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같은 말, 다른 뜻
“고마워요.”
미아는 시중에게 고맙다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는 티테이블로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쓰려니 불편해서 그녀는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자리 잡았다.
“쓰읍, 후우.”
더 미룰 수 없었다.
편지의 기본은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
미아는 크게 심호흡 한 번을 하고 펜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친애하는 이안 경에게’
그래.
제일 무난한 호칭으로 가자.
설마 이 말에 함의까지 생각하며 읽지는 않겠지.
대개의 편지들이 이렇게 시작하니까 말이야.
‘이안 경. 오늘은 날이 맑네요.
시린 겨울 하늘과 밝은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 펜을 들어 편지를 씁니다.
이안 경은 지금쯤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계실까요?’
편지를 쓰는 미아의 손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하니 처음 했던 고민도 사라지고 술술 내용이 채워졌다.
평소처럼 무심코 ‘사랑을 담아, 미아가’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한 그녀가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돌돌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끈을 이용하여 편지지를 동여맸다.
“이걸, 이안 경에게 가져다주세요.”
미아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은 시중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시중도 마침 음식과 물건들을 꼭대기 층까지 들고 오르내리느라 지겹고 힘든 참이었다.
부디 이 편지가 그녀의 마음을 잘 전달해 이안 경의 노여움을 풀기를.
집 안의 모든 시중이 바라고 있었다.
근래 묘하게 유해졌던 이안의 모습 때문이었다.
시중이 눈에 거슬리는 잘못을 해도 화내는 법이 없었고, 늦었다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게 누구 덕인지 알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 ❀ ❀
이안은 편지지를 내려두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는 바람에 벌써 편지지의 끄트머리가 그의 손가락 모양을 따라 조금 구겨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낯 뜨거운 말들을 뱉은 걸까, 미아는.
이안은 얼핏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숨기려 손을 들었다.
마치 누가 그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이안 경의 깎아내린 듯한 턱이나, 아름다운 불꽃을 닮은 눈을 볼 때면 가끔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는 이안 경을 나를 살린 따뜻한 불꽃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런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않고, 이안 경에게 거리를 두며 대한 것을 사과합니다.’
사실 미아는 이 문구를 쓸 때 마지막 문장만을 염두에 두었다.
다른 문장들은 그저 평소에 생각조차, 글을 쓰듯 했던 그녀의 습관이 반영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류의 편지나 표현을 처음 듣고 본 이안에게 그것이 같은 무게로 다가올 리 없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여자군.”
이안은 편지지를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서재를 서성이듯 걷던 그가 결심한 듯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가시려나 보다!’
미아가 이안에게 손수 편지를 썼다는 소식은 벌써 온 성안에 퍼졌다.
그 편지가 이안의 마음을 녹였을지가 시중들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두근, 두근.
누구보다도 이안의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는 애니의 심장이 뛰었다.
애니가 몸을 숨긴 복도를 지나친 이안이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이안은 상기된 제 뺨을 식히기 위해 잠시 허공을 본 채 서 있었다.
미아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조금 부끄러운 탓이다.
똑똑.
이안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난 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발소리만 들어도 이안의 존재를 눈치챘으면서, 이럴 때만 둔했다.
“네.”
이렇게 빨리, 직접 찾아올 것이란 생각을 못 한 탓에 미아는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시중 중 하나가 자신을 찾았다 생각하며.
“전해드렸나요? 좋아하셨어요?”
“무척 좋아하더군.”
쿵.
미아는 예상치 못한 이안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문고리를 손에 쥐고서, 평소처럼 흰색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서재에 있었던 듯 은은한 종이 냄새가 나는 그가, 며칠 만에 보는 그가.
마지막 얼굴이 이제껏 본 적 없이 서글픈 얼굴이었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미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이안 경!”
“얼마나 답답했으면, 직접 편지를 다 썼을까. 감히.”
“혹, 혹시 그 시중을 혼낸 것은 아니죠? 제가 구해다 달라고 한 것뿐이니 절대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 여자는.
이안은 제 마음도 모르고 대뜸 시중 걱정부터 하는 미아에 속이 상했다.
그러나 이건 미아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동요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이안이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편지부터 썼나?”
“…….”
‘마음에 안 들었나?’
미아는 예상과 다른 이안의 반응에 당황했다.
