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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궁으로의 초대 (20/95)

20화. 궁으로의 초대



 

윌리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자신이 이안을 이기지 못했던 이유는 도무지 이안의 ‘약점’을 찾을 수 없던 탓이었는데.

고맙게도 이안의 약점이 스스로 짠하고 나타나 주었다.

이렇게 동요하는 것을 보면, 그도 어지간한 첫사랑을 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대체 그녀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줄은 몰라도.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윌리엄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뒤집혔던 이안의 마음이 뒤틀리기에 충분했다.

“너는 대체 언제 돌아갈 작정이냐.”

“내가 보는 앞에서 하지 않아도 되겠어, 혼인?”

“네가 보는 앞에서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좋잖아. 황제의 축하를 받는 혼인이라면.”

“…….”

“아니면 이건 어때? 형이 황궁으로 와서 혼인식을 올리는 거야. 어머니 앞에서 말이지. 어머니 앞에 직접 나서서 보여줘. 형이 선택한 삶을, 형이 선택한 여자를.”

“닥쳐.”

“왜, 안 그러면 나도 저 도자기처럼 부수게?”

“그럴지도 모르니 입 다물어.”

“…….”

윌리엄은 그제야 입을 다무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뛰어온 시중들이 깨진 도자기 조각을 치우는 동안, 이안은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피가 묻은 그의 손을 흐르는 물에 씻자, 핏물이 번져나갔다.

제 손에 피가 묻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살피던 미아의 손길이 떠올랐다.

헛헛하고 후회스러운 마음이 상처보다도 더 쓰라렸다.

“시,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시중은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붕대를 건넸다.

이안이 제 손에 대충 붕대를 감싼 뒤 걸음을 옮겼다.

❀ ❀ ❀

“…….”

“…….”

“……아하하,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조용한 식당 안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윌리엄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싸늘한 공기에 자신이 얼어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입을 열자, 그제야 이안이 포크를 들었다.

애니가 말해주었나.

아까 얼굴에 숯검댕을 묻히고 있던 미아는 어디 가고, 머리를 질끈 묶고 매끈한 피부를 한 미아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기 좋았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눈에 담아둘 것을.

화내는 대신 얼굴을 직접 닦아주기라도 할 것을.

느지막한 후회가 느슨히 밀려들었다.

하지만 태연을 가장해야 했다.

아까부터 필요 이상으로 동요한 모습을 윌리엄 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나이프로 빵을 자르고 빵의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고 시큼한 사과의 향이 입에 퍼지면서 부드럽게 혀 위에 녹았다.

사각사각 씹히는 작은 사과 조각이나, 고소하게 번지는 밀의 향이 딱 적당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입에 맞으세요?”

미아가 조심스럽게 윌리엄에게 물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렇게 맛있는 빵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윌리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휴우…… 다행이에요.”

윌리엄의 반응이 다행인지 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안을 보았다.

이안의 반응도 궁금하기는 했다.

아까 그가 건넨 말이 아직 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에 콕 박혀 있기는 해도 말이다.

“……먹을만하군.”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다.

그저, 먹을 만 하다는 상투적이고 투박한 칭찬이었다.

아까 그 일이 없었다면, 이안의 평소 화법에 익숙해져 가던 미아였으니 충분히 뿌듯함을 느꼈겠지만.

이미 두 사람의 사이에는 냉담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다.

‘음식이면 다 먹을만하지.’

미아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맛있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거나, 큰일이 나는 모양이다.

이어, 윌리엄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꿀떡, 꿀떡.

목으로 넘어간 차의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살짝 쌉싸름하면서도 끝 맛이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꿀의 맛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이거, 속이 엄청 풀리는 맛이에요!”

“가시엉겅퀴가 술 마신 다음 날 속을 편안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요. 황후 폐하께 자주 만들어드리곤 했어요.”

무심코 말하던 미아가 멈칫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일을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윌리엄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가, 다시 곱게 휘었다.

“그런가요? 달브 황국의 황후 폐하께서 과일주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지금은 아니실 거예요!”

