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그럼 죽이든가 (21/95)

21화. 그럼 죽이든가



 

뭐?

지금 이안이 한 말이 무엇이지?

미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

이안은 자신의 말을 곱씹느라, 미아는 그의 말을 해석하느라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 보아도 고작 ‘너는 내 허락 없이는 나갈 수 없다’ 정도였는데.

그 말을 세상 어느 누가 ‘나가려면 죽어라’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럼 죽여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얕봐도 정도가 있지.

이런 화법은 세상 듣도 보도 못한 화법이었고,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무례였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본 이안의 얼굴이 분노로 차게 물들었다.

이안이 손을 뻗어 미아를 돌려세웠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미아는 되려 제게 화를 내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인형처럼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뭐가 다르죠?”

“뭐?”

“살아있기만 한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에요. 황태자비로 살 때, 남편의 사랑을 한 톨도 받지 못했지만 괜찮았던 건! 그랬던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거기서는 적어도 ‘필요’ 받았다고요. 하지만 이안 경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 아침 일찍부터 이안 경을 위해 이것저것을 해보았지만 돌아온 말이 뭐예요?”

와다다, 미아가 말을 뱉어냈다.

그동안 쌓고 쌓은 마음이자, 원망이었다.

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님은 이안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그런 반응에 미아는 마음이 상했다.

이 정도로 말을 하면, 그도 말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네가 사라진 줄 알고 놀라 헛소리를 하였다.

미안하다.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으마.

이런 말을 뱉는 대신 그는 침묵했다.

그녀는 그의 침묵이 버거워져 끝내 고개를 돌렸다.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저 장난감이 필요한 거라면, 다른 장난감을 찾으세요. 나는 그런 놀잇감이 되어줄 마음 없어요.”

미아는 이안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이안이 그녀를 막아 세우지 않았다.

❀ ❀ ❀

바보같이 거기서 카일렌 얘기는 왜 했지.

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이 아니냐며 애니가 가져다준 비스킷에도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배가 당기고 가슴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그냥 기분 탓이려니 했다.

설마 아이가 엄마의 언짢은 기분을 아는 걸까.

그런 거라면, 너무 미안한데.

아이가 없는 자신의 상태가 익숙해서인지, 모든 행동을 할 때 아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

미아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작게 속삭였다.

윌리엄은 돌아갔을까.

그렇게 이안을 뿌리치고 방으로 돌아온 미아는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설마 정말로 보내지는 않겠지?”

미아는 아까 말이 없던 이안을 떠올렸다.

그는 읽을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고 차라리 죽이라는 말까지 내뱉었는데도 말이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안 할 거면 화라도 내지.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 간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너는 내 것이 아니었냐고.’

응?

무심코 생각하던 미아가 당황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내가 그의 것이라고?

미아는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아프지 않게 양 뺨을 찹찹 때렸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하도 이안에게 그런 말을 들었더니, 어느덧 저도 이안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미아 양. 같이 궁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도 이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실 것 같거든요.’

윌리엄이 그 말을 건넨 저의부터 생각해야 한다.

‘형도 이참에 어머니와 화해를 하고.’

분명히 윌리엄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안이 어머니인 황태후와 싸웠다는 뜻인가?

전에 보내온 편지는 그럼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식에게 두말 말고 죽으라며 자살을 종용할 부모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그건 홧김에 한 말 같은 것일까?

편지를 태워버린 것도 모종의 이유로 어머니에게 화가 난 이안의 분풀이 같은 것이고.

일전에 올리비아에게는 어머니와 어울려 자신을 끌어내린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니.

황태후가 이안의 폐위에 가담한 것은 알겠는데.

둘이 대체 뭐 때문에 충돌한 건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그걸 알면,

그걸 알아내면 이안을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미아는 자신에 대해 대체 무얼 아느냐고 묻던 그를 떠올렸다.

죽이고 싶지 않았을 거라 섣불리 단정한 자신의 죄도 있었지만, 정말 이안이 자신이 숙청한 이들을 전부 죽이려 들었다면, 이안은 그 자체로 악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미아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미아는 바랐던 걸까?

이안이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저, 아가씨.”

나이가 지긋한 남자 시중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미아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잠깐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문을 연 미아의 앞에 서 있는 남자 시중의 얼굴은 몹시도 난처해 보였다.

