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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뜻하지 않은 도발? (41/95)

41화. 뜻하지 않은 도발?



 

“……네.”

흠.

미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안은 어쨌든 황제였고, 지금은 아이가의 성주 신분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니 아이가의 상황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 그가 할 일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의 곁을 지킨다는 건, 미아 역시 아이가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럼 자신 역시 아이가에 도움이 되고 싶은데.

“나가시게요?”

“응 아무래도 나도 주위를 살펴야겠어.”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차요.”

“괜찮아. 옷 갈아입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물론이죠!”

미아는 애니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추울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는 애니에게 괜찮다고 답한 미아가 성 밖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이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물어진 성벽의 풍경은 처참했다.

깨어진 돌덩이들이 사방에 너저분히 널려 있었고, 단면은 날카로운 맹수가 마치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간 듯 거칠게 드러나 있었다.

이안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 둘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그들이 잘못한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눈의 무게 때문에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개인의 잘못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미아는 살금살금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쉿.

그를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에 제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눈치를 주던 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돌연 장난스러운 마음이 든 것은, 그녀에게 이안이 조금은 편해졌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흥!’ 하고 놀라게 해주려던 미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것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이안의 얼굴인 것을 보면.

하, 실패구나.

미아는 머쓱해져서 잔뜩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

“…….”

“더 해보지?”

이안이 나긋하게 말했다.

미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뭘, 더 해보라는…….”

“장난이라도 쳐보려던 것 아닌가?”

“아…… 그치만 이미 들켰잖아요.”

“모르는 척해주지.”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 모른 척이라도 하려는 듯 허공을 응시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아는 그런 그의 태도가 당황스러워 허둥지둥했다.

정말 해? 정말 하라고?

이미 뻔히 들켰는데, 지금이라도 하라고?

“…….”

이안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그대로 미동도 안 했다.

설마, 진짜 해야 하는 건가.

미아의 눈동자가 수선스럽게 굴렀다.

뻔히 다 아는 장난을 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가 장난을 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든 것을 눈치채고 한 배려인가?

그렇다면, 그건 너무 다정한 행동인데.

어쩌면 이 남자, 자신이 이토록 다정한 사람임을 그 긴 시간 동안 모르고 산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미아는 그에게 다가섰다.

그의 어깨를 툭 쳐볼까, 그도 아니면 앞으로 가서 ‘짠’ 하고 양 팔을 벌려 보일까.

그런 고민은 의미 없었다.

덥석.

미아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안의 경직된 몸이 여실히 그녀에게 전해졌다.

덩치 차이가 워낙 나는 바람에 안았다기보다는 달라붙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았으나, 미아는 제가 이안을 끌어안았다는 사실에 깊은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어쩌면 이리 따뜻한 품이 그리웠을지도 모르니까.

이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저를 감싼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장난…… 이, 지나치군.”

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수줍기만 했다.

미아는 그런 그가 귀엽다고 무심코 생각하며 손을 뻗어 그의 배를 토닥였다.

“이렇게 해도요?”

“미아.”

“네?”

“나는 남자다.”

갑자기 웬 남자 타령?

미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려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꼭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이안의 품에 미아가 들어찼다.

“…….”

허벅지끼리 닿고 나서야, 비로소 미아는 이안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목소리를 죽였다.

“여긴 무슨 일로 나왔지. 그렇게 춥게 입고서. 고작 나를 놀래주려고 여기 온 것은 아닐 테고.”

“별로 안 추워요, 괜찮아요.”

“안 춥긴. 코가 붉어졌다.”

코가?

미아는 손을 들어 제 코를 슥슥 문댔다.

그 투박한 몸짓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무심히 제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미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아, 아니에요! 이안 경도 춥잖아요.”

“나는 추위를 모른다.”

추위를 모르는 사람의 귀가 이렇게 빨개지나?

미아는 하는 수 없이 이안이 둘러준 망토의 깃을 손으로 쥐었다.

고개를 파묻으니 이안 특유의 살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그건 또 좋아서, 미아는 말이 없어졌다.

이안은 꼼꼼히 망토의 앞섶까지 여며주고 나서야 돌아섰다.

내내 조금 소외 받는 기분이 되어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자들이 다시 고개를 급히 숙였다.

이안이 다정한 건, 미아 한정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아둔한 자들은 아니었다.

“최, 최대한 빨리 고치겠습니다.”

“눈이 녹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그, 눈은 깨버리면…….”

이안은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이안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미아는 무심코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얼어버린 것을 무리해 깨다가 옆에 있는 담이 무너질 수 있다. 너희 둘 다 목숨을 잃는 것은 금방이겠지.”

“히이익!”

