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녀를…… 하시죠?
자신을 믿냐는 이안의 물음에 미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처음부터 믿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악명이 워낙 높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를 특별히 믿지 못한 적도 없었다.
사람의 선의를 믿는 그녀의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보였던 모습 덕분이기도 했다.
아무리 싸늘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여도 그의 행동엔 이상하게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아니, 따뜻함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러움이었다.
거리낄 것이 없는 폭군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그는 함부로 구는 법이 없었다.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의 뺨을 쥐었다.
그를 믿는다 순순히 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보기 아까운지.
그녀는 몰랐다.
몰라서 다행이었고, 몰랐기에 아쉬웠다.
그녀의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카일렌이 줄곧 봐왔다고 생각하면 사나워지는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지만.
앞으로 이런 그녀의 모습은 그만 볼 수 있었고, 그만 보아야 했다.
이안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미아의 얼굴이 간지러운 그 감촉에, 붉게 물들었다.
“빨리 낫거라. 네가 나아야, 밤을 함께 보낼 수 있으니.”
“……무슨 그런 말씀을!”
“부부가 하는 일이 무엇이 있지, 달리.”
“아직 저희는 혼인도 하지 않았고,”
“그럼 혼인할 생각은 있다는 건가?”
미아는 이안의 낯부끄러운 말에 당황해 몸을 굳혔다.
그는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이 태연한 얼굴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은근한 눈길이 더 부끄러웠다.
뒤늦게 약을 가지고 온 의사가 둘의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의사의 손에서 약을 뺏어 들고는 미아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쓰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은, 이럴 때에도 사랑스러워서, 그는 곤란했다.
❀ ❀ ❀
“…….”
카일렌이 걸음을 멈췄다.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에 이내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미아가 괜찮은지 보러 가겠다며 기세 좋게 온 사람치고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저도 모르게 쥐어진 주먹을 내려다본 카일렌은 생각했다.
어째서 두 사람이 저런 자세로 함께 있는 것인지.
어째서 미아가 저렇게 애틋한 눈으로 이안을 보는 것인지.
둘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마음이 왜 이렇게 뒤틀리는지.
미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굳이굳이 우겨 이곳에 온 이유도 그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안의 아이가 맞는지, 자신의 아이는 아닌지.
자신의 씨라면, 그 아이는 달브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야 했다.
황손이었으니.
하지만 정작 카일렌이 아이가에 온 이후로 줄곧 신경 쓰이는 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이냐가 아니었다.
미아의 마음이 향한 곳이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미아를 이해하면서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그녀를 빼앗길 수 없다는 소유욕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그녀에게 남은 감정이라도 있는 건가.
카일렌은 상념에 잠겨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곧 그늘 속으로 숨었다.
그조차도 모르던 그의 욕망이 뒤늦게 고개를 쳐들었다.
❀ ❀ ❀
애니는 자신의 앞을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하는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지금껏 그녀가 본 어느 여자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모두 이안 경의 전처가 왔다며, 그런데 그 여자가 지나치게 아름답다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성의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애니는 그들과 달랐다.
올리비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애니의 심사는 크게 뒤틀렸다.
“내가 좀 뵈어야겠다니까!”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어요, 이안 님께서.”
“너, 내가 누군지 모르니?”
“…….”
귀족들의 레퍼토리는 어찌나 전형적인지.
대뜸 제가 누군지 아냐 묻는 사람은 어디에나 빠지지 않고 있었다.
‘알다마다요. 미아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간 거로도 모자라, 아쉬우니 이안 님도 한 번 떠보려는 심산을 내가 모를 줄 알고요?’
애니는 비록 미아가 아프긴 해도, 그 덕에 두 사람의 사이가 좀 가까워진 것 같아 안도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올리비아가 끼어들려 하다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웬 소란이냐.”
……그랬는데.
귀도 밝지.
애니가 자신의 선에서 올리비아를 돌려보내기 전에 이안이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낭패감이 애니의 얼굴 위를 스쳤다.
조용히 올리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초대한 적이 없는 손님인데.”
“그게, 제가……. 제가, 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애니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안의 차게 식은 눈빛이 애니를 향했다.
물론 애니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나라의 황태자와 이전의 황후였던 귀족 영애가 성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시중 하나가 어떻게 막겠는가.
게다가 애니는 미아가 아끼는 아이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미아의 마음이 어떻게 상할지 모른다.