그새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미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 그게. 이안 님께서 황제 폐하를 배웅하지 않겠다고 해서.”

“황제 폐하께서 지금 가시는 거예요?”

“예. 그런데 아무도 배웅하지 않는 건, 정말 도리가 아니고. 저희 사용인들도, 입구에 모여 있긴 합니다만 주인의 허락 없이 인사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어서.”

“……이안 경은 어디 있어요?”

“서재에 계십니다.”

정말이지.

미아는 아직 이안을 마주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윌리엄을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이안보다야 윌리엄을 상대하는 일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미아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 정원으로 들어서자, 늙고 큰 나무 아래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갈 요량인지 외투까지 갖춰 입은 윌리엄의 모습은 역시 일국의 황제답게 늠름했다.

문제라면, 그런 윌리엄의 모습을 보고 미아가 황제 시절의 이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는 것쯤.

생각하지 말자, 뭐가 예쁘다고.

미아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윌리엄에게 다가갔다.

“폐하. 가시게요?”

윌리엄이 미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네. 이제 가려는데, 형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이안 경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아닙니다. 그런 건 누가 대신 사과할 수도 없는 것이고, 형이 이렇게 나오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저 그런데…… 아까 하신 말 진심이셨어요?”

“아까 한 말이라면 무슨?”

“황궁으로 와 황태후 폐하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아, 그 말이요.”

윌리엄은 미아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맑은 햇살을 받은 윌리엄의 머리칼이 반짝하고 빛났다.

“예, 진심이었습니다. 어쩌면 둘의 틀어진 사이를 미아 양께서 돌이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태후 폐하와 이안 경이 화해하길 바라시나요?”

“그럼요. 아무리 형이 폐위됐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인걸요.”

“…….”

진심일까?

미아는 헷갈렸다.

윌리엄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를 의심하기엔 그의 행동 중 수상쩍은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전 황제를 대하는 태도치고 너무 유순해서 당황스럽달까.

오랜 역사를 훑어보면 폐위된 폭군은 처형되기 마련인데, 이안은 멀쩡히 살아있다.

게다가 윌리엄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워낙 형제의 사이가 공고해서 그런가?

“그쯤하고 돌아가지.”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내 나와보지 않는다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대.

미아는 일부러 이안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야 나와주네, 형.”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

“그래, 이제 진짜 가야 돼. 더 늦으면 어머니께 무슨 꾸중을 들을지 몰라.”

“…….”

“근데 말이야, 형. 가기 전에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뭐지?”

“달브 황국에서 형을 찾고 있대.”

왜 찾을까.

카일렌 때문에 폐위되었으니까?

그 오명을 벗겨주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굳이 왜?

이미 달브 황국과 바트르 황국은 휴전 상황에 들어갔다.

게다가 이안이 폐위된 것은 오직 ‘카일렌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폭군으로 위상을 떨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였으니까.

“이유는 몰라도 조심해.”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틀었다.

❀ ❀ ❀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기에 기척도 못 느끼지?”

헤엑.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깜짝 놀란 미아가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 앞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이안이었다.

사냥을 다녀왔는지, 승마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놀란 순간에도 붉게 물든 그의 옷 소매가 눈에 띄었다.

“다쳤어요?”

“…….”

“어디 봐요. 상처가 어디 났는데요.”

이안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미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열심히 움직이던 것이 머쓱해져 움직임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둘의 사이가 이리 살가울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며칠 전, 윌리엄이 황궁으로 돌아가고 나서 줄곧 미아는 이안을 피해왔다.

이안도 그런 미아를 구태여 찾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둘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이안이 자리를 비웠다기에 모처럼 밖으로 나온 것인데.

너무 방심했지.

‘그대가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그럼 죽여요.’

둘이 팽팽히 맞부딪혔던 날이 떠올랐다.

이안의 마음이 어땠든, 차라리 죽이라는 것은 미아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이안의 말에 열이 받아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진심이었다.

이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데리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아이를 탐내기라도 하는 것일까?

카일렌에 대한 복수로, 그 아이를 해치려고?

아니면 그녀를 정말 장난감 취급이라도 하려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건…… 그런 건 미아가 보아온 이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됐어요.”

미아는 이안의 손목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화를 내놓고 새삼스럽게 다친 이안을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이 민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미아를 두고 응접실을 빠져나갈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비린내.”

“네?”

“피비린내가 나나, 나한테서?”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