목숨을 잃는다는 말에 당황한 남자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미아의 팔을 쥐어 제게 팔짱을 끼게 한 채였다.

“자연히 녹는 것을 기다렸다가 보수하는 것으로 하지. 햇빛을 보니 사나흘이면 눈이 녹을 것 같으니까.”

“그, 그래도 될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가 곁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나긋한 그의 태도에 두 남자는 크게 안도했다.

미아는 무언가 마음에 든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따뜻해서요.”

“아직 날은 추운데.”

“마음이요. 이안 경의 마음이.”

“내 마음?”

이안의 물음에 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식어가는 것이, 데리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 팔을 꼭 잡고 있는 미아와 걷는 것이, 눈이 발아래로 뽀드득 소리를 내며 스러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제법 좋아서.

그래서 조금만 더 걷자고 생각한 이안의 앞에.

“드디어 보는구나.”

낯선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붉은 입꼬리를 한껏 치켜올리며 웃었다.

아름답고도 위험해 보였다.

❀ ❀ ❀

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체.

열여섯에 최연소 황후가 되었다.

황제는 이전에 있던 황후가 죽기를 기다린 것처럼 황후가 죽자마자 베아트리체를 새로운 황후로 들였다.

사람들은 베아트리체의 화려한 외모에 홀린 황제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아트리체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궁에서 일하던 시중 중 하나였다.

그런 천한 출신의 베아트리체가 황후의 자리에 앉다니.

당연히 신하들은 하나 같이 반대하고 나섰다.

베아트리체 같은 사람이 황후가 된다면 황실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베아트리체는 황제에게 속삭였다.

‘저를 욕하는 이들을 모두 벌해주세요. 저를 욕하는 건 저를 선택한 폐하를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그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해요.’

확실히, 황후에 대한 반항은 황제에 대한 반항과 같았다.

황제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수많은 이들의 목이 댕강댕강 잘려나갔다.

베아트리체는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다.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혀를 뽑았다.

이전 황후와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것은 모두 딸이었고.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황궁을 떠나 이웃 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거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와 결혼해야 했다.

그들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아니 경멸하는 눈길로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를 바라보다 궁을 떠났다.

결국 황궁 안에 남은 것은 그녀와 황제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가지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만을 닮은 아들이었다.

‘봐. 폐하를 하나도 닮지 않았잖아. 폐하의 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해.’

세간을 떠도는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럴 때마다 베아트리체는 황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눈이 짓무를 정도로 우는 어린 황후를 달래기 위해서 황제가 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어쩌면 폭군은 이안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은, 황제 대신 황후를 미워했고.

이르게 죽은 황제의 자리를 대신해 칼날을 빼든 이안을 미워했을 뿐이다.

“어머니.”

이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안의 옆에 서 있던 미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 어머니라니. 그럼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분이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 전하?

두말없이 죽으라고 했던 그 냉혹한 여자란 말이야?

“바,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미아가 얼른 치맛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미아를 향하는가 싶더니 다시 이안을 향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새 새로운 부인을 들이겠다고?”

“예. 제가 선택한 여인입니다.”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으로 보이는데.”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했으니까요.”

시작부터 기싸움이 아주 팽팽하다.

이안은 갑작스러운 베아트리체의 등장에도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물론 얼굴이 잠시 굳기는 했지만, 금방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다.

그래서 놀란 것은 미아였다.

어머니가, 그것도 자식더러 죽으라는 비정한 어머니가 자신을 직접 찾아왔는데도 놀라지 않다니.

설마 최근에 왔다는 서신이 어머니의 서신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무슨 목적으로 왔을까.

설마 이안을 해치기라도 하려는 걸까?

반사적으로 이안을 팔을 쥔 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안은 손을 들어 미아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같았다.

“잊었니? 이 세상에서 네가 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 세상을 나왔으니, 이제는 제가 고를 수 있을 텐데요.”

“나왔다면 윌리엄이 너를 왜 찾아왔겠니.”

“하나하나 옥죄어드는 어머니가 숨 막혀서?”

“…….”

베아트리체는 웃고 있었지만, 웃지 않았다.

그 살벌하고 서늘한 기운을 미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안도 그렇지, 한 마디도 어머니에게 져주지를 않는다.

이러다간 정말 큰 싸움이라도 날 것 같았다.

머리를 굴려야 해.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분위기를 풀어야 해!

그렇지만 어떻게?

이미 내가 마음에 안 드신 눈치인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미아의 눈동자가 바쁘게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그런 미아를 빤히 바라보던 베아트리체가 입을 열었다.

“미아 양?”

“네. 미아 비잘린, 아니 다르뷔. 아니, 미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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