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그냥 보기만 해도 (23/95)

23화. 그냥 보기만 해도



 

“이 드레스는 어때요?”

“너, 너무 움직이는 데 불편하지 않을까?”

“그럼 이건 어때요.”

“그냥 씨앗을 사러 가는 것뿐인걸.”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마을에 나간다고 신이 났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미아는 저보다 더 신이 나서 옷을 고르고 있는 애니를 가만히 보았다.

애니는 새로 생긴 안주인의 옷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말라 명한 이안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지만.

미아는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애니, 이안 경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이안 경도 이해하실 거예요. 지금 너무 아름다우시거든요.”

“어?”

아름답다는 찬사는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 것인 적이 없고.

당황한 미아가 멍하니 애니를 보자, 애니가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양털로 만든 모자를 손수 씌워주며 말했다.

“귀가 시려우실 테니, 이걸 쓰시고. 이 아래로 리본을 이렇게 묶으면……, 됐다. 너무 귀여워요, 미아 님.”

“귀여워? ……그럴 리가. 이거 애들이 하는 거 아니야?”

“잘 어울리세요. 이안 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애니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미아는 더 이상 이안을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기가 지겨운 듯 기둥에 기댄 채로 서 있던 이안이 그녀의 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귀에 뭘 한 거지?”

“아, 털이 달린 모자예요. 애니가 귀가 시려울 거라면서 해줬어요.”

역시 이상한가?

미아가 어설프게 웃으며 이안과 눈을 맞췄다.

이안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가자며 몸을 틀었다.

역시 이상하지.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진 미아가, 손으로 슬쩍 제 뺨을 가린 채 이안을 따랐다.

저벅저벅, 걸음과 걸음 사이가 멀었다.

평소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풀 겸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는 것은 미아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안에게는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흔한 날씨 얘기조차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날씨가 참 좋네요.’

라고 말하기엔, 그렇게까지 좋은 날씨가 아니다.

‘날씨가 좀 어둡네요.’

라기엔,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라는 답이 돌아올까 두렵다.

상념에 잠겨 말거리를 찾던 미아의 시선이 성문에 가닿았다.

둘 외에는 동행하는 이가 없는지, 성문을 지나면서 문지기가 인사를 올렸다.

“저희 둘만 가는 거예요?”

“왜. 씨앗을 시중이 짊어져야 할 정도로 많이 사려는 건가?”

이안은 미아와 오붓하니 걷고 싶어 일부러 걷는 것을 택했으나, 미아가 그 속을 알 리 없었다.

둘이 이대로 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척이나 불편할 것 같았지만, 미아는 바른대로 말을 할 수 없으니 화제를 돌렸다.

“아뇨, 그건 아닌데. 이안 경은 혼자 움직이는 게 익숙하세요? 저는 황태자비였는데도, 시중이 두셋은 따라다녔거든요.”

“누가 따르는 것은 질색이다.”

“……아.”

그럼 황제일 때도 혼자 다녔나?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가. 그럼 위험에 처했을 땐?

미아는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이안을 따르던 그녀가 순간 눈이 쌓인 길에서 발을 헛디뎌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어!”

넘어질 것 같으니, 저절로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앞서 걷던 이안이 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뻗어 넘어지려는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더니 그의 가슴팍에 그녀의 얼굴이 닿았다.

미아가 고개를 들자, 그와 입술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이슬이 슬쩍 맺힌 검은 머리칼은 탐스럽고,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 차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는 루비를 박아 넣은 듯 아름답다.

장대한 기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몸의 곡선과 직선, 탄탄한 가슴팍과 잘 깎아 벼른 듯한 턱선.

갑자기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미아의 가슴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나 왜 이래?

미아는 당황해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조심하지.”

“……죄, 죄송해요.”

이안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뚝뚝한 목소리로 조심하라는 주의를 줬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 미아가 다시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이 와서인지, 생각보다 길이 미끄러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애니가 그래서 신을 갈아신으라고 했었구나.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한 나머지, 그냥 나왔는데.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군.”

“예?”

“잡아라.”

한결 느린 걸음으로 걷던 이안이 미아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미아는 멀뚱히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이안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또 얼굴을 붉혔다.

“괘, 괜찮습니다.”

“넘어지면 돌아가는 길엔 내가 그대를 업어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은가?”

“아, 아니요!”

덥석.

미아가 손을 뻗어 이안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안은 그제야 만족한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그였으나, 손의 단단함은 여실히 느껴졌다.

검을 오래 쥔 사람들의 손이 이리 딱딱하던데.

호신술로나마 검술을 배운 적이 있는 미아가 무심코 생각했다.

황제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검술을 익히던가?

카일렌은 어땠더라.

또.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카일렌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해놓고.

