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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동상이몽 (28/95)

28화. 동상이몽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물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나 묻고 싶었다.

어느 황국이든, 황후 자리만 차지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충동적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그녀에게 계속 다정하게 굴어주었다는 게 좋았다.

이안에게서는 볼 수 없던 다정함이었으니까.

올리비아는 그랬다.

“저, 황태자 전하.”

“…….”

하지만 달브 황국으로 온 뒤로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모두 그놈의 미아, 미아, 미아 때문이었다.

미아의 이름을 부르며 너무 안타깝다 눈물 흘리는 시중이나, ‘불여우 같은 것이 우리 착한 황태자님을 홀렸네’ 하는 시중들을 보면 올리비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내리치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제 탓인가?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 탓이라면 또 모를까.

그 흔해 빠진, 매력이라고는 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다들 난리란 말인가.

“전하?”

“아, 불렀습니까.”

카일렌은 그제야 창가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

올리비아는 반나체 상태로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카일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그의 손 위에 그녀의 손을 포갰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올 겨울은 유난히 춥군요.”

“그래요? 그래도 달브 황국은 바트르 황국에 비하면 몹시 따뜻한 편이에요. 거기선 겨울마다 털옷을 꺼내 입어야 해요.”

“그렇겠죠.”

실수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정말로 겨울이 추워서가 아니었다.

추운 겨울, 혼자 아이가에 버려진 미아를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올리비아는 심술이 나 비틀리는 입매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이가에서 무사히 황국으로 돌아왔으면 어서 황위를 물려받을 생각이나 할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물러 터졌기로서니, 자신을 욕하고 비난하는 이들을 모두 용인해준단 말인가.

자애로운 황태자비를 버리고 돌아와 적국의 황후를 새 아내로 들인 남자, 아니.

들이겠다는 남자.

그 남자에 대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올리비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의 위치를 확인받지 못한다면, 약속한 대로 그의 정식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어쩌다 미아가 이안의 아이를 갖게 됐는지는 몰라도.

만약 정말 미아가 이안의 아이를 가지기라도 했다면, 그건 이안과 미아의 관계가 카일렌과 그녀의 관계만큼이나 오래됐다는 것을 뜻했다.

적어도 그런 소문이라도 퍼뜨리란 말이야.

모두가 아름다운 황태자비, 순진 무결한 황태자비로 추앙하는 미아의 명예를 실추시켜서라도 카일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를 바랐다.

“전하.”

“네, 듣고 있습니다.”

“저희도 아이를 갖는 게 어떨까요.”

카일렌의 몸이 긴장과 당황으로 굳는 것이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그런 카일렌을 달래려는 듯 포개어 두었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그제야 손을 뻗어 올리비아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다. 미아와는 다르다.

미아는 그가 아무리 무심하게 굴어도, 무력한 모습을 보여도 그를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늘 무겁고 힘겨웠다.

그녀를 보는 것이 숨이 막혔다.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게 쉬울 수 있었을까.

그조차 대하기 어려운 어머니의 마음을 마른 가지에 쌓인 눈을 녹이듯 따뜻하게 녹여낸 그녀는, 시중들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더욱 올리비아에게 끌렸다.

올리비아는 제 욕망에 충실하고 솔직한 여자였다.

그의 열등감 어린 마음을 눈치채주었고, 그에게 원하는 것을 서슴없이 얘기했다.

그녀와 있으면 그가 미아와 있을 때 느꼈던, 그가 못난 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은 사라졌다.

그래서 카일렌은 자신에게 맞는 여자는 올리비아라고 생각했다.

그랬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어째서 미아가 이렇게 눈에 밟히는 것인지.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해 시체라도 찾겠다며 그 눈발을 헤친 그녀가.

적국의 폐위된 폭군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는 게 왜 그리 고통스러웠던 것인지.

“올리비아.”

“네.”

“……아직 아이를 갖기엔 조금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이들이 많아요. 시중들이 저를 얼마나 무시하는 줄 아세요?”

카일렌이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줄은 몰랐던 올리비아가 애써 당황함을 감췄다.

그리고 양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려 서글픈 인상을 지어 보였다.

“그런 시중이 있다면 내가 잘 다그치도록 하겠습니다.”

“다그쳐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대체 황후 폐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서신을 아이가로 보낸 거죠?”

올리비아도 알고 있었다.

미아를 되찾겠답시고, 무력으로라도 동원하겠다 선포한 황제와 황후를.

“……전에 미아를 많이 아끼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무력으로라도 데리고 오시겠다니요. 전쟁이 겨우 끝났는데요.”

“…….”

카일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그렇게라도 미아를 데리고 오고 싶은 건가?

올리비아는 당황했다.

이럴 땐, 하는 수 없이.

“흑, 그럼 전 결국 죽겠군요.”

올리비아의 말에 깜짝 놀란 카일렌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죽는다니,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입니까.”