편지를 너무 손이 가는 대로 막무가내로 썼나.
주르륵 흐르는 글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쓰는 버릇이 남은 탓인지, 유난히 유려한 그녀의 편지를 다들 좋아했었다.
그러니까 덜컥, 이안도 자신의 편지를 좋아하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떡하지?
그가 그녀의 편지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단순히 그녀가 그에게 아첨하려, 꼭대기 층에서 빠져나오려 이런 행동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녀에게는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정말 그런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을 전하려고.”
“마음?”
“네.”
“그럼 그 편지에 적힌 말들이 다 진심이란 말인가?”
“진심이죠! 물론, 여기 있는 게 답답했던 건 사실이에요. 조금이라도 이안 경의 노한 마음을 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지만, 그래서 편지를 썼다고 해도, 단순히 이안 경의 마음을 얻고자 거짓된 말들을 적지는 않았어요.”
미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적어도 이안이 자신을 믿게 하고 싶었으니까.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여주면 반드시 배신당한다고 믿는 그의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
이안은 말이 없어졌다.
미아는 그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들었다.
사실 그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친애하는’이라는 수식어는 그렇다 쳐도, ‘사랑을 담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정말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가진 문학적 특징 같은 것인가?
평소에도 책이라고는 역사서나 병법서밖에 보지 않은 그라서, 그녀의 유려한 표현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저, 이안 경. 무슨 말이라도…….”
“그럼 증명해보지.”
“증명이요?”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를 그의 앞으로 끌어왔다.
그러곤 그녀와 눈을 맞춘 채 고개를 가까이 했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증명이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정말 편지에 썼듯, 나에 대한 마음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편지?
아, 편지에 고맙다고 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달브 황국에서는 감사한 마음을 전할 때 손등 위에 입을 맞추는 관습이 있었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지.
미아가 싱긋 웃었다.
드디어, 이안에게 자신의 마음을 증명할 방법이 생겼다.
“이안 경.”
“응?”
“감사해요.”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 이안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미아가 이안의 손을 끌어,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
가벼운 입술의 무게, 그 감촉.
존경과 사랑을 담은 맹세의 입맞춤.
미아는 그 뜻을 알고 이안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춘 것일까.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던 그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제 손등 위에 입술을 묻은 미아의 머리를 내려보았다.
“이제 제 마음, 믿어주시는 거죠?”
입술을 떼어낸 미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당황했다.
정말이었나.
사랑한다는 그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대체 왜? 언제부터? 어째서?
“…….”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부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허락 없는 행동에 화라도 난 것일까?
아니면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차는 걸까.
하지만 이 이상을 보여주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
아니, 이른가?
이르다는 건 이 이상을 보여주겠다는 말인데, 왜 자신이 그 너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미아 또한 자신의 행동과 어긋나는 생각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한 건가?”
“믿음을 원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알겠다.”
그렇다면, 거기에 화답해야겠지.
그렇게 말한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른 그녀가 당황해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자 그가 낮게 웃었다.
“이제 제법 잘 안겨 오는군.”
“그, 그게 아니라 갑자기 왜.”
“사랑의 맹세를 한 이를 이런 방에 남겨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사, 사랑의 맹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미처 이해할 틈도 없이 이안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이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오해의 기운은, 해소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증명된 탓이다.
몇 층을 연거푸 내려왔는데도 힘든 기색이 하나도 없는 그가 곧장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저벅, 저벅.
망설임 없는 걸음이 이안의 침대로 향했다.
미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이안을 올려보았다.
어디서부터 미묘하게 대화의 톤이 어긋났는데 그게 언제부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미아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흘러내린 이안의 머리칼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저…… 이안 경.”
미아는 묻고 싶었다.
왜 자신이 고마운 마음을 증명하자마자, 그가 ‘사랑의 맹세’를 언급했는지.
왜 자신을 끌어안은 채 곧장 그의 침실로 들어왔는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 미묘한 기류는 무엇인지.
“나는 그대처럼 글솜씨도, 말재주도 없다.”
“…….”
이안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 있는 듯이.
그의 옅은 숨결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을 때, 그녀는 어쩌면 그도 그녀처럼 지금 긴장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단언하지. 그대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
“…….”
“두 번 다시 그대가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게 하겠어, 미아.”
그러니까, 이번엔 그가 진심을 말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