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꽃길이 아니라도
너무 가까이 지내서 잊어버렸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통 사람이라면 살려두고 벌을 주었을 테지만, 그는 애초에 그런 선택지는 고려조차 안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런 모습을 지금껏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그의 본질이라면 어떡하지?
정말로.
정말로 그가 희대의 폭군이라면.
미아는 아득해졌다.
❀ ❀ ❀
“미아님!”
성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쓰러지다시피 몸이 기운 미아를 일으킨 것은 애니였다.
이안은 애니에게 그녀를 씻긴 뒤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잃었던 정신이 든 미아는 이안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안은 멍하니 선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그녀가 본 풍경에 넋이 나갔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니는 미아를 부축해 곧장 욕실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몸을 씻겨주던 애니가 멍한 미아에게 물었다.
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몸 곳곳에 난 생채기를 확인하던 애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하셨기에, 아까까지만 해도 장을 보러 나간다며 신이 났던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안의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을 보아, 분명 큰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애니.”
“네?”
“너는 이 성에 얼마나 오래 있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애니는 성실히 답하기로 했다.
망가져 돌아온 그녀의 주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녀는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수 있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여기서 지냈어요. 아주 어렸을 때 성 앞에 누가 두고 갔다고 해요. 아마 가정 형편이 어려워 키울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아…….”
“무엇이 궁금해서 그러세요?”
괜한 것을 물은 듯 미안해진 미아가 입을 다물자, 애니가 괜찮다는 듯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눈을 맞췄다.
미아는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안 경이 오고 나서 성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
“달라졌죠. 모두 두려워하니까요. 실제로 쫓겨난 분들도 꽤 있었어요.”
“쫓겨나?”
“네. 아무래도…… 뜻하지 않게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셨잖아요. 시중들 중에 다른 귀족에게 의뢰를 받아 나쁜 짓을 벌이려는 이들이 꽤 있었나 봐요.”
나쁜 짓이라면 설마 그를 죽이려 한 것인가?
그래서 쫓아냈고?
하지만 쫓아낸 것 정도는 그에게는 준수한 벌이었겠지.
역사서에 따르면 폐위된 폭군들은 대부분 극악무도한 벌을 받고 죽었다.
“몸에 소름이 돋으셨어요, 추우세요?”
“어? 아니야. 괜찮아.”
애니는 미아의 얼굴을 살폈다.
이안이 걱정돼서 그러나? 아니면, 그들이 자신마저 해칠까 두려워졌나.
걱정하는 시선을 느낀 미아가 괜찮다는 듯 옅게 웃어 보였다.
“……이제 옷 입을게요.”
애니는 미아의 몸 위에 옷을 입혀주었다.
오늘은 특별히 더욱 따뜻하게 신경을 썼다.
행여 미아가 감기에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고마워, 애니. 날 도와줘서.”
“제가 하는 일인걸요. 오히려, 제가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미아의 마음은 수선스러웠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오늘 자신이 본 풍경이 떠올랐다.
이안이 한 일은 분명 끔찍한 일이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을 당했든 그랬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다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이안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망설임 없이 베어낸 것일까.
그 정도로 화가 난 것일까.
아니, 화가 난 것은 맞을까?
‘전쟁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괴로운 일이에요.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카일렌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카일렌을 향해 조롱과 비난을 일삼던 형제들이 떠올랐다.
적어도 전쟁은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번엔…….
‘말했잖아. 난 내 것에 손대는 사람을 몹시 싫어한다고.’
단순히 미아에게 손을 대서 화가 난 것일까.
미아를 상하게 하였기 때문에?
상한 것을 갖는 취미가 없는데, 기껏 미아를 멀쩡히 만들어뒀더니 그 노력을 배반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할 새도 없이, 애니는 미아를 친절히 이안의 방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미아는 혼자 들어가겠다며 애니를 먼저 돌려보냈다.
‘이제, 내가 무섭나.’
이안은 그렇게 물었다.
이안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비로소 미아는 그가 두려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찾아 뛰어온 것을 생각하면, 그녀를 놓쳤을 때 지은 얼굴을 떠올리면.
그를 감싸고 싶었다.
그가 무슨 잘못을 했든, 어떤 사람이었든.
정말로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죽였던 폭군이든.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한참을 복도를 돌아다니던 미아가 겨우 결심한 뒤 문 앞에 섰다.
이미 애니는 할 일을 마치고 모습을 감춘 뒤였다.
오늘 안으로 끝낼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
“……들어오지 않고 뭐 하는 거지?”