“아시잖아요. 제가 그 폭군 옆에서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냈는지. 황궁에서 저를 꺼내주셨을 때 약속했잖아요. 평생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게 해주겠다고.”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지만 전 불안해요.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는 기분이에요. 외톨이가 된 것 같다고요, 흐읍!”

결국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올리비아에 카일렌이 쩔쩔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랐다가 다시 자리를 찾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무른 상대는 이래서 다루기가 쉽다.

이안은 무슨 짓을 해도 그녀에게 넘어오지 않아 힘들었는데, 카일렌은 다르다.

그러니까 미아를 감싸는 이안의 모습에 잠깐 질투가 났다고 해도.

그녀에겐 한 번도 그래 준 적 없던 남자가, 그녀보다 못나고 평범한 여자를 감싸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해도.

황후가 될 수 있다면, 그거면 됐다.

이 멍청하고 순진한, 아름답고 온건한 남자를 내가 잘 키워서 반드시 황제로 만들어 보이겠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로.

“내가 있으니, 그대는 여기서 외톨이가 아닙니다.”

“약속해주세요. 황후 폐하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주시겠다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무슨 생각요?”

그럼 그렇지. 넌 내 편이지.

올리비아가 눈물을 닦아내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아이가로.”

❀ ❀ ❀

찬 바람이 들어와 손끝이 시리더라도 창문은 열어두는 편이 나았다.

어느 이야기 속에서 성안 꼭대기 다락에 갇힌 여자는 드레스를 엮어 기다란 줄을 만들었고 그 줄을 타고 다락에서 탈출하였는데.

미아가 가진 드레스는 고작 지금 입고 있는 벌 한 벌이었다..

애니가 아닌 시중은 매번 새 옷을 가져다주고 그녀가 입었던 옷을 곧장 걷어가 버렸다.

마치 도망칠 여지를 아주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식사와 간식, 차는 매시간마다 정확히 그녀가 있는 방으로 준비되었다.

그녀가 먹든 먹지 않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중이 그것을 치우러 들어왔다.

문밖을 누군가 지키는 건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나 싶었지만.

그라면 가능했다.

이안이라면.

“보이지도 않네.”

미아가 있는 방의 창문은 아래를 향해 나지 않고, 위를 향해 나 있었다.

그 덕분에 창밖을 볼 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전부였다.

종일 그곳에 앉아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만 보고 있노라면, 한량도 이런 한량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자신을 가두어두고 마음이 상한 듯 발길 한 번 하지 않는 이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언제까지 가둬둘 작정인지, 가끔 제 생각을 하긴 하는지.

“……물을 수만 있다면 묻고 싶다, 정말. 하아.”

미아의 한숨만 깊어질 따름이었다.

가끔은 문에 대고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였다.

이안의 발걸음 소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좀 더 여유 있고 느긋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 소리만으로 그를 타인들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이쪽으로 걸음을 끌지 않았다.

이따금 시중들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동안 잘 지내시더니 왜 그러신대?”

“글쎄……. 근데 원래 그런 분이셨잖아.”

“쉿, 조용히. 들으시겠다.”

이미 다 들려요.

물론 내가 체면을 다 잊은 채로 쪼그려 앉아 문에다 귀를 바짝 대고 있기 때문이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삼십 일 같은 사흘을 보내고 나서, 미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 상태 이대로, 이안과 멀어진 채 시간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것, 침묵으로 인해 상처를 주었다는 것.

적어도 그 두 가지는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지금 그녀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모두 그의 덕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때 그 설원에서.

가만히 두고 지나갔다면 절망 속에서 반드시 죽었을 그 눈더미 속에서.

그녀를 구한 것은 이안이었다.

“저어.”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낸 미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 바깥에 서 있던 시중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부르셨어요?”

복도는 조용했다.

그녀의 방을 드나드는 시중들은 그녀와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쩌다 미아가 무언가를 물어도 그냥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마 이안이 무슨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테지.

“종이와 펜을 구할 수 있을까?”

“아, 그건…….”

“내가 책임질게요. 이안 경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직접 전하긴 무서울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찔린 듯 시중이 움찔했다.

미아는 시중에게 괜찮다는 듯 환히 웃어 보였다.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던 시중이 알겠다는 듯 문을 닫았다.

미아는 멀리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편지에 담을 내용을 생각했다.

무슨 말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정석대로라면, ‘친애하는 이안 경에게’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만.

이안 경에게 ‘친애하는’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수식어도 없이 그냥 ‘이안 경에게’라고 쓴다면, 그건 너무 딱딱하잖아.

그동안 쓴 편지들은 시작을 어떻게 했더라?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께는 ‘태양 같으신’이나, ‘따뜻한 봄바람과 같은’ 등의 수식어를 사용했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그럼 대체 이안에게는 무슨 칭호를 붙여야 하지?

고작 첫 줄을 쓰기조차 이렇게 어렵다니.

“여기요.”

그녀가 한참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펜과 종이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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