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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아들이 죽길 바라는 (43/95)

43화. 아들이 죽길 바라는



 

방심한 것은 그의 죄다.

베아트리체는 흔들림 없는 곧은 눈으로 꿰뚫듯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매섭게 마주 보았다.

“…….”

이 차에는 소소한 속임수가 존재했다.

독이 든 차가 아니라고 미아가 안심했던 것은, 이전의 차를 마셨을 때 그녀가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미아의 탓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이안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미아의 배 속에 이안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자연히 베아트리체의 생각은 이안의 역모로 이어질 터였다.

혼자라면 욕심내지 않을 황제의 자리였지만, 자식 있는 부모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베아트리체 역시 그랬으니까.

설령, 이안이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소문이 나면 곤란했다.

윌리엄이 정권을 잡은 것이, 베아트리체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은 얼마든지 있었다.

“답이 없구나, 아들아.”

그렇다고 이 아이가 카일렌의 아이라고 사실대로 밝힌다면.

이안은 졸지에 한때 적국이었으며, 지금은 우호국이 된 나라의 황태자 아들을 훔친 셈이 된다.

그것 역시 베아트리체가 미아를 해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역시 오자마자 나뿐 아니라, 미아를 시험대에 앉히는군.’

이안은 쓰러진 미아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베이트리체는 그런 이안의 뒤를 눈으로 좇을 뿐, 더 묻지 않았다.

반응을 보면 이미 알 수 있었다.

미아는 아이를 가졌다.

문제는.

‘문제는 그것이 누구의 아이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게다가 형은 평소에도 여자라면 질색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윌리엄은 미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용케 눈치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해왔던 것이다, 두 사람 앞에서는.

“걱정하지 마. 두 시간 안에 깨어날 테니.”

앞서 걷는 이안의 등에 대고 베아트리체는 말했다.

이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정신을 잃은 미아를 감싸 쥔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 ❀ ❀

‘미아야.’

미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엄마, 엄마야?

미아의 시야에 따뜻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 위로 그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 엄마. 엄마!

미아의 입에서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떨어져 지낸 지 오래라 잘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원래 딸들은 집을 나가기 마련이라고, 그러니까 엄마에게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아가 엄마가 된 후로 더욱 그랬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알 수 없는 공포와 무력감이 올라올 때마다.

그녀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녀보다 더 큰 어른이, 좋은 어른이 필요했다.

황후 폐하가 그리운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해?

나 아이를 가졌어.

그것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의 아이를.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은 나를, 나의 아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런 속박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하다면.

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엄마는 답이 없었다.

미아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이었다.

이제는 미아가 돌아갈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그저 환상.

환상은 손에 쥘 수 없기에 환상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눈이 뜨였다.

“…….”

미아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보고 선 이안이었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안이 손을 뻗어 무심히 그녀의 뺨을 쓸었다.

흘러내리던 눈물방울이 그의 손에 의해 거둬졌다.

“말을 언제까지 안 들을 셈이지?”

“……죄송해요. 먹은 기억이 분명 있던 차인데.”

“그대의 몸은 예전 그대의 몸과 다르다. 아이를 가졌으니,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아……. 죄송해요.”

이안의 말이 옳았다.

미아는 홑몸도 아니었다.

아이를 가진 몸이 이전과 같으리라고는 생각해선 안 됐다.

그걸 아는데, 아는데도.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

“미아, 그대를 걱정하는 것이다.”

역시 아이 때문에 더욱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미아가 서운해할 틈을 주지 않으며 이안이 말했다.

미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이안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와 고개를 마주했다.

“내가 그대를 가뒀다.”

“…….”

“그대를 자유로이 풀어줄 방법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어. 그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라면.”

“……이안 경.”

“그렇지만 난 그대를 놓을 수 없다.”

이안은 엄마를 찾으며 잠꼬대를 하던 미아를 떠올렸다.

그립고 두려울 것이다.

뜻하지 않게 아이를 가졌고, 아이의 아버지는 배신했다.

그런 상황에서 평생을 거의 모른 채로 지낸 남자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무리 이안이더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아가 만약 가족을 만나러 달브 황국으로 건너간다면, 달브 황국에서 미아를 순순히 돌려보낼 리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미아의 가족을 이리로 불러올 수도 없었다.

언젠가 달브로 돌아가면 폐위된 폭군에게 볼모로 잡힌 딸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닐 터였다.