이안은 미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만큼은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올리비아의 얼굴로 옮겨졌다.
“분명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뜸을 들인 것치고 성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고고하게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장되어도 사랑스러운 연기를 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특기였다.
울상을 짓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이안은 미동도 없이 보았다.
“미아 양은 좀 어떠신가요?”
“미아 양?”
“……제가, 실수라도.”
“하긴. 이제 황태자비도 아닐 테니, 달리 붙일 칭호가 없겠군.”
“……이안 경.”
“미아가 자고 있다. 자리를 옮기지.”
이안은 자신에게 다가서며 말하는 올리비아의 손을 뿌리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보니까 괜히 더 짜릿하고, 갖고 싶잖아.’
이안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걸음을 옮겨 응접실로 향할 뿐이었다.
응접실에 도착해 자리를 권한 이안은 선 채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도도한 시선에 올리비아가 사로잡힌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앉으시지 않고요?”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을 테니 서서 듣겠다.”
“…….”
“미아 양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아이도 무사하지.”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에 이안은 유난히 힘을 주었다.
올리비아가 궁금해할 것이 미아의 안위가 아니라, 아이의 안위임을 모를 만큼 이안은 순수하지 않았다.
카일렌이 말한 대로, 미아의 아이가 그의 아이라면 올리비아의 자리는 위험했다.
물론 굳이 아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달브 황국에서 미아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안으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미아를 내어줄 생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그래. 그렇게 입바른 말을 잘했지, 예부터. 그래서 어머니의 총애를 받았고.”
“황태후 전하는 잘 계시나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나는 어머니인 황태후의 손에 직접 폐위된 황제일 뿐인데.”
올리비아는 이안의 말에 멈칫했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모든 일을 진실처럼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끔은 모르는 척이 나았다.
특히 그의 앞에서는 아는 것도 전부 모르는 척해야 했다.
안 그러면 언제고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까.
“여전히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오해?”
“제가 폐하의 곁을 떠난 것은, 황태후 전하의 말씀 때문이 아니에요.”
“…….”
“폐하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올리비아의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이 그녀의 큼지막한 눈에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보통 사내라면, 이런 모습에 눈빛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녀의 앞에서 동요하지 않는 남자는 이안이 유일했다.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낯빛을 하고 무심히 이안은 그녀를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 담았다.
“폐하의 마음을 끝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그건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는 이안의 마음을 사고 싶었다.
이안의 아내였으니까.
처음 본 남자들의 청혼도 턱턱 받아내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한 유일한 남자, 이안.
힘이 없는 가문의 공녀로 태어난 그녀가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권력가와 결혼하는 방법뿐이었다.
마침 그때, 이안의 어머니를 만났다.
황태후는 올리비아를 마음에 들어했다.
가문이 힘이 없다는 것도, 야망에 차 있다는 것도 모두.
바라는 사람이 없으면 결혼해라, 그것이 황태후가 이안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을 어길 만큼 간절한 연이 없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분해서였겠지.”
“폐하.”
“이제 나는 황제가 아니니 그 칭호는 좀 거북스럽군.”
“……제게는 언제나 황제세요.”
올리비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의 금빛 머리칼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뭐 하는 짓이지?”
“저를 용서해주세요, 폐하. 황태후 전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워서 그랬어요. 그래서 카일렌 황태자에게 전사한 척하라는 말을 전한 거예요.”
이안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턱을 쥐어 올렸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하고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싱긋 웃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군.”
“……!”
올리비아는 이안의 말에 당황했다.
이안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올리비아는 자기애가 강해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카일렌에게 갔다고 해서 달라지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할 수 없는 사랑은 그저 자기애에 불과하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올리비아.”
“네.”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올리비아도 그런 이안을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올리비아를 대충 손을 뻗어 잡아준 이안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다.
“연극은 그쯤 해두지.”
“…….”
“미아는 나의 사람이고, 미아의 아이도 나의 아이다. 이 사실을 그대가 사랑하는 ‘척’ 중인 카일렌 황태자에게 똑똑히 전했으면 좋겠군.”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올리비아만이 이안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사람을 그녀가 버렸다.
그녀에 대해 이렇게나 잘 아는 남자를, 어쩌면 그녀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히 이해해줄 수도 있는 남자를.
그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산 것이 이렇게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여자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