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질투에 눈먼 사내
“……?”
오늘 미아는 이안의 예상을 전부 빗나가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이안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듯 비틀리는 그의 입꼬리를 눈여겨보며 입을 열었다.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싫어요.”
“뭐?”
“믿으시겠다면, 이유를 들려드릴게요.”
미아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다.
카일렌을 좋아했었지만, 카일렌의 앞에서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껏 내내, 그녀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른 채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미아에게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나랑 무얼 하는 거지.”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먼저 믿음을 보여주세요.”
“믿음을 보여달라?”
부끄럽고 창피한 이유가 대체 뭐가 있지?
그는 미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 아니 정확히는 아이가에 남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일전의 상황 역시 얼핏 보아도 매달리는 카일렌을 무시하고 이안에게 온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아가 그를 보고 단순히 당황해 온 것이 아님을 그녀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당혹감은, 들킴에 대한 당혹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오해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미 다 알면서도, 굳이 모르는 척 무게를 잡은 것은.
첫째로, 그가 너무 가벼워 보여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이고.
둘째로, 당황한 미아가 어떤 말로 그에게 변명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믿음이 보여지려나?”
이안이 그녀의 손을 끌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목에서 얼핏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목에는 찌르면 죽는 자리가 있다.”
이쯤이던가?
그가 그녀의 엄지를 끌어 친절히 짚어주었다.
둥, 둥.
그의 맥이 더욱 세차게 느껴지는 것 같아 그녀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주, 죽는 자리요? 근데 왜 거기다가 손을 가져다 대요!”
“믿음을 보여달라지 않았느냐.”
그 믿음이, 이 믿음이 아니잖아.
그거랑 그거랑 다르지.
“이안 경! 이건.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위험하니까 믿음을 보이는 행동인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더 할 말이 없었다.
미아는 어떻게든 엄지를 가만히 두기 위해서 손에 힘을 팍 주었다.
긴장한 미아의 손이 느껴지는 바람에 이안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평소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였는데, 미아의 앞에서만은 유난히도 그랬다.
“이제 이유를 말해보지.”
목숨까지 걸었는데, 고작 마음을 고백하는 게 창피하다며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미아는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좋아서요.”
“뭐?”
“같이 있는 것이 좋아요, 이안 경과.”
“…….”
순간, 이안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 것은 미아의 착각일까?
이안은 쥐고 있던 미아의 손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돌하게 하지.”
“그래서 제가 부끄러운 말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지금 창피해야 할 이가 누구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세요.
묻고 싶은 것도 잠시,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서는 아니고?”
“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은, 내가 좋다는 뜻 아닌가?”
이번에는 미아의 뺨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미아는 대답은 못 하고 괜히 입술만 달싹였다.
물론 이안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같이 있기 싫은 사람과 함께일 때 즐거움을 느끼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 좋다는 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맞다.
“그, 그게.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아닌가?”
그렇다고 미아가 인정할 수 있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미 같이 있는 게 좋다고, 그래서 떠나기 싫다고 그녀의 마음을 온통 드러냈는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이 이안을 향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주도권을 잡은 이안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괜히 멋있고, 섹시하고, 억울할 정도로 여유로워서.
미아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건만.
아이가의 성은 청결히 유지되어 거미줄 친 벽 하나가 없었다.
그럼 갈 곳은 한 곳뿐이었다.
이 대화를 마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미아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잠, 잠을 잘까요? 괜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진도가 생각보다 빠르군.”
“진도, 진도라뇨?”
“좋아하는 남녀가 한 방에서 잠을 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말뜻을 알아챈 미아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의 입꼬리가 움찔이다 이내 맑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물론 손을 들어 감추어, 그녀는 볼 수 없었지만.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그녀가, 그를 향했다.
그를 선택했다.
그것만으로 그는 잠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되었다.
❀ ❀ ❀
“정말이야? 이안 님이 그러셨어?”
“응. 같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셨어.”
“드디어 겸상을 하시려는 건가.”
“난 싫어.”
애니가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올리비아와 이안이 최대한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홀라당 넘어갈 이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괜히 신경 쓸 미아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니는 일개 시중에 불과한 것을.
“음식 내가자.”
“응.”
하는 수 없이 음식이 든 그릇을 챙겨 든 애니가 주방 밖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어찌나 짧은지.
