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납치
“뭐, 뭐 하시려고…….”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안은 양쪽 손의 장갑을 모두 벗어 쥔 채 미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이안이 천천히 모자에 달린 끈을 손에 쥐었다.
미아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곳의 공기만 조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지는 순간, 그가 능숙히 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기 시작했다.
이안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미아는 그와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미아가 하는 수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이런 것으로도 뺨이 붉어지는군.”
“…….”
“옷을 벗기는 것보다, 무언가를 입혀주는 것에 더욱 흥분하는가?”
미아는 이안의 말에 경악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잘도 이런 말을 뱉어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유감이군. 나는 벗기는 것이 더 재밌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이안의 어깨를 손으로 쥐어 밀어냈다.
이안은 더 놀릴 생각은 없는 듯,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모자의 값을 치렀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는데, 그가 자신이 차고 왔던 모자를 상인에게 건네는 것이 보였다.
“그건 왜요?”
“버리라고.”
“나름 새것이나 다름없어 곱고 깨끗한데…….”
“네가 하던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도요. 어울리지 않았어요?”
“옷은 새 옷을 입고 모자를 빌려 쓰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새것을 사줄 정도로 모습이 이상했나?
미아는 제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어 이안은 되려 답답했다.
“……참으로 검소한 황태자비군.”
“이제 황태자비도 아닌걸요, 뭐.”
허심탄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아는 제가 내뱉고도 제가 한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황태자비가 아니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크나큰 발전이었다.
카일렌이 그녀를 배반했다는 것과는 또 다른 단계였다.
“폐위된 폭군이라, 이 정도는 못 해줄 것 같은가?”
하지만 이안은 그 말의 뜻을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미아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안 경.”
“황제가 아니라 유감이군.”
이안은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카일렌은 황제가 될 수 있으나, 자신은 황제에서 내려왔다 이건가?
그런 뜻이 아닌데.
그렇게 오해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너무 속상한데.
“이안 경! 그런 뜻이 아니라…….”
그때였다.
멀리서 달그락거리며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안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던 미아의 허리를 순식간에 누군가 낚아채듯 쥐었다.
그리고 그녀를 그대로 안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미아!”
이안의 외침이 들렸다.
미아의 기다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말의 등에 바짝 붙은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붙잡은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인상이 험악한 남자였다.
“보아하니, 귀족 영애가 나들이라도 나왔나 보지?”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미아가 고개를 빼 뒤를 돌아보았다.
시장을 빠르게 빠져나와 외진 숲길로 들어서는 말의 속도는,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안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이안 경…….”
바보같이, 이런 순간에 말할 수 있는 게 고작 그의 이름이라니.
미아는 남자의 억척스러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몸을 틀었다.
하지만, 남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말은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말에서 떨어진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아이가 위험했다.
하는 수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같이 좀 먹고 살자고, 가진 거 있으면 꺼낼 준비해.”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가진 게 없긴.”
남자가 헤벌쭉 웃었다.
“입고 있는 옷이라도 벗어.”
남자의 말에 당황한 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옷을 벗으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대로 들었잖아. 입고 있는 옷들도 값비싸 보이는데. 뭐, 직접 벗겨주기라도 하라는 건가.”
“뭐 하는 짓이에요.”
남자가 손을 뻗어 미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말이 잠시 속도를 줄인 사이, 용기를 내 뛰어내렸다.
미아가 내리는 것을 본 남자는 말을 서둘러 멈췄다.
바닥으로 넘어진 미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이, 남자는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구라도 있다면 도움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애타는 그녀의 시야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도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말이 달려온 방향으로 무작정 뛰다 보면 이안이 나올 것 같았으나, 이 남자를 뿌리치고 달려갈 수 있을까?
남자의 덩치는 미아의 두 배만 했다.
“하지 마세요!”
미아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몸을 밀쳐냈다.
남자는 미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미아의 저항이 외려 그를 자극한 것 같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녀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공포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조여왔다.
미아는 헐떡이기 시작했다.
숨이 찼다.
이렇게 당하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남자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향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해야 해,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이안은 말했다.
그녀를 위해서 넘어지지 말라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오직 그녀를 위해서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결심이 선 미아가 남자의 손목을 깨물었다.
“아아악!”
남자의 잇새로 신음이 샜다.
분노로 새빨개진 얼굴을 한 남자가 손을 들어 미아의 뺨을 내리쳤다.
얼굴이 돌아가며, 귀가 멍멍해졌다.
