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내가 예쁜가?
갑자기 웬 냄새 타령?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그렇다면 되었다는 듯 시중을 불렀다.
그리고 찻잔을 한 잔 더 가져올 것을 일렀다.
“여깄습니다, 이안 님.”
“다과도 내어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이안의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마치 그녀에게 고르라는 뜻 같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와 차라도 느긋하게 즐기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좀 곤란한데?
이전에 나눴던 대화에 대해 둘은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런 얘기를 나눌 만큼의 에너지도 용기도 없는 상태였다.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짓말처럼.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났다.
“크흠, 흠!”
미아가 소리를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이안은 무심코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무심해도, 아니 오히려 무심해서 충분히 민망했다.
“……쿠키?”
“쿠키로 준비하거라.”
사실 미아가 대답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아 배 속의 아이가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굴욕은 온전히 미아의 몫이었다.
그녀의 뺨이 붉어진 것을 본 것인지, 이안은 시선을 멀리 두었다.
애써 모른 척이라도 해주듯이.
벽에 기대앉은 그의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
“…….”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빨리 차를 다 마시고 올라가야겠다.
그렇게 생각이 든 미아는 찻잔에 든 차를 급하게 마셨다.
“아, 뜨거워.”
덕분에 혓바닥을 대었다.
원래 이렇게 덤벙대는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안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유난히 더 잘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녀는 따끔한 혀를 얼른 입술 새에 집어넣고 통증을 삼켰다.
이안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나와 있는 게 불편한가.”
“아, 아뇨? 제가 왜 불편하겠어요.”
“불편해 보이는데.”
다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불편한 티를 냈으니까, 당연히 눈에 보이겠지.
미아는 마치 그들 사이에 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구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죽어서나 나가라더니, 뒤늦게 후회라도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해주면 좋겠는데.
미안하다고, 화해하자고.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텐데.
“…….”
말이 없는 그를 바라보던 미아가 괜히 제 손끝만 바라보며 무료함과 어색함을 견뎠다.
그런 그녀를 의식한 듯,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밥을 남겼더군, 대개. 입에 안 맞는가?”
“아뇨. 음식은 입에 맞아요. 다만 아직 속이 좀 안 좋을 때가 있고, 무엇보다 애초에 주는 양이 너무 많아요.”
“잘 먹어야 한다던데, 아닌가?”
“물론 잘 먹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가끔 먹기 괴로울 때가 있어요. 이안 경도 그러실 거 아니에요.”
“…….”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 위로 언뜻 지나가는 그늘이 보였다.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은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괜한 말을 했다 싶은 미아가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는 사이 애니가 쿠키를 가져와 그들의 앞에 내려두었다.
“라즈베리와 카카오로 만든 쿠키입니다. 위에는 견과류를 올렸어요. 저번에 미아 님께서 알려주신 방식을 썼더니, 훨씬 맛있게 구워진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 애니.”
미아의 표정이 이제야 밝아졌다.
그 앞에서는 이런 표정을 짓지 않던 미아가 환히 웃자, 이안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애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 그럼 맛있게 드세요!”
왜 저렇게 급하게 가지?
아직 이안 경이 무서운가.
멀어지는 애니의 모습을 보던 미아가 쿠키로 손을 뻗었다.
무심코 제 입으로 가져가려던 손을 멈춘 미아가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차를 후, 불어 몇 모금 삼키고 있었다.
“…….”
그런 그의 앞으로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미아가 쥔 먹음직스러운 쿠키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이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뭐 하는 거지?”
“드셔보세요.”
그러고 보니 그가 무언가를 먹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왜.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선의요, 선의. 맛있는 걸 먼저 권하는 선의.”
설마 정말 독이 들었다 생각해서 먼저 먹으라고 했을까.
좋은 말로 해도 듣지 않는 그를 대체 어디서부터 달래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알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런 것을 나에게 보이다니. 차라리 죽이라던 성미는 어디 가고.”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필 이 순간 그때의 일을 언급하다니.
도대체 이 인간의 성격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이런 것일까.
도무지 좋게 넘어가려 해도 좋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속이 얼마나 상하는지 이안은 알까.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냉대받는 것은 다르다.
미아는 저를 대하는 이안의 태도가 정말이지 낯설었다.
이안은 자신의 말에 굳는 미아의 입꼬리를 보았다.
그리고 동요했다.
생전 따뜻한 말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누군가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생각을 고쳐 말하는 법을 모른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칠 수도 없었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 어떻게 입을 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그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껏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두려워하고, 말을 섞기조차 어려워했지.
이렇게 대놓고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여기 포로로 잡힌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다니.
그녀는 어쩌면 진짜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안이 이제껏 아무도 제 뜻대로 죽인 적이 없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뭐가 예쁘다고, 이런 것을 권할까요.”
