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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입술과 입술 사이 (31/95)

31화. 입술과 입술 사이



 

‘이안 경은 바보예요?’

미아가 화를 내듯 큰소리를 치며 물었다.

이안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물음에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그더러 바보냐고 물은 것인가?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그가 아둔하게 군 적이 없기도 했지만, 아무리 아둔하게 굴더라도 감히 그에게 그런 것을 물을 위인은 없었다.

“…….”

질러버렸다.

말을 뱉은 미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답답한 마음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어 그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지만, 막상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했냐고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낯부끄럽지 않은가.

게다가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카일렌이야, 미아의 전 남편이었던 정이라도 있지.

이안은…… 아, 아니지.

어쩌면 이안을 걱정하는 것은 카일렌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큰 명분이 있다.

지금 미아가 아이가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아이가에 살아남은 것도 전부 그의 덕이니.

생명의 은인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니까.

“지금 나더러 바보냐고 물은 것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내 침묵하던 이안이 한참만에 입을 열어 물었다.

방금 막 생각을 정리한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부끄러울 것도,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해석해요?”

“그럼 그대의 말을, 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지금 두 나라는 가까스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어요. 게다가 윌리엄 황제가 이안 경을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이럴 때 이안 경이 괜한 오해라도 받으면…….”

미아는 제가 정리한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이안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지금 내 핑계를 대는 것인가?”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나는 이안 경을 걱정하는 거라고요!”

‘나를 걱정한다고?’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일렌을 걱정하고, 카일렌에 대한 옛정이 남아있어 그를 막아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번에도 카일렌에게 내민 검 앞에 자신이 다치든 말든 상관 쓰지 않으며 뛰어든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그를 걱정한다, 또렷이 말했다.

말로는 모자랐는지, 미아가 쿵쿵 발소리를 올리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서 이안과 이마를 맞댈 듯 가까이 섰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물론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나도 못 물러나요.”

“…….”

이안은 가만히 미아를 응시했다.

그러다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끌어안았다.

얼결에 품으로 안겨든 미아가 당황한 채 버둥거리는 사이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곧 두 입술이 닿았다.

미아의 몸이 굳었다.

입술 새로 머금은 숨과 함께 혀를 미끄러뜨린 이안이 그녀의 입술 안을 헤집었다.

반사적으로 이안의 소매 깃을 찾아 쥔 미아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뜨겁고, 미끈거려.

이런 건, 이런 건 처음이야.

당황할 정도로 유려하고 우아한 그의 움직임에 미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이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그는 한참을 입술을 맞추다 잠시 떼어내고 속삭이듯 물었다.

“제법 당돌해졌군.”

쿵, 쿵.

미아의 귓전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누구의 심장소리인지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의 그녀라면 절대 뱉을 생각조차 못 했을 과감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물들었나 보죠.”

“나에게?”

이안의 물음에 뒤늦게 창피해진 미아가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이안은 새삼 그녀가 이곳에서 그녀의 생각을 얼마나 표현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에서 재회했을 때만 해도, 달브에서 처음 본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텅 빈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있었다.

정말 저대로 죽으려고 했을까.

일기장을 보고 분노했던 것은 고작 그딴 남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포기했던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났던 탓이었다.

그렇게 반짝였으면서, 다 망가진 것처럼 굴면 어떡하라고.

그랬던 그녀가, 다시 반짝이며 그의 앞에 서 있다.

제법 뻔뻔한 말을 내뱉으며, 그의 애정을 시험하고 있다.

이안은 미아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가 떼었다.

사랑스러움에 대한 극찬을 내뱉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그는 표현에 서툰 사람이었다.

미아는 그런 이안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안이 입을 열어 시중을 불렀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며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시중은, 되려 제가 부끄러워져 숨을 곳을 찾고 싶었다.

“나갈 채비를 하라 이르라. 직접 맞이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시중은 후다닥 달려 방을 빠져나갔다.

❀ ❀ ❀

“후우…….”

카일렌의 입술 새로 입김이 샜다.

시린 아이가의 바람이 그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그런 그의 옆얼굴을 향했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그녀를 두고 가겠다는 카일렌을 기껏 설득해 따라왔더니 끌고 온 사병단이 지나치게 소박했다.

이안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위인인데 말이다.

이러다 싸움이라도 붙어, 잘못될까 두려웠다.

“춥지 않습니까?”

카일렌이 올리비아를 향해 다정스레 물었다.

올리비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두른 숄에 고개를 파묻었다.

바트르 황국에 살았던 올리비아에게 추위는 익숙한 부류의 것이었다.

달브 황국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천국인지.

