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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첫눈에 반했다는 말 (39/95)

39화. 첫눈에 반했다는 말



 

미아를 다시 찾으러 오겠다.

카일렌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치기 어린, 흥분한 상태에서 내뱉은 성급한 말이었을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말이었다.

카일렌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흔들린 것은 미아의 눈빛이었다.

카일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위로 향했다.

저벅, 저벅.

걸음걸음을 옮겨 미아의 앞으로 다가온 카일렌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당황한 미아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일렌이 손을 뻗어 미아의 손을 쥐었다.

이안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여기 머무세요.”

“경솔한 행동은 삼가는 게 좋을 텐데.”

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참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미아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카일렌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대체 무얼 바라고, 무엇 때문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일단 몸을 일으키시는…….”

“그대의 마음을 져버리고, 황태자의 자리에서 말도 없이 도망치려고 했던 것. 그대가 내 아내였음에도 그대를 나와 별개라 생각하고 혼자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버린 것. 그대를 이 차디찬 땅에서 떨게 한 것. 모두, 모두 내 불찰이고 잘못입니다.”

카일렌의 투명한 눈동자가 미아를 담았다.

그 안에 든 미아의 모습은 그의 눈에 담긴 눈물처럼 일렁였다.

끝내 듣고 말았다. 그의 사과를, 애원을, 그녀에 대한 참회를.

미아는 그런 카일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작았나, 제 주군은.

그녀가 따르던,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보다 크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깨달았다.

카일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 카일렌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

만약 그를 전과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면 이 사과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프거나, 괴로울 터였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 끝내 외면했음을 알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사과는 오히려 미아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마치, 미아가 그의 사랑을 받지 않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드디어, 비로소 끝이 없던 괴로움과 갈망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시다니 다행이에요.”

미아의 입술 새로 말이 샜다.

미처, 그녀가 생각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카일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이안 역시 조금 놀란 듯 미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제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비록 당신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황태자비로서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알았어요. 그건 결혼 생활이 아니었어요. 그저, 당신의 옆에서 따로, 나의 삶으로 살아가는 삶이었죠. 우리에게는 우리가 없었던 거예요.”

“미아.”

한번 말을 뱉기 시작하자, 멈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이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렸던 사람처럼, 종일 왼 대사를 뱉는 연극배우처럼.

누구보다 화려하고, 멋지게 미아는 그녀로 살아내고 있었다.

“전하가 나에게 준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입니다. 나는 당신이, 카일렌 황태자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의 절망감을 아직도 기억해요. 그때야 비로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에요.”

미아는 말을 하면서 점점 확신을 얻어갔다.

마치, 자신이 뱉은 말들이 다시 고스란히 돌아와 제 생각과 의지가 되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거침없었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때 과거의 미아는 죽었어요.”

“미아. 무슨 그런 말을.”

이어 미아가 뱉은 말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카일렌은 그의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숨을 급히 들이켰다.

하마터면 딸꾹질이라도 뱉을 뻔했다.

“제가 직접 서신을 쓰겠어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그것을 전달해주시면 두 분도 저를 더는 찾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미아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두 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달브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녀의 최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전하고 설득하는 것일 뿐이었다.

“……아이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아이는 이안 경에게 주더라도, 그대의 남은 삶은 내가 돌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카일렌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미아가 제게 처음으로 이토록 단호하고 서늘한 모습을 보이니 당황스러웠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다 자연히 떠오른 것은 아이였다.

정말 이안 경의 아이라면, 그래서 미아가 자신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녀가 아이를 무사히 낳고 저에게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이안의 아이를 갖고 싶어서, 그녀의 뜻대로 가진 것일 리 만무하니까.

카일렌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뇨. 그것은 불가해요. 저는 여기서…….”

“…….”

“여기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나로 살고 있어요.”

“자유?”

미아의 가슴팍이 들썩였다.

말을 하느라 너무 흥분했다.

카일렌의 입이 턱 벌어졌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카일렌은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들이, 그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그에게 사랑해달라고, 사랑한다고.

저를 왜 봐주지 않았냐고 화라도 내어야 했다.

속고 있다.

속아서 미친 것이다.

카일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손끝이 이안을 향했다.