“……예쁜가?”
덜컥, 그 말이 마음에 걸려서.
미아가 무심코 뱉은 말에 스스로 당황할 때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었다.
“……!”
미아가 그런 이안의 손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방금 한 말을 떠올리면 지금 이안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마주해봤자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마주한 얼굴인데.
게다가, 어떤 말을 내뱉은 얼굴인데.
이대로 순순히 놓아주겠는가.
“내가 예뻐?”
이안이 다시 물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예뻤다.
턱선이 날카롭고, 남자답게 굵은 선을 가진 그인지라 잘생겼다는 표현이 예쁘다는 말보다는 더 어울릴지 모르나.
두께가 딱 적당히 부푼 입술이라든지 바른 콧대와 반듯한 콧날, 속눈썹이 기다란 눈꺼풀 같은 것을 보면 예쁘단 소리가 절로 나왔다.
외모만 놓고 보자면, 카일렌이 ‘예쁘다’는 표현에는 더 적합할지 몰라도.
둘은 분위기가 다른 것이었지,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외모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눈빛이군.”
“아니에요.”
“아니긴. 더 예쁜 이라도 있던 모양인가.”
카일렌이 미남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유약하고 병약해 보이는 남자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그런 게 대체 어디가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안은 뻔히 보이는 미아의 생각에 심사가 뒤틀렸다.
“아니에요. 왜 이렇게 믿음이 없어요?”
“믿음을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요, 이안 경. 제가 얼마나 믿음을 주려고 애썼는데.”
“그대가?”
“쓸모를 증명하려고 편지도 쓰고, 요리도 하고. 게다가 방 밖으로는 나가지도 않았잖아요.”
미아는 또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은 이안의 태도에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래서 그녀답지 않게 흥분했다.
“그건 그대가 나에게 마음이 상해서가 아니었나?”
“아니거든요! 괜히 또 떠난다고 걱정하고 유리라도 깰까 봐. 얌전히 있는 모습 보여준 거예요.”
이번엔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아가 그렇게 사려 깊게 자신을 생각해줄지 몰랐다.
그저 자신에 대한 항의 표시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안 먹으려면 됐어요.”
내내 뻗고 있던 손을 거둬들이려는 미아의 손목을 이안이 턱하고 움켜쥐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그대로 끌어 제 입가로 가져왔다.
“자, 잠깐만요.”
미아가 당황하는 사이 이안은 그대로 입술을 열고 쿠키를 베어 물었다.
미아의 손끝에 언뜻 그의 입술의 감촉이 닿았을까, 그가 천천히 쿠키를 씹더니 남은 반절의 조각을 미아의 앞으로 가져왔다.
먹으라는 뜻 같았다.
‘방금 자기가 먹었던 거면서, 방금 자기가 베어 물었던 거면서. 어떻게 먹으라고 할 수가 있지?’
황당한 그녀와 달리,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먹을 때까지 집요하게 지켜볼 기세였다.
미아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려 눈 딱 감고 쿠키를 먹었다.
고소한 견과류의 맛과 새콤한 라즈베리의 맛이 아주 잘 어울리는 쿠키였다.
부드럽게 부서지는 쿠키의 촉촉한 속 또한 버터의 풍미가 잘 느껴져서 매우 맛있었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리고 곧장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무언가를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이번만큼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쁘지 않군.”
또 그런 표현인가?
저번에도 먹을만 하다고 한 게 전부면서.
“다른 표현은 없나요, 이안 경?”
“다른 표현이라면 무슨 표현을 말하는 거지?”
“맛있다든가,”
“맛있다.”
“훌륭하다라든가.”
“훌륭하다.”
“아니, 그건 제 말을 그냥 따라 하시는 거에 불과하잖아요.”
“듣고 싶은 말이 있다기에 해준 것인데 그것도 문제가 되나?”
미아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분명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상하냐고.
그런 미아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이안이 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손을 그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제 손가락으로 거둬갔다.
“……!”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혀를 내어 낼름 손가락을 훑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왜 이런 모습이 하필이면…… 자극적으로 보이는 걸까.
미아는 괜히 붉어지는 제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가지.”
“어, 어딜요. 갑자기.”
“방에만 있는 건 충분히 하지 않았느냐.”
“그, 그럼 어딜 가게요.”
“가고 싶다고 했지, 꽃씨를 사러.”
“설마 지금 가는 거예요?”
“가기 싫은가?”
이안이 나직이 물었다.
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요, 가! 옷만 갈아입고요. 애니!”
급하게 방으로 뛰어가는 미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달려가 덥석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순간 놀란 미아의 몸이 굳었다.
둘의 허벅지가 가까이 밀착되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뛰지 마라, 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