따뜻한 땅에 꽃들은 화사하고 어여쁘게 피어나고.

늘 따사롭고 기분 좋은 햇볕이 몸을 감쌌다.

역시 제게 어울리는 곳은 그런 곳이다.

이런 황량한 땅이 아니라.

다시 한번 카일렌의 마음을 산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한 올리비아가 제 앞에 선 카일렌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댔다.

“황태자 전하는 춥지 않으세요?”

“조금 쌀쌀하지만 괜찮습니다.”

“여기 오신 건 분명 황제 폐하의 명 때문이죠?”

“……그렇죠.”

황제가 미아를 아끼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명을 어길 힘이 카일렌에게는 없으니, 이곳까지 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가 불안한 것은 이따금 카일렌이 미아를 그리워하거나 걱정하는 것만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있어서였다.

워낙 사람이 무른 데가 있으니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하필이면, 이안이랑 얽힐 것이 뭐람.

눈사태라도 맞아서 미아가 죽었다면, 깔끔히 끝났을 텐데.

“성문이 열린다!”

그때, 기사병 중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렌과 올리비아의 시선이 동시에 성문을 향했다.

곧이어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성문 안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미아와 이안이었다.

“……미아.”

미아의 모습을 본 순간 카일렌은 저도 모르게 나직이 미아의 이름을 불렀다.

미아는 며칠 새에 조금 더 야윈 모습을 하고 저기 서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입가가 터져 있는 것을 본 카일렌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마 때리기라도 한 것인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달브 황국의 위대하신 황태자께서.”

이안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이안에게 그러지 말라는 듯 눈치를 주었으나, 곧 자신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카일렌의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정말로 자신을 데리러 온 줄 알았는데.

뒤늦게 후회를 한 것인가 싶었는데.

그런 일말의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은 올리비아를 보자 마음이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올리비아와 미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올리비아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견제하듯 카일렌의 곁으로 다가와 카일렌의 손을 찾아 쥐었다.

“미아 비잘린 양을 데리러 왔습니다.”

카일렌은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이안의 미간이 곧장 좁혀들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그 성으로 미아를 부를 줄이야.

힐긋 본 미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까 그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심을 보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었다.

“…….”

그건 모두, 저 여자 때문이겠지.

이안의 시선이 잠시 올리비아에게 머물렀다.

올리비아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잘생겼구나, 훤칠하니. 냉혹하게 생긴 외모와 다부진 어깨.

그런 것들이 올리비아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때도 있었다.

올리비아는 오랜만에 보니 더욱 잘생겨진 것만 같은 이안의 모습에 숨죽여 감탄했다.

“잘못 찾아온 듯하군.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는데.”

“미아. 나와 돌아갑시다.”

이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일렌은 이어 말했다.

미아는 그런 카일렌의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카일렌이 처음으로 제대로 저와 눈을 맞췄다.

카일렌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 미아는 카일렌을 믿을 수 없었다.

마음이 변했다.

한 번 변한 마음은 원래의 형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아니, 변했다고도 말할 수 없으려나.

카일렌은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

“카일렌 전하.”

미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천천히 카일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어째서죠? 여기는 달브와 다릅니다. 달브에는 그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

‘알고 있어요. 알고 있고, 그리워요.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고 싶은 날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누가 반길까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버림받은 여자인데.’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미아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이안이었다.

“재밌군. 그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다니.”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황태자비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가 아니라면 누가 그녀를 반길까.”

이안은 카일렌의 말을 끊어냈다.

카일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제 품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겨 미아의 옆에 섰다.

혹여나 또다시 충돌할까 두려워진 미아가 이안의 옷깃을 잡았다.

이안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마치 애정이 담긴 듯, 맞닿는 손에 카일렌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검을 거두세요.”

미아가 카일렌에게 말했다.

카일렌은 그런 미아를 보고 입을 열었다.

“혹시 맞았습니까?”

“네?”

“얼굴에 맞은 상처가 있습니다.”

“아아, 이건 이안 경이 한 게 아니에요! 우연히 납치되어서.”

“납치?”

아, 잘못 말했다.

미아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카일렌은 이안을 경멸할 대로 경멸하게 되었다.

미아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하더니, 그녀가 납치되도록 내버려 두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그게. 우연히 시장에 나갔다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설명해주시죠, 이안 경.”

카일렌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삐딱한 자세로 카일렌을 응시했다.

확실히, 미아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은 이안의 패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안을 탓할 수 있나?

카일렌이?

미아를 차가운 눈발 속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미아 양은 나와 혼인할 것입니다. 그 외엔 할 말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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