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녀의 명연기
“미아 양?”
미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한창 내리고 있었다.
카일렌과 올리비아는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는 눈치라지만, 이런 날씨에 돌려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올리비아가 혼자 남아있는 미아에게 다가왔다.
미아는 예상치 못한 올리비아의 등장에 당황한 듯 놀라 입을 열었다.
“네, 네?”
“여기 계셨군요.”
“아, 네. 눈이 많이 오길래요.”
“그러게요.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좀 더 머무르다 가길 권해야 하나?
하지만 이 성의 주인은 미아가 아니었다.
그녀 혼자서 독단적으로 그런 걸 결정할 수는 없는데.
미아가 슬쩍 난처한 얼굴이 되어 올리비아의 눈치를 살폈다.
올리비아는 별 뜻 없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미아를 마주 보았다.
‘……예쁘다.’
무심코 든 생각이었다.
확실히, 올리비아는 예뻤다.
눈은 어쩜 그렇게 크고, 코는 어쩜 그렇게 높은지.
사람인지, 인형인지.
신이 모든 인간을 공들여 만드셨다지만, 분명 올리비아만큼은 더욱 공들여 만들었을 거다.
“이안 경은 어디에 계세요?”
“잠시 볼 일이 있으시다며 서재로 향하셨어요. 서신이 도착한 모양이에요.”
“서신이요?”
올리비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폐위된 폭군에게 여전히 서신이 온다?
누가 보냈을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보낸 것일까.
설마, 귀족 중에서 아직 그를 따르는 이가 남은 건가.
그 사실이 황태후와 윌리엄 황제에게 알려진다면, 이안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올리비아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그런 생각까지 마친 올리비아는 미아의 팔을 자연스럽게 쥐어 팔장을 꼈다.
“잠시 저와 걸으실까요?”
“거, 걸어요?”
미아의 몸이 긴장으로 굳은 것을 느낀 올리비아가 괜찮다는 듯 미아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미아는 올리비아를 따라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성안의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하며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미아 양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요?”
“네. 이안 경의 아이잖아요? 두 분이 그런 사이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 그렇죠. 다행이죠…….”
미아는 어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정말 모르는 건가?
미아가 가진 아이가 카일렌의 아이라는 것을.
하긴 안다면, 지금 굳이 이렇게 말할 리가 없겠지?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거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미아로서는, 올리비아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마냥 편하고 반갑지는 않았다.
올리비아는 카일렌의 마음을 가져간 장본인이니까.
미워야 하는데, 밀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다가오니 막상 그럴 수가 없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이 없어서일까, 그녀도 같은 여자라서일까.
올리비아를 향한 카일렌의 마음을 생각하면, 둘이 얽혀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냅다 뺨을 때려버렸어요.’
‘뺨을요?’
가끔 미아를 보러 온 귀족 부인들이 남편의 외도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도의 상대는 주로 집에 있는 시중이나, 파티에서 마주친 다른 집 귀족 부인이었다.
미아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안도했었다.
본인은 그런 삶과 거리가 멀다고.
우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는 않지만, 아끼고 있고 그것은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
그러나 그들의 삶은 미아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아가 올리비아의 뺨을 올려붙일 만큼 간이 크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설령 그녀가 손을 뻗더라도 순순히 뺨을 내어줄 만큼 올리비아가 순진하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어때요, 아이가는? 지낼만 해요?”
“…….”
“미아 양?”
아…….
미아는 그제야 생각에서 깨어나 올리비아를 보았다.
올리비아는 그녀를 그 큰 눈동자로,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미아와 이안이 그런 사이가 된 것도 사실이고…….
카일렌이 미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올리비아의 탓도 아니니까.
올리비아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 걸까.
아닌가, 마음이 너무 무른 건가?
황후 폐하라면 이때 어떻게 조언해주셨을까?
또 미련하게 과거의 인연을 생각했다, 미아는.
어쩔 수 없었다.
궁에 온 뒤에 모든 것을 그분에게 배웠으니까.
“네. 처음엔 추웠는데, 익숙해지니 좋아요.”
“아무래도 달브 황국에 비해서 바트르 황국이 춥죠. 특히 그중에서도 아이가는 유난히 추운 편이라, 걱정했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죄송하죠.”
올리비아는 걸음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말에 미아가 걸음을 멈추고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사과를 들은 건가?
미아가 멍하니 올리비아를 보자, 올리비아는 말을 이었다.
“카일렌 전하가 전사한 줄 알고 시신을 수습하러 오셨잖아요.”
“…….”
“그런데 전하는 저와 함께 있었죠. 같은 여자로서 얼마나 상심하시고 상처받으셨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요.”
“…….”
