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제 나를 믿어
“혼인?”
카일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 그의 마음을 죄 뒤집고 헤집어놨다.
올리비아의 눈이 덩달아 커졌다.
혼인이라면 질색하던 이안이었다.
그런 그가 먼저 혼인 이야기를 꺼내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아는 내 아이를 가졌는데!”
카일렌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제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다.
미아의 배 속에 든 자신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아니,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미아를 생각해서라도.
이안은 함부로 미아와 혼인하겠다고 말해서는 안 됐다.
“…….”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올리비아의 눈빛이 요동쳤다.
설마 싶었다.
설마, 미아가 가진 아이가 카일렌의 아이일까 싶었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카일렌이 그것을 알고 미아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올리비아만 갈 곳 없는 신세가 될 모양새였다.
“……지금 한 말, 다시 해보지.”
한참 만에 입을 연 이안의 입술 새로 차갑고 서늘한 음성이 샜다.
그의 표정은 놀랍도록 찼고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 모순이 주는 압도감을 느낀 미아의 마음에 불안감이 안개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당신의 아이인 것을 알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쩔 셈이죠.’
미아는 묻고 싶었다.
그녀를 데리러 온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나?
책임을 지려는 카일렌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미아가 그 마음에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이가 아니라면, 데리러 오지 않을 사람이었을 테니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저버리는 일은, 카일렌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소심하고 다정한 성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그녀를 버린 것을 후회한다거나, 그녀가 그리워 그녀를 찾아온 것은 아님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아가 제 아이를 가졌다 말했습니다.”
“미아가 가진 것은 내 아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이안은 카일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카일렌이 들고 선 검이 이안의 목에 닿을 듯 가까웠다.
미아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싸우려는 거라면.
아니, 저러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때였다.
미아의 복부가 거세게 당기는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쓰러지듯 주저앉는 미아를 본 카일렌이 미아의 이름을 외쳤다.
“미아!”
그제야 뒤를 돌아본 이안이 바닥에 주저앉은 미아의 어깨를 쥐었다.
미아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통증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었다.
“배, 배가…….”
미아가 이안의 팔을 반사적으로 쥐었다.
아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안은 그녀가 잡은 자신의 팔을 바라보다,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려 황급히 성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라. 금방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
“이안, 이안…….”
미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안의 이름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지금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카일렌은 당황했다.
괜히 자신이 미아를 자극한 것이 아닌지, 그로 인해 미아가 충격을 받아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카일렌이 급히 둘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당황한 듯 그를 막아섰다.
“내 아이가 잘못될지도 모릅니다. 내 부인입니다, 미아는!”
카일렌은 그렇게 외쳤다.
문지기는 당황한 듯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애니조차 쉬이 나설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성주인 이안과 다투고 있던 그였는데, 그런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고도 자신들이 처벌을 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카일렌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내 부인’이라고 미아를 불렀다.
한 번도 그녀를 그런 칭호로 불러준 적이 없는 카일렌이었다.
그런데 미아를 보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다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설령 그의 원래 부인이 미아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올리비아는 그런 것을 봐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일단 두 사람만 들게 해주죠.”
애니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카일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아 역시 카일렌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둘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니 일단 성안으로 들인 뒤 처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며칠 미아의 곁에 있었다고, 그새 애니는 미아가 바라는 방식으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애니의 말에 문지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문을 비켜섰다.
카일렌이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올리비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연민의 정 따위를 남겨두었다니.
올리비아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관심받는 것을, 미치도록 싫어했다.
이안과 카일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중간에 두고 대립하는 것이 왜 마음에 안 드는지는 굳이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알만큼 빤했다.
미아가 꼴 보기 싫다, 죽을 만큼 미웠다.
한 사람을 이토록 미워할 수 있는 것은 올리비아에게 결핍된 것이 너무 많은 탓이리라.
❀ ❀ ❀
“당장 의사를 불러라.”
“불렀습니다만, 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말을 태우든, 묶어 끌든 상관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데려와!”
이안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시중은 그의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달려나갔다.
미아는 땀에 젖은 채 밭은 숨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이안은 당장 방을 데우려는 듯 불을 피우곤 침대에 누운 미아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아.”
“…….”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이안 경.”
미아가 겨우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렇게 아끼는 그녀가, 아플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처음으로 이안은 아득하게, 끝도 없이 두려웠다.
정말로 이대로 미아를 잃기라도 할까 봐.