“미아는 지금 이 자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이 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압니까?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이들은 죄다 처형장에 보냈던 이입니다. 이 자의 속박 안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한 번이라도 성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본 적이 있습니까?”

“…….”

홧홧한 통증이 카일렌의 가슴에서 퍼져나갔다.

그를 부정하고, 그와 함께 했던 결혼 생활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마치 이안을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말도 안 됐다,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아는 이제껏 제 곁에서 저만을 알고 아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관심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폐위된 폭군을 향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미아는 속고 있었다.

이안에게 속았든, 카일렌을 향한 배신감에 속았든.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만이 자유가 아니에요.”

“지금 미아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분노가 크다는 사실을 압니다. 배신감과 상처도요. 그 시기에 이안 경이 마침 그대를 거뒀으니, 그대가 지금 이안 경과 즐겁게 지내고 있다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이안이 카일렌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뻗어 미아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카일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이안에게 달려들어 미아를 빼앗아 오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마음에 일었다.

어째서일까.

미아를 한 번도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오히려 올리비아를 향한 설렘이, 떨림이 그가 느꼈던 첫 호감의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곳에 온 뒤로 줄곧 그랬다.

마음이 수선스럽고 진정되지 않았다.

이안과 함께 있는 미아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미아를 대하는 이안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고.

미아는 내 부인이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대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마음이 이렇게 요동치고 있단 말인가.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이만 돌아가지. 미아, 서신을 쓸 필요는 없다.”

“서신은 제가 쓰는 게…….”

“내가 직접 쓰도록 하지. 미아 다르뷔는 여기서 이안 다르뷔와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미아 비잘린은 없으니 찾지 말라고.”

미아는 이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게 쓴 편지를 달브 황국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미아의 손을 쥐고는 식당을 빠져나갔다.

“……전하.”

마치 이 공간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던 올리비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는 이 상황이 그저 어처구니없었다.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는 마치 미아를 사이에 두고 다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대화였다.

이런 분위기에 한 번도 속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올리비아를 두고 수많은 귀족 남성들이 싸우는 모습은 보았어도 말이다.

이렇게 철저히 외면당해 본 적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올리비아는 억울해졌다.

억울하고, 분해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는 카일렌에게 다가가, 뺨을 세게 올려붙일 수밖에 없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일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카일렌이 당황한 듯 제 뺨 위에 손을 얹고 올리비아를 보았다.

“저를 배신하시는 겁니까?”

“올리비아, 그 뜻이 아닙니다. 올리비아를 두고 가겠다거나,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하십니까?”

“…….”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전하를 따랐습니다. 오직 전하 하나만 보고 따랐어요. 제 손으로 저의 남편을 폐위시키는 것을 도왔단 말입니다. 이 기나긴 전쟁을 끝냈고, 모두의 멸시에도 전하의 곁이라면 상관없다 믿으며 달브 황궁을 지켰습니다.”

“…….”

카일렌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올리비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고인 눈물은 서글퍼서 고인 눈물이 아니라, 화가 나서 고인 눈물이었다.

이 화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녀는 가슴을 들썩였다.

“전하의 약속과 맹세는 모두 거짓이었나요?”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저를 이렇게 모욕하지 마세요.”

“…….”

“저는 전하의 사람입니다. 전하가 없으면 저는 죽어요.”

올리비아가 손을 뻗어 카일렌을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카일렌은 하는 수 없이 올리비아의 허리를 둘러 끌어안았다.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감정이 앞세워져 눈이 멀었다.

자신이 배신해놓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보기 싫어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우스웠다.

카일렌은 제가 어디까지 못나질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 괴롭고 두려웠다.

적어도 올리비아는 카일렌의 곁에 있었다.

올리비아가 내밀었던 구원의 손길을 카일렌은 아직 잊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카일렌이 손을 들어 올리비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그녀의 마음이 조금 녹으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윽, 저를 사랑해주세요, 전하.”

미아를 망가뜨려야겠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망가뜨려야겠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회만 잡으면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갚아주어야겠다.

하지만 그런 시꺼먼 속셈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찬란하고 눈부신 그녀의 얼굴만 아름답게 빛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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