“남편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심정을 저는 알 수 없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수그렸다.
미아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올리비아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어떤 배신감에 몸부림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올리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비아는 울고 있었다.
정작 울고 싶은 것은 미아였는데도.
“……올리비아?”
하늘도 무심하지.
때맞춰 등장한 것은 카일렌이었다.
카일렌은 미아를 발견하고선 놀란 듯 우뚝 멈춰서더니 그 앞에 선 올리비아의 어깨가 흐느끼듯 떨리는 것을 보고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왔다.
올리비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연신 눈물을 훔쳐내면서도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괜히 미아만 난처해졌다.
마치 미아가 울린 모양새가 되어 버려서.
“무슨 일입니까.”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올리비아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미아 양.”
“아, 아니에요.”
미아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올리비아가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며 사과할 줄은 몰랐다.
그 아름다운 눈이 눈물에 젖어 붉게 물들고 퉁퉁 붓는 것을 보니 카일렌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카일렌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올리비아의 뺨을 닦아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올리비아가 이렇게 사과하니 이해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사과를 하다 울음을 터뜨린 올리비아를 보고 미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을 용서한다고? 울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거짓이었다.
아직 미아는 누구를 용서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용서하고 말고 할 영역인지도 알 수 없었다.
“웬 소란이지.”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확인할 기세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 가녀린 몸을 움찔거리며 떨다가 이내 기절하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올리비아!”
카일렌이 놀라 올리비아를 안아 들었다.
미아도 당황해 정신을 잃은 듯 미동이 없는 올리비아의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의사, 의사가 있습니까?”
“굳이 의사를 불러야 하나?”
이안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아가 쓰러졌을 때는 의사를 속히 부르라고 재촉했던 사람이었다.
그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였다.
“이안 경!”
미아는 그런 이안을 저지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시중을 불렀다.
안 그래도 시중이 가까운 곳으로 의사의 거취를 옮겼다며, 될 수 있는 한 빨리 부르겠다고 답했다.
모두 미아 때문이었다.
의사가 오는 것이 늦어져 미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안이 돌변해 성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됐지? 이제 그대의 방으로 돌아가 기다리지.”
“저도 갈게요.”
“미아.”
이안은 미아를 불렀다.
미아가 이안을 돌아보자, 그가 손짓했다.
저에게 가까이 오라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미아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 줄은 몰라도 어쨌든 올리비아가 자신과 함께 있다 쓰러졌으니,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대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지?”
“그래도.”
“그녀는 멀쩡할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지.”
“이안 경, 목숨을 그런 데에 걸지 마세요.”
미아는 그녀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한편, 올리비아를 비웃는 듯한 그의 태도를 지적했다.
카일렌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안을 노려보았다.
이안은 그런 카일렌을 마주 보았다.
그래봤자 이안에게 카일렌은 정숙하고 순정적인 자기의 아내를 버린 인간쓰레기였다.
그런 사람에게 느낄 감정 따위, 경멸밖에는 없었다.
“카일렌 전하, 의사가 오기 전에 올리비아 양을 방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아는 그렇게 카일렌을 말리고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미아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반가워서 이안은 제 심기를 거스른 카일렌 따위 무시하기로 했다.
“가자.”
이안은 미아의 손을 쥐었다.
미아는 불안한 얼굴로 카일렌을 돌아보았다가, 이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들이 어떻든,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보나마나 널 난처하게 했겠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당황한 것이 네 얼굴이 죄 쓰여있는걸.’
이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곤 말없이 힐긋 웃어 보였다.
그건 당황하고 억울했을 미아의 마음이 가늠되어 그랬던 것일 뿐인데.
미아는 새삼 이안과 올리비아의 사이가 오래된 사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어 기분이 묘하게 일렁였다.
“가까운 사이셨겠죠.”
“누구와 누가?”
이안은 표정이 아까보다도 더욱 어두워진 미아가 신경 쓰여 물었다.
미아는 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니, 제 속이 너무 좁은 것만 같았다.
당연히 부부 사이였는데 서로에 대해 잘 알겠지.
아무리 둘이 헤어졌다지만, 둘 사이에 나눴을 유대감을 카일렌과 부부였던 미아가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와 누구냐고 물었다.”
“아, 올리비아 양과 이안 경이요…….”
“?”
이안은 예상치 못한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미아가 왜 갑자기 둘의 사이를 짚는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이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꼬리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미아는 그런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당황한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왜, 왜 웃으세요!”
“내가 웃고 있나?”
“웃고 계시잖아요?”
“그건 그대의 착각이다.”
“착각 아니에요. 웃고 있잖아요. 봐요, 지금.”
이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미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당황한 미아가 이안의 품에 안겨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질투가 났구나.”
지, 질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