핏기 없는 미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퍼렇게 물든 그녀의 입술이 두려웠다.
“미아, 미아. 눈을 떠.”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미아가 힘을 주어 겨우 추켜올렸다.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배를 움켜쥔 그녀가 무심코 다른 손을 뻗어 이안의 손을 쥐었다.
이안은 그의 손을 꼭 쥐라는 듯 손을 빼지 않고 마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로 미아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나 때문이다.”
이안이 책망하듯 중얼거렸다.
자신이 너무 미아의 생각 없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아이를 가진 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심히 굴었던 때가 있다.
오늘도 그랬다.
단순히 그녀를 잃을까 봐, 그녀가 사라질까 봐.
카일렌이 그녀의 아이를, 그녀를 원하는 마음을 내비쳤을 때 미아가 흔들리기라도 할까 봐.
그 마음이 앞서서, 정작 미아를 챙기지 못했다.
“아니에요.”
미아는 그런 이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안이 그의 탓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안이 나선 것이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았다.
카일렌이 지금 자신을 데려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거기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카일렌의 옆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여, 여기서, 행복…… 읏.”
“말하지 말아라.”
이안은 괜찮다는 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정말 말에라도 묶었는지 추레한 행색을 한 의사가 곧 도착했다.
아이가에 온 뒤로 이안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기에, 필요하다고 생각조차 못 했던 의사였다.
“자, 잠시 보겠습니다.”
의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아의 맥을 쟀다.
아이를 가졌다고 했던가?
아이의 맥이 유난히 약하게 느껴지고, 그녀의 맥은 지나치게 빨랐다.
“혹시 신경 쓰이는 일이 있거나 잠을 못 자거나 한 일이 있나요?”
“놀랄 일이 있었다.”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임신 초기에는 작은 신경증으로도 아이가 위험해지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약을 데워 먹이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좋겠군요. 배도 쓸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 제가 하기에는.”
“내가 하겠다. 방법을 알려주어라.”
그렇게 말한 이안은 주저 없이 침대에 올랐다.
그리고 쓰러지듯 널브러진 미아의 몸을 들어 올려 자신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의사가 보여주는 동작대로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쓸어내렸다.
오한이 도는 듯 닭살이 돋은 그녀의 목덜미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이는요? 아이는 무사한가요?”
미아의 물음에 의사는 머뭇거렸다.
이안은 미아의 귀에 속삭였다.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그러니, 아이보다 너를 생각해라.”
“…….”
“옷을 벗겨야겠다.”
거치적거리는 듯 자신의 셔츠를 그대로 벗어 던진 이안의 주위로 단추들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미처 미아가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이안은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손으로 뜯었다.
드레스의 옷감이 뜯기는 소리가 들며 이안의 가슴팍 위로 미아의 등이 닿았다.
맞닿은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찼다.
이안은 미아를 자신의 품에 가두듯 끌어안고 그녀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더 가까이 붙어라.”
“하, 하지만…….”
“몸이 시체처럼 차잖느냐.”
이안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쥐고 말했다.
의사는 약을 달여오겠다며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미아는 그제야 하는 수 없이 이안의 몸에 자신의 등을 기댔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얼마나 깊게 느끼고 있는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안은 날카로운 말투와 달리 다정한 손길로 미아의 배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아의 마음은 불안함으로 요동쳤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 조금씩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돌봐주고 있다는 따뜻함이,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쓸어주었다.
장이 꼬인 듯 아프던 미아의 복부의 통증이 천천히 가라앉는가 싶더니, 그녀의 숨이 천천히 느려져 원래의 템포를 찾았다.
“좀 나은가?”
“네. 이안 경, 이제 괜찮…….”
이안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느릿하게 속삭였다.
“두 번 다시 아프지 말아.”
“…….”
“내가 상한 것을 가지는 취미가 없다고 말한 것은.”
“…….”
“그대가 상하지 않기를 바라서다.”
그 말을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니.
미아가 놀라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미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가 떼었다.
“따, 땀이 나서 더러운데.”
“괜찮다. 내 것 중에 더러운 것은 없다.”
이미 그녀가 그의 것인 것이 기정사실화된 듯, 그가 낮게 읊조렸다.
미아는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이안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서웠어요.”
“…….”
“납치당했을 때도, 방금도. 너무 무서웠는데 부를 사람이 이안 경밖에 떠오르질 않았어요.”
“…….”
“이안 경의 이름을 부르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그래서.”
“미아.”
“네, 이안 경.”
“이제 나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