몸을 씻고 제대로 닦지 않은 듯 머리칼에 아직 물기가 묻어있는 이안이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그의 눈을 마주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티 테이블 위에는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유와 꿀도 옆에 놓여있는 것을 보아 미아를 의식한 차림 같았다.
이안은 왜 미아를 그의 침실로 다시 불러들였을까.
미아는 조심스럽게 벽난로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미아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책을 들어 올렸다.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이안은 미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그렇게 대하리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저, 이안 경.”
긴 적막 끝, 미아가 입을 열었다.
이안은 책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고개만 슬쩍 끄덕였다.
마치 그녀와 눈을 맞추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두려워 보이는 것은 그였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위험에서 구해줬으니,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남자에 대한 처분이 과하다고 생각해서였겠지.
“아까는…….”
“탓할 것이냐?”
이안의 물음이 미아의 말을 끊었다.
미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탓이라뇨?”
“그 남자의 손을 벤 것을 두고.”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려 했어요.”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은 테이블 어딘가로 비스듬히 둔 채였다.
그녀도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은 우유를 바라보았다.
“잘도 두려움과 책망을 감추고 고맙단 말을 하는군.”
이안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미 그녀가 그를 탓하고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가시가 잔뜩 돋쳐있는 말임을 알면서도, 미아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 말을 움켜쥐었다.
“두려워해야 하나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이상한가요?”
“그래, 이상해. 그대는 이상했어, 처음부터. 마음이 변한 정인을 죽이지 못하고 혼자 돌아가는 모습부터, 여기 살아남아 쓸모를 증명해 보이겠다 이상한 짓을 벌이는 것도.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로 눈을 빛내는 것도.”
“…….”
흘깃. 미아가 눈을 들어 이안을 보았다.
이안도 그제야 미아와 눈을 맞췄다.
그게 이상한가, 하긴 미련해 보일 수도 있겠지.
카일렌을 죽이지 못한 건, 죽일 만큼 밉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그녀보다 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차마 돌아갈 용기를 내지 못한 것도 이 상태로 돌아가면 슬퍼하고 분노할 가족들이 눈에 밟혀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그녀 자신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였다.
버림받은 황태자비.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손가락질할 테니까.
생각해보니, 그녀와 그는 닮아있었다.
돌아가지 못할 곳에서 버려졌다는 것, 그리고 이 추운 땅에서 의지할 이 하나 없다는 것.
이안은 몸을 숙여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스푼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꿀을 차에 조금 넣어 젓기 시작했다.
“두려워하지 않는단 거짓말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야.”
“……그럼요?”
“오히려 다행이지. 두려워하여, 그대가 도망갈 마음을 단념했다면.”
이안은 일부러 차갑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뒤늦게 읽은 미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래, 이안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가 그가 좋은 사람일 거라 믿고 있는 믿음을 잃는 것, 그의 손으로 직접 그 믿음을 깨트리는 것.
“처음부터 도망갈 마음은 없었어요.”
미아는 단호히 말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미아는 정말 그에게서 벗어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래서, 네가 어느 날 반드시 나를 떠날 것만 같아’
이안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눈을 맞췄다.
“감사하다는 말은 거두도록 하지. 내 것을 중간에 잃어버렸던 내 탓이니까.”
“…….”
“너는 내게서 못 벗어나, 미아.”
“…….”
미아도 알았다.
그녀가 그와 깊숙이 얽혔다는 것을.
단순히 아이가의 성 말고는 갈 곳이 없어서도 아니고, 버림받은 황태자비라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가 그녀를 구해줬기 때문에, 그녀를 몇 번이고 구했기 때문에.
그가 그녀가 행여라도 떠날까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일부러 날카로운 말들을 차갑게 내뱉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다정히 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아니, 아무도 그에게 다정히 굴어주지 않아서.
그러니까, 그가 이런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사랑을 받고 자란 그녀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짙은 고독과 슬픔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걸 생각하면, 아득하고 두려웠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공언할 수조차 없었지만.
미아는 이상하게,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말하는 것조차 가련해 보였다.
마치 그가 스스로에게 뱉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 느껴져서.
“오늘 밤 악몽을 꾸더라도, 설령 당신이 타인의 죽음을 내 옆에서 수십 번 보게 되더라도.”
“…….”
“같이 걸어갈 길이 가시밭길이라 미안하군.”
이안은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지어 보인 미소 중 가장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안이 몸을 움찔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찻잔을 들어 내밀었다.
차가 달면서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