웠고 누군가가 침입하기도 쉬울 터였다.
물론 굳이 누군가가 아이가까지 와서 이곳을 점령하려고 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 이안 님!”
모두 이안의 등장을 확인하고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그들을 지나쳐 걸어 성벽 근처로 다가갔다.
미아가 당황해 이안을 꽉 붙잡았다.
“위, 위험해요. 이안 경!”
“괜찮다. 뒤로 물러나 있거라.”
“그렇지만.”
“여긴 내가 돌보는 곳이다. 그러니, 성가셔도 해야 할 일이지.”
하는 수 없었다.
미아는 이안의 말을 듣고 조금 물러났다.
이안은 무너진 벽의 잔해들을 확인했다.
확실히 갑작스럽게 무너진 듯 끄트머리가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건?
무언가로 툭 찍은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얼어붙은 벽을 깨려 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 일부러 부순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안은 벽에 더욱 가까이 붙어 아직 간신히 서 있는 부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자국이 나 있었다.
나머지 부분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일단 사람부터 구하고, 복구를 하는 일 대신 병력을 세워 보초를 지키는 것이 나았다.
누군가 아이가를 노리고 있었다.
그게 황태후든, 아니든.
“미, 미아 님!”
당황한 듯 미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파악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이안이 몸을 돌려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잔해를 치우려 하고 있었다.
“미아!”
이안이 미아를 부르며 그녀를 향해 달렸다.
미아는 그의 부름에도 아랑곳없이 잔해를 들기 위해 낑낑거렸다.
“도와주세요, 여러분!”
무거워서인지 잘 들리지 않자, 미아는 주위에 도움을 처했다.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시중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아의 옆에 섰다.
깔린 이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미아는 제 손바닥이 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해를 들어 올렸다.
크고 무거운 잔해를 옮기려 애쓰는 그녀의 옆으로 이안이 섰다.
“누가 당신을 황태자비였던 이로 보겠어?”
“네?”
이안은 제 품에서 장갑을 꺼내 미아의 손에 씌워주었다.
미아는 괜찮다고 사양하려 했지만, 이안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뒤로 물러나 있으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안 마저 잔해를 치우는 데에 합류하자, 사람들은 더 미룰 수 없었다.
여기서 요령을 부리다가는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사를 불러라.”
“네, 안 그래도 지금 애니가 부르러 갔습니다.”
역시, 애니! 빨라!
미아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잔해를 대충 다 치워내자 깔려 있던 남자가 보였다.
시중들이 그 남자를 옮겨 바닥에 제대로 눕혔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무너지기 전 수상한 이를 목격한 자는 없나?”
“저희는 무너지는 소리만 듣고 여기 와서요.”
“맞습니다. 항상 같이 작업하던 잭은 오늘 아내가 아프다며 자리를 비웠고요. 그래서 아마 혼자 작업을 시작했을 겁니다.”
혼자 작업을, 갑자기?
깨어나면 목격한 것은 없는지 묻는 게 우선이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이안을 향해 질문이 던져졌다.
“무슨 일이니?”
베아트리체였다.
아까의 흐트러진 모습과 달리 정돈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이안은 작게 조소를 지었다.
자신이 자초한 일임에도 당황하는 기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보아하니, 성벽이 무너진 모양이구나. 그때도 무너져 있더니, 더욱 무너졌구나.”
“위험하니 들어가 계시죠.”
한 마디로 꺼져달란 뜻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해줄까?
“아들, 다친 곳은 없니?”
“역할 놀이는 그만하시죠.”
“너는 걱정하는 어미에게 무슨 말을…….”
“어머니가 부순 것이지 않습니까?”
이안의 말에 미아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