문을 열자, 자리에 난처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미아의 모습이 곧장 보였다.
애니는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기죽지 말라고 부둥부둥 달래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내리눌렀다.
“…….”
“드시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식당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안이었다.
카일렌은 굳은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올리비아가 카일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새벽 이후 저렇게 파리한 얼굴이 되어있다.
“맛있네요.”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올리비아가 수프를 한 입 떠먹고 말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고 웬일인지 느긋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좋아하시던 맛이잖아요. 원래도.”
‘원래도’
이 말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미아를 응시했다.
이안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미아는 그런 그녀의 뜻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이안에게 속삭여 물을 뿐이었다.
“이런 걸 좋아하세요?”
“무엇이든 잘 먹는다.”
“양송이 버섯보다 옥수수가 더 좋으신 거예요?”
“둘 다 좋다.”
“무엇이 좀 더 좋은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준비할 때 좀 더 편해요.”
이안은 미아의 속삭임에 힐긋 올리비아와 카일렌을 바라본 뒤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제 입을 가린 채 미아에게 다가갔다.
“먹는 것으로 치면 그대만한 게 없지.”
‘머, 먹는 건데. 나라고?’
미아가 경악하듯 눈을 크게 치뜨며 이안을 보자, 이안은 뭐가 좋은지 여유롭게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그 모습이 제법 정다워 보여 뒤에 서 있던 애니의 어깨가 괜히 으쓱해졌다.
“……많이 가까워지셨네요, 두 분.”
“매일 살을 맞대고 지내다 보니, 가까워질 수밖에.”
카일렌은 이안의 말에 몸이 굳었다.
매일 살을 맞대고 지낸다고?
둘이?
살을 맞대고 지낸다는 표현이 그저 비유적 표현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으니 괜히 더 신경쓰였다.
미아는 순진하고 무결한데! 그런 미아가 저 폭군의 마수에 휩싸이다니.
믿을 수 없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안 경.”
미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까부터 자꾸 저런 농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반응은 무시한 채 태연하게 스테이크를 썰 뿐이었다.
그리고 전혀 비워지지 않은 미아의 접시를 보며 물었다.
“썰어줄까?”
“…….”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애정과 배려였다.
미아는 흘끔 주위를 살폈다.
지켜보는 눈이 있어 굳이 받고 싶진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듯 이안이 이어 말했다.
“썰어주겠다. 그러면 한 점이라도 먹겠지.”
“제, 제가 먹을게요!”
“됐다.”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퍽 다정해 보여서, 올리비아는 속이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다정함이고, 배려였다.
“잠깐.”
카일렌이 참다못해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렌을 향했다.
“왜 그러시죠, 황태자 전하.”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어 느긋하게 물었다.
가진 자의 여유란 이런 것일까?
물론 카일렌의 말대로 움직임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듣고 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이안이 고기 한 점을 집어 미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미아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안 경.”
“보다시피 먹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먹여 주시는데요…….”
“먹여 주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타당한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소곤소곤.
본의 아니게 저들끼리 떠드는 모습이 되어버린 이안과 미아를 지켜보던 카일렌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찼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카일렌을 향했다.
설마 여기서 화라도 내려는 거 아니지?
그럼 그녀의 체면은 엉망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안 경.”
“예. 듣고 있습니다.”
“나에게 복수하려는 거면, 그녀는 내버려 두세요.”
“복수?”
이안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카일렌을 보았다.
카일렌은 망설임과 물러섬이 없었다.
갈등하는 것을 회피하던 이전의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복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와 올리비아를 원망하는 이안 경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로 인해서 아무 죄 없는 미아가 다쳐야 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미아를 다치게 한다?”
“……미아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그런 미아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카일렌 앞에 선 이안이 카일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엇 때문에?”
“…….”
“죽은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마주한 눈사태 때문에. 그런데 그녀는 알고 있더군. 그녀의 남편이 이미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죽은 게 아니라, 그저 겁쟁이처럼 도망친 것이라는 것을. 그런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
카일렌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올리비아에게까지 들렸다.
화가 났다.
그 순한 카일렌이 분노하고 있었다.
누구도 아닌 자신, 스스로에게.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를 데려온 것은 납니다. 그대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이미 그대의 목을 베었겠지.”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