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침대 위에서 엄살 부리지 마
‘질투, 질투라니! 내가 질투라니.’
미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가 싶더니, 귀 끝까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작 그렇게 물은 이안은 얄궂을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달리 무엇이지?”
“네?”
“그렇게 아련한 얼굴을 하고 가까운 사이였느냐 묻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면 대체 뭐냐는 말이야.”
“그, 그거야.”
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질투’가 맞았으니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이안에게 털어놓을 수는 결코 없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
“…….”
“아니면 무엇인지 설명해주겠어?”
“……설명할 수 없어요.”
“미아.”
“네.”
“가만히 보면 은근히 고집부릴 줄을 알아.”
고집이 있다고?
그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아는 줄곧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고집을 부리는 일은 좀체 없었다.
어렸을 때는 부모와 오빠의 말을, 결혼해서는 황후와 주위 어른의 말을 들은 그녀가 주관을 가지긴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스스로 결심한 것은 죽는 것이었다, 눈발에 파묻혀 죽는 것.
그 결심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한 이안은, 이제 그녀에게 무엇이든 선택하게 했다.
표면적으로는 미아를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고 옭아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아이가에 남는 것도, 이안의 곁에 남는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말 못 해요.”
“정말이지…….”
이안은 큼지막한 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음을 들키고도 들키지 않은 척, 애써 태연한 척 고집부리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척할 수가 없었다.
“응? 이안 경?”
갑자기 제 얼굴을 숨겨버리는 이안의 모습에 미아가 까치발을 디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눈을 제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들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뭐예요!”
“어차피 갈 것,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매한가지 아닌가.”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걸어가면 되잖아요.”
“걷는 것보다 이게 빠르다.”
“그럴 수가 있나…….”
미아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이안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이렇게 재잘대는 모습을 보니 걱정으로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다.
‘조만간 너를 찾겠다.’
그의 어머니는 편지에 그렇게 썼다.
한 번 버린 것은 두 번 다시 찾지 않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었다.
그런 그녀가 새삼스레 그를 찾는다?
좀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녀는 왜 자신을 찾으려는 것일까.
자신을 찾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역사에 몇 없는 폐위된 황제가 되어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온 지금, 자신을 더 망가뜨리지 못해 아쉽기라도 한 것일까?
“이안 경?”
어느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한 미아가 걱정스러운 듯 이안을 불렀다.
생각에 잠겨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이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침실의 문을 열고 미아를 안으로 옮겼다.
가뿐히 소파에 내려두자, 미아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짚었다.
“혹시 무슨 심각한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심각한 일이라면.”
“……그, 서신 말이에요.”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미아에게는 차마 전할 수 없었다.
미아라면, 분명히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가지고 이안을 걱정하며 며칠 밤을 제대로 잠도 못 잘 테니까.
게다가 아무리 이안이 폐위된 폭군이라고 한들 미아에게 걱정이나 끼치는, 그런 못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안은 지금껏 누군가를 몰아세우고 벌하는 위치였다.
한 번도 그 자신이 몰아세워지거나 벌을 받는 위치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이어질 터였다.
그에게는 이제 지킬 것이 생겼으니 말이다.
“왜요?”
“뭐?”
그런데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아는 대뜸 물음을 던졌다.
이안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물음에 다소 당황해 되물었다.
“왜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안 경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해요. 그러니 이안 경의 걱정은 제 걱정이기도 하고요.”
“…….”
미아는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주는 묘한 안정감이 마음을 묘하게 흔들어서, 이안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네가 자초한 것이다.”
“네?”
“네가 자초한 일이니, 감당도 그대가 해.”
제, 제가 뭘 자초했다는.
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제 입술로 머금어 들였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쓰러지는 미아의 고개를 받쳐 안은 이안이 그녀의 숨을 머금어 삼켰다.
이안과 미아의 허벅지가 서로 포개어졌다.
이안은 그녀의 허리가 가련히 떨리는 것을 보고 달래듯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감당할까?”
미아는 얼굴이 감당 못 할 정도로 붉어지고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틀었다.
이안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맞닿은 부분이 모두 벌겋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저, 말씀하신 대로 서신은 잘 전달했습니다.”
“…….”
이안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중은 이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서신에 찍혀있던 문장이 황실의 문장이었으니, 시중들도 황궁에서 이쪽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된 것이다.
허나, 무슨 말을 전한단 말인가.
그게 혹여 지금이라도 그에게 벌을 주겠단 것이라면?
그를 처형하겠다는 것이라면?
물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고, 그가 혹여 나쁜 마음이라도 품을까 노심초사인 시중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주인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저, 미아 양은.”
“잠들었다.”
“그럼 저녁은 어떻게…….”
