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를 변화시키는
“…….”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일렌의 목을 베겠다니, 그런 말을 타국의 황태자에게 할 권리가 이안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안이 대범하게 뱉은 말은 카일렌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카일렌의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미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안이 자신의 마음을 그리 깊이 생각하고 여겨주는 줄은 몰랐다.
물론 카일렌에게도 이리 깊은 적대감을 보일 줄 몰랐다.
올리비아는 흐르는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입을 열었다.
카일렌의 편을 들어야 했다.
여기서 제가 카일렌의 편을 들지 않으면, 카일렌이 그녀에 대한 믿음을 모조리 잃을지도 몰랐다.
“카일렌 전하는 달브 황국의 황태자입니다! 이안 경이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대해서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이안의 싸늘한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올리비아는 그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예부터 올리비아는 절대 이안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나 같은 폐위된 폭군이 무슨 짓을 한들, 누가 벌한단 말인가? 기껏 해봤자 다시 독이 든 술을 나에게 보내겠지.”
이안은 조소하듯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니 카일렌이 섣불리 도박을 한들 거기에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안 경.”
이번에 이안을 말린 것은 미아였다.
그녀는 그의 말이 아팠다.
그를 벌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가 이미 독이 든 술을 받아보았다는 것이.
사방이 적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한편으로는 카일렌이 신경 쓰였다.
카일렌은 이런 모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걸 모르지 않으니, 지금 카일렌의 심정이 어떨지 괜히 마음이 쓰였다.
이안은 그를 말리는 미아의 태도가 탐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어 카일렌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유가 묻은 몸짓이었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죠. 적어도 미아는 내 옆에서 행복하니까.”
“…….”
분노인지, 좌절감인지.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패배감 때문에 목에 핏대가 솟은 카일렌을 뒤로 한 채 이안이 미아에게로 다가왔다.
“남은 식사는 둘이서 오붓하게 하도록 하지.”
“…….”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티끌만치 남아있던 식욕도 그와 카일렌의 대립 앞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대로 떠나면 남겨질 카일렌이 신경 쓰였으나, 그렇다고 미아가 그를 위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카일렌의 옆에는 그의 여인인 올리비아가 있었다.
저를 좇는 카일렌의 시선을 알면서도, 미아는 이안이 내민 손을 쥐었다.
이제 카일렌과 미아는,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 ❀ ❀
“이만 돌아가요, 전하.”
올리비아가 카일렌을 보며 말했다.
식사 자리가 흐지부지 끝나고 나서부터 카일렌은 넋이 나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혼자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이안이 준 모욕에 대한 굴욕감을 씹어 삼키는 중일 수도, 미아가 자신이 아닌 이안을 따랐다는 사실을 곱씹는 중일지도 몰랐지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올리비아, 그녀를 괜히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달브 황국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에요.’
달브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카일렌을 설득한 것은 올리비아였다.
카일렌을 따른 것도 바트르에서 자신이 버려야만 했던 황후라는 자리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카일렌은 그녀와 함께 달브로 돌아감으로써 마지막 남은 명분마저도 잃어버렸다.
황태자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그 명분 말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내를 버렸다는 수치심뿐이었다.
그런 그를 누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말을 못 한 게 하나 있어요.”
올리비아가 카일렌의 얼굴을 힐긋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카일렌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사실 저에게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전하도 아시겠지만, 임신한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죠. 그냥 보기만 해도 감이 와요.”
“갑자기 그 얘기를 왜,”
“미아 양은 확실히, 임신을 하셨어요. 하지만 미아 양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에요.”
“내 아이가 아니라고?”
“네. 저는……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 수 있거든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올리비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신성이라고는 없는 카일렌이 그것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한 듯 고개를 젓던 카일렌이 입을 열었다.
“미아가 여기 머문 시간이…….”
“거의 바로였을 거예요. 오자마자 두 사람은 밤을 함께 보냈고 그날 바로 임신이 된 거죠.”
“그게 가능한가?”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바트르 황국에서는 간혹 그런 일이 있다고 해요. 선택받은 아이라고들 하지요.”
“…….”
올리비아가 카일렌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가만히 고개를 기댔다.
이런 방식이라도 쓰지 않으면 그가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그에게 버림받을 것만 같아서.
“저를 이제 사랑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건…….”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어요. 이제 와서 저를 버리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녀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에 카일렌의 어지러운 생각이 조금 잦아들었다.