미아는 믿을 수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 중 어느 것 하나 믿기는 일이 없었다.
태어나서 누구에게 얼굴을 맞아본 적이라고는 없는 미아였다.
“아, 재수 없게. 가진 거 얌전히 내놓으면 돌려보내 주려고 했더니. 너 안 되겠다.”
“……내가 가진 게 설령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 줘야 할 이유는 없어요. 얼른 비켜요!”
겨우 정신을 차린 미아가 말을 받아쳤다.
그리고 몸을 틀어 바닥에 엎드린 채 기어서라도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남자가 미아의 발목을 쥐었다.
“어디 갈 수 있으면 가봐.”
미아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발목을 빼어내려 발버둥 쳤다.
남자는 그럴수록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질질 바닥에 끌린 턱이며 손바닥이 쓰라렸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가 신경 쓰였다.
아이가 다치는 것만은 피하고자, 미아는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땅을 짚었다.
어떻게든 가야만 해, 이안이 있는 곳으로.
아니, 누구라도 있는 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해.
남편이 죽은 줄 알았을 때도, 그래서 시체를 찾으러 왔을 때도.
죽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도를 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도, 미아가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다고 깨달았을 때도.
쏟아지는 눈에 눈앞이 하얘지고, 이제 곧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어졌을 때도.
미아는 살았다.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은 목숨인데, 고작 이런 한심한 남자 하나 때문에 죽을 수는 없었다.
‘이안, 이안…….’
미아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고는 그의 이름이 전부라고 해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살아내야만 했다.
“……미아.”
그때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 같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까지 차게 얼릴 것만 같은 목소리가.
미아가 엉망이 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벌써 찾았나?”
달려온 듯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숨을 색색 내뱉는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숙여 그늘이 진 이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입매가 완고하게 굳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끝까지 놓아주지 않던 미아의 발목을 그제야 놓은 남자가 이안에게 다가섰다.
남자는 빙글빙글 웃었다.
마치 이안이 자신에게 직접 와준 것이 고마운 듯이.
“귀족 나으리까지 여기 와주셨네? 여자랑 재미 좀 보려고 했는데.”
“…….”
“뭐, 상관없나. 나는 돈만 뜯어내면 되거든. 아까 보니 꽤나 가지고 나온 것 같던데, 어디 보여줄 수 있나?”
남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보였다.
이안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칼날에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미아였다.
아까와는 다른 공포감이 미아의 몸을 짓눌렀다.
이러다간, 이안까지 다치는 게 아닐까?
괜히 씨앗을 사러 오자고 해서, 괜히 저 사내에게 끌려가서.
이안의 안위마저 위험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반가울까.
이렇게 무서운 순간에, 이렇게 위험한 순간에.
이안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 걸까.
미아는 그런 그녀 스스로가 구질구질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미아.”
“…….”
이안은 다시 한번 미아를 불렀다.
미아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그제야 아래로 떨어졌다.
“어이, 내 말 안 들려? 가진 것 좀 보여달라니까.”
남자는 위협적으로 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언제라도 찌를 듯 칼을 자유자재로 흔들던 남자가 이안에게 가까이 붙어서던 그때였다.
투욱.
남자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문자 그대로 반듯하게 잘려, 아래로 굴렀다.
검 끝에 맺힌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녀의 그림자도 밟지 마.”
“…….”
“쓰레기 주제에.”
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본 풍경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남자의 손을 그냥 그대로 베여버린 건가?
이안이 손에 들린 저 검으로 남자의 손을, 그냥 잘라버린 거야?
“…….”
“……눈을 감으란 말을 하지 못했군.”
“……이, 이안 경. 이안, 경.”
이안이 손을 들어 제 뺨에 튄 핏방울을 가죽 장갑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장갑을 벗어 땅에 던져버리곤 걸음을 옮겨 미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그것도 손이 잘려서.
“말했잖아. 난 내 것에 손대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고.”
“…….”
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뱀이 입을 타고 목구멍으로 들어와 콱 막아버린 것처럼, 틀어막혀서 숨도 겨우 내쉬었다.
가슴이 가파르게 치고 오르는 그녀를 무심히 보던 이안이 엉망으로 더러워진 그녀의 몸과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맞아 부풀어오른 뺨의 모습과 뜯긴 옷소매 등을 바라보면 저 남자를 너무 일찍 죽였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미아를 달래듯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미아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숨 쉬어.”
이안이 낮게 속삭였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미아는 꿈결 같은 그의 말을 들었다.
“이제, 내가 무섭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