“늦은 시간이라도 깨면 먹일 테니, 간단한 것을 준비해두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요새 부쩍 잠이 많아지셨네.
무슨 고단한 일이라도 있으셨나?
시중은 이안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미아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가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시중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이안이 손을 내려 미아의 속눈썹을 손가락 끄트머리로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미아의 눈꺼풀이 떨리는가 싶더니 슬쩍 눈이 뜨였다.
미아가 멍하니 이안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 잤어요?”
“응.”
“얼마나요?”
“해가 이만큼 움직일 동안.”
이안이 엄지와 검지를 조금 벌려 보였다.
미아는 당황한 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런데 왜 자신이 이안을 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는 거지?
지금 자신의 뒤통수 아래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 쿠션보다는 딱딱한데.
설마 이거…… 이안의 허벅지?
“어, 어. 어!”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미아가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오죽 급하게 일으켰으면 눈앞에 현기증이 일어 잠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안은 그런 미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조심하지.”
“아…….”
“아까 무리라며 자꾸 달아나지 않았는가.”
그, 그거야.
정말 무리였으니까.
미아는 잠들기 전 둘이 나눴던 은밀한 대화와 움직임이 생각나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안이 그런 그녀를 보다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툭 건드렸다.
“창피한가?”
“……네.”
“창피할 일이 뭐가 있지. 아직 끝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그, 거의, 거의 그 근처까지는 갔잖아요.”
“엄살이 너무 심해.”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동그란 콧방울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았다.
엄살이 심하다니.
미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이제껏 카일렌과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정사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만지고 핥고 깨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이안 경은 왜 그렇게 능숙해요?”
불쑥 미아가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미아야, 시중과 황후 폐하가 가르쳐준 대로 따랐을 뿐이지만.
이안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안단 말인가?
설마 그가, 문란한 황제?
“……!”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미아가 몸을 뒤로 물렀다.
이안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그녀의 몸짓에 손을 뻗었다.
미아는 생각보다 단호히 그 손길을 피했다.
처음 그녀를 본 순간부터 다짜고짜 입을 맞추려고 하질 않나, 살려준 대가로 밤을 보내자고 하질 않나.
미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때부터 그런 게 아닌가.
“왜 갑자기 몸을 빼지? 다시 이리 와.”
“싫어요.”
“싫어?”
이안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싫다고 한 거야?
가까이 다가오라고 했는데 싫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아를 바라보는 그의 어깨를 심지어 그녀는 뒤로 밀어버렸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내가 왜 능숙하냐고?”
“생각해보니 바트르 황국의 황제는 원하면 열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릴 수 있다는데.”
“뭐?”
“황태자비도 늦게 맞이한 이안 경이 이렇게 능숙하단 뜻은……!”
“아니다.”
이안은 대뜸 미아의 말을 부정했다.
미아는 의뭉스러운 눈길을 하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타고 나길 그런 것이다.”
“말도 안 돼요. 그런 걸 어떻게 타고 나요.”
“타고 나길 난 뭐든 잘한다.”
“잘한다고요?”
“그래. 잘해.”
“…….”
물론 못 하진 않았지.
오히려 잘하니까 문제지.
그런 것도 타고날 수가 있나?
혼란스러운 그녀의 앞에 내친김에 더욱 가까이 다가와 앉은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얼마나 잘하는지 더 보여줄 수도 있는데.”
“……사양할게요.”
미아는 이안을 밀어냈다.
그때였다.
꼬르륵, 하고 그녀의 배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민망한 표정으로 그녀가 배를 움켜쥐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눈치가 없군.”
“제가요?”
“아니. 나.”
이안이 미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쥐었다.
❀ ❀ ❀
“올리비아 양은 어때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신경 쓸 일을 만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미아는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이안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이안은 그 손을 찾아 쥐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미아가 버벅거리는 사이, 그것을 본 올리비아가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눈보라가 그치지 않으니,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겠군.”
“이틀만 더 지켜보고, 그래도 변화가 없으면 출발하려 합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요.”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겠군.”
이안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미아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긴장감이 식당 안을 맴돌았다.
“돌아가서 무엇이라 전할 겁니까. 그대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미아를 그리워하는 것 같던데. 그러니 그렇게 강경하게 나온 것이겠지.”
“…….”
“미아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테고.”
카일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일렌 대신 입을 연 것은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는 지난 시간 동안 카일렌이 얼마나 휘둘리는지를 잘 보았다.
여기에서 싹을 자르지 않으면 카일렌은 내내 미아를 그리워하며 살지도 모른다.
“돌아가서 미아 양이 여기서 잘 지내고 있다 전하겠…….”
“다시 찾으러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