정말 그녀의 말처럼 미아가 임신한 아이가 이안의 아이라면.
그것만큼 그를 괴롭게 하는 사실도 없었지만, 그의 아이인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내를 버린 남자로 살아갈 자신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다.
카일렌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들어줄 것입니다. 들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전하.”
“버리다뇨.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올리비아.”
“……제가 얼른 황태자비로 인정받을게요. 황태자비로 인정받아서 반드시 아무도 황태자 전하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저를 사랑해주세요.”
카일렌은 도저히 이런 올리비아를 내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올리비아를 끌어안은 카일렌의 속이 쓰렸다.
❀ ❀ ❀
느릿느릿.
미아의 눈꺼풀이 아래로 쳐졌다가 금세 위로 올라왔다.
책을 들고 있다지만, 내용에는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아는 지금 너무 졸렸다.
식사 자리를 그렇게 마치고 나와 입맛이 하나도 없어진 줄 알았더니 차와 함께 준비된 비스킷과 과일은 얼마나 맛있는지.
미아는 평소에 부리지도 않았던 식탐을 부리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안은 잘 먹는 그녀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고선 더, 더 먹을 것을 권했다.
그 결과.
미아는 터질 것 같은 배를 안고 앉아서 수마처럼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비스듬히 미아를 향했다.
미아는 자신이 졸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깰 때마다 열심히 책을 치켜들었다.
마치 졸고 있지 않은 척.
그 모습이 퍽 보기 귀여워서, 차마 이안은 졸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차라리 침대에 누워 편히 낮잠을 잘 것을 권할 수 없었다.
끄덕, 끄덕.
한참 앞뒤로 움직이던 고개가 점점 앞으로 기운다 싶은 순간 툭, 하고 미아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그리고 황급히 움직인 이안이 손을 뻗어 겨우 미아의 몸이 앞으로 쏟아지는 것을 막았다.
미아가 얼핏 눈을 떠 그를 보는가 싶더니 작게 속삭였다.
“조올려요.”
“조올리는 건 뭐지.”
“졸린 것보다, 더 졸린 것.”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듯 나긋하게 속삭인 미아는 이내 완전히 잠이 든 듯 숨을 색색 내뱉기 시작했다.
이안은 하는 수 없이 미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의 머리칼이 살짝 나부꼈다.
그 간지러움, 딱 그만큼의 간질거림이 그의 마음에도 일어나서.
“차를 좀 더 내올……!”
똑똑.
문을 두드리고 무심코 들어와 물으려던 애니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눈앞에 벌어진 풍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차가운 얼음 왕자, 아니. 얼음 폭군의 어깨에 기대 잠든 미아라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쉿.”
이안은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을 본 애니가 이안을 따라 제 입술 위에 검지를 포갰다.
그러고는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았다.
“우응.”
순간, 기척을 느낀 듯 미아가 몸을 뒤척였다.
긴장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이 된 이안이 그녀를 살폈다.
다행히 미아는 깨지 않았다.
대신 이안의 목덜미를 파고들 뿐이었다.
이렇게 안기는 걸 좋아하는 여자였나.
잠이 들 때마다 품에 곧장 안겨 오는 것을 보면 안기는 걸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도 제법 했을 것 같고.
그런 그녀는 카일렌의 품에 안기진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 미아에 대한 질투를 보이는 카일렌은 이안이 생각하기엔 못난 남자의 표본이었다.
아이의 핑계를 대며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미아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다.
그런 보호를, 품을 카일렌은 내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자격없이 미아를 취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고 싶었지만.
그럼 분명 미아는 슬퍼하며 서럽게 울겠지.
울어 엉망이 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가 슬퍼하는 일은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카일렌과 올리비아가, 저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지나치게 친절하고 순정적인 미아는 분명 슬퍼하고 괴로워할 테니까.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두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는 편이 나았다.
‘……!’
이안은 자신의 생각을 되새김질하다 그 자신에게 놀랐다.
누구에게도 이런 관용적인, 자비로운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미아가 아니라면 그는 절대 이런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이안은 손을 뻗어 앞으로 쏟아진 미아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황국 내 정치 상황이 아이가에게까지 도달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아들을 보러 가야겠다는, 다정하고도 섬뜩한 말이 그녀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을 때 윌리엄은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