왜 나는 폐위되었을까.

왜 내게는 힘이 없을까.

그 물음의 답은 하나였다.

이안은 애니를 불러 미아에게 물을 먹이라 말했다.

차의 성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충분히 수분을 섭취해 주어야 했다.

“이안 경, 어딜 가시는 거예요.”

미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안을 보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자신이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갈 데 없는 그녀를 받아준 것은 그의 자비였다.

그녀를 살뜰히 돌봐준 것은 그의 호의였으며, 그녀를 속박하는 것 역시 그의…… 사랑이었다.

그걸 안 이상, 그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와 얘기를 나눠야겠어.”

“안 돼요. 그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내 심기를 거스른 것이 어머니야.”

“하지만…….”

“누구도!”

“…….”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어.”

이안은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음성을 겨우 내리눌렀다.

지금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감히 그의 것을 해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해, 해하다니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고. 보세요. 지금은 멀쩡하잖아요. 그 차, 아무래도 독차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잠깐 그냥 기운이 없어서…….”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 그대를 노릴 것이다.”

“아닐 거예요. 저는 그냥 여기 머무르는…….”

“그대는 나의 부인이 될 몸이니까.”

“…….”

“그러니 더는 나를 막지 마.”

이안은 여기까지도 오래 상대해준 것이라는 듯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미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아와 이안의 대립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애니가 조용히 미아에게 다가왔다.

제 주인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슬펐으나, 애니 역시 미아를 이렇게 만든 베아트리체가 미웠다.

“자, 일단 물부터 드세요. 아.”

“……아.”

그렇게 말하고 떠난 이안의 모습이 자꾸 미아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어떤 부류의 것인지 미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꿀떡꿀떡.

미아는 물을 열심히 삼켰다.

❀ ❀ ❀

“깨어난 모양이구나. 이제야 날 찾는 걸 보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베아트리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안의 심기를 거슬렀음은 물론이다.

“딱히 생각이 있어야 하나? 나는 그저, 정말 순수한 호의로 차를 권한 것뿐이야.”

“임신했을 거라고 알려준 것은 윌리엄입니까?”

“…….”

베아트리체는 흥미 없이 들여다보고 있던 소식지를 내려놓고는 시선을 이안에게 돌렸다.

이안의 눈빛이 형형한 것이,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낳은 아이이지만, 당장 그렇게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키운 탓이다.

베아트리체는 이안에게서 이안의 욕구와 욕망을 모두 빼앗았다.

그 대신 그녀의 욕구와 욕망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이안은 그녀를 위한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러니, 그녀의 남편이 단명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독을 잘 다루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니까.

“넌 예부터 네 동생을 잘 의심했지.”

“아니고서야 갑자기 찾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뭐. 부정하지는 않으마.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어머니는 제가 왜 여기서 조용히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머니의 약점을 수도 없이 쥐고 있는 제가, 왜 황제의 자리에서 말없이 내려왔다고 생각하시냔 말입니다.”

이안이 베아트리체에게 다가섰다.

베아트리체는 이제는 장성한 제 아들을 올려보았다.

어쩜 이렇게 잘생기게 잘 자랐을까.

내 아들이지만, 정말…… 지 아비와는 딴판이라니까.

“그러게. 왜일까?”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고서야,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니까 얌전히 사라져준 겁니다.”

“……이안.”

“언제까지 내가 당신의 속박 안에서 꼭두각시처럼 살 거라 생각했는데?”

이안이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그의 아들이 지나치게 분노할수록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예쁘게 치켜 올라갔다.

“감정적이구나.”

“원래 인간은 누구나 감정적입니다.”

“아니, 넌 아니었어. 그 누군가에게도 애정을 갖지 않았지.”

베아트리체가 흥미롭다는 듯 깍지를 껴 고개를 받쳐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명화같이 아름다웠음은 분명했다.

이안이 치를 떠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건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어머니라며 거짓으로 나를 길렀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래. 그런 네가, 나와 정반대인 여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

“아름답고, 욕망에 눈이 잠겨있던 올리비아를 대신하고 아무 욕망도, 미래도 없는 머저리 같은 여자애를.”

미아를 모욕하다니.

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아트리체가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새로 새어 나갔다.

“혼인을 허락해주면, 무엇을 해줄 것이니?”

“…….”

“죽어줄 것이니,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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