미아는 조용히 혼자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지난 인생은 카일렌 위주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은 남자도 카일렌이 유일했고, 아는 남자도 카일렌이 유일했다.

그러니 모든 것의 기준이 그가 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바뀌어야 했다.

이안의 앞에서, 카일렌을 떠올리는 일이 어쩐지 부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카일렌 때문에 그가 폐위되어서였을까?

그게 아니면 미아의 마음에, 이안이 다른 의미로 자리 잡기라도 한 것일까.

“혼자 요란스럽군.”

“아니에요, 쓸모없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 쉬이 넘어지는 것이지. 이 성에 오고 나서 몇 번을 넘어졌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미아는 원래도 발이 작아 잘 넘어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주로 사람이 없는 곳에서 넘어져, 아무도 몰랐을 텐데.

‘설마 바닥이 울렸나? 그래서 다 들린 건가.’

미아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안이 그녀가 잘 넘어진다는 시중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아이가 있는 엄마치고, 조심성이 없군.”

“……주의할게요.”

하긴 나는 이제 홑몸도 아닌데.

아이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딛는 걸음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의식한 듯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하여, 그녀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해주었다.

행여 그녀가 넘어질까,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대를 위해서.”

“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를 위해서 넘어지지 말아야지.”

미아는 이안의 말에 멍해졌다.

그녀는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뜻대로 무엇을 해본 적 역시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스스로를 위해 넘어지지 말아라’라는 간단명료한 말을 전해준 이가 없어서, 그래서.

그의 말에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

“게다가 그 몸의 주인은 이제 그대가 아니니까.”

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미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니면 달리 누구의 몸이란 말이야, 이 몸이. 설마 자기의 몸이다, 뭐 이런 느끼한 소리를 하려는 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을 한 탓에 뺨이 붉어졌다.

에이, 설마 그런 말을 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에게 그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난 상한 것을 가지는 취미는 없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미아의 상상을 벗어났다.

단순히 미아를 그의 소유로 단정했을 뿐만 아니라, 상한 ‘것’이라 칭했다.

아무리 자신을 제멋대로 대한다지만, 물건 취급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쩐지 저를 보는 사나운 시선이 느껴져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아는 얼른 눈에 힘을 풀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어, 여기예요?”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또 걷자,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저마다 길바닥에 물건을 내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조그마한 상점들도 보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미아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달브에서 보던 시장보다는 규모도, 물건의 가짓수도 적었지만, 성 안에만 있을 땐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 그 사이를 구경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달브에서도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안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듯, 저들끼리 흥정하느라 바빴다.

그도 굳이 저의 존재를 알리려 하지 않고 미아만 눈으로 열심히 좇을 뿐이었다.

털옷과 털신, 모자 등을 차례로 구경하던 미아가 이안이 멈춰선 곳으로 다가갔다.

“뭐 보세요.”

“이거.”

그가 가리킨 것은 귀를 덮는 모자였다.

미아가 하고 있는 것은 노란빛이 도는 갈색인 반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새하얀색이었다.

빨간색 리본에, 꽃잎이 들어간 자수까지.

고급스러운 문양을 가지고 있어 귀족들에게나 팔릴 만큼 값비싼 것으로 보였다.

“보는 눈이 좋으시네.”

상인은 활짝 웃으며 이안의 안목을 칭찬했다.

이안의 정체를 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을 텐데.

폐위된 폭군이 이런 시장에 와서 모자를 구경하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서 그런지, 상인은 이안을 귀족쯤으로 여겼다.

“이안 경이 직접 하시게요?”

“……지금 나한테 물은 것인가.”

“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머리가 검으시니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안이 고개를 돌려 미아의 말을 외면했다.

자신에게 이 모자를 대입해 생각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그럼 이걸 왜?’

미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은 답답하다는 듯 긴 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황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

까다로운 황후도 미아만은 예뻐했다더니, 그게 미아의 빠른 눈치 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히도, 제 며느리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이안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그럴 정신이 있으면 아들 단속을 잘해야 했다.

물론 그 덕에 지금 미아가 제 앞에 있지만.

“날 봐.”

이안이 낮게 말했다.

그녀가 모자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힐긋 올렸다.

미아가 미처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이안은 미아가 하고 있던 모자를 조심스레 벗겨냈다.

“……!”

머리가 눌려서 이상할 텐데.

당황한 미아가 제 머리를 가리려고 손을 들자, 그가 손에 든 새 모자를 들어 그녀에게 씌웠다.

깜빡, 깜빡.

미아는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의 검지 끄트머리를 물어 그대로 장갑에서 손을 꺼냈다.

별거 아닌 동작이, 이렇게 느릿하게 느껴지는 건 왜지?

이 잘 익은 자두 빛 입술 새로 장갑이 벗겨지는 것뿐인데, 옷을 벗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건 왤까.

“가만히.”

이안이 속삭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