“뭐, 흉도 아니죠. 전 어제 기억이 없어요. 술이 약해서, 하하.”

윌리엄이 어색하게 웃으며 넘겼다.

대충 보조를 맞추려 미소 지은 미아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밥맛이 전혀 나질 않았다.

이안이 그녀에게 던진 말이 잊힐만하면 자꾸 생각나 되새김질 되었다.

‘정물처럼’ 그건 어떤 말이었을까.

정말로 그림 속의 여자들처럼, 이안은 미아가 가만히 있기를 바랄까.

그가 그렇게 화낸 것이 그녀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서라면, 쓸모를 증명해 보이는 것 역시 정말 그의 말처럼.

그저 밤일을 도와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적어도 달브에서 미아는 황태자비로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곳에서 느꼈던 행복감과 만족감을, 필요 당하는 기쁨을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래서 말인데, 미아 양. 같이 궁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도 이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실 것 같거든요.”

“네?”

미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설마 바트르 황국의 황궁으로 가자는 말을 들은 건가? 바로 한 달 전만 해도 전쟁을 벌이고 있던 적국의 황태자비인 내가 황궁으로 향해 황태후가 먹을 음식을 한다고? 나를 어떻게 믿고. 아니 그보다 나를 데려가서 대체 무얼 하려고.’

이런저런 생각이 어지럽게 미아의 머릿속에 튀어 올랐다.

그녀는 당황했고, 마땅한 핑계를 생각해내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건 좀…….”

미아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흘깃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진 것이 보였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가늠하게 했다.

당연히 화가 날 법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정작 그를 죽이려 했다는데, 그런 어머니를 위해 미아를 불러 요리를 시키다니.

“황태후 전하께서 미아 양을 마음에 들어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확신이요?”

“네. 그러니까 형도 이참에 어머니와 화해를 하고, 미아 양도 소개해주고 하는 거죠.”

휙.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나이프가 날아갔다.

놀란 미아의 입이 미처 벌어지기도 전에 윌리엄은 고개를 기울여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했다.

마치 자신에게 가해질 공격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런, 이런. 형. 이거 반역이야.”

“네가 일으킨 건 반역이 아니고?”

“성공한 건 반역이 아니라 혁명이지.”

“그 흔한 호위 무사 하나 데려오지 않은 네가 여기서 살아나갈 거라 자신하는 것이 더 우습지 않나.”

“그야, 이 성의 일대를 전부 에워싸고 있으니까. 굳이 들어올 필요까지 없잖아?”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윌리엄의 얼굴이 순간 미아의 눈에 악마처럼 보였다.

이안은 그런 윌리엄의 얼굴을 종잇장 구기듯 당장이라도 구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가지.”

“저, 아직 답을 못 드렸…….”

그래도 초대받은 것은 미아였다.

거절을 하더라도 미아가 제대로 거절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 그런 도리 따위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끌었다.

당황한 미아가 윌리엄을 돌아보자, 윌리엄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 사람도, 보통이 아니야. 바트르 황국의 황족들 모두…… 보통 미친 게 아니야.’

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앞서 걷는 이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안에게 잡힌 손목이 뻐근해질 때 즈음, 그가 손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미아의 걸음이 멈췄다.

“무슨 답을 하려고?”

“왜요. 저는 답도 못 하나요, 스스로?”

미아에게서 날 선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민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됐다.

황제에게 식사 중 나이프를 던지는 대범함까지는 공감하지 못해도, 그의 분노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풀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며, 인형처럼.

그런 말을 듣고도 속 좋게 웃어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미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대거리를 하지 않으려 해도 콕콕 그 말이 마음을 쑤셨다.

생전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정물처럼, 인형처럼’ 있으라고 한 것은.

그건 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고, 아무리 그 상대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걸 받아들이면 미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미래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긍지마저 없다면,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도무지 사랑하고 존중할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도 흥분한 나머지 뱉어버린 말들에 미아가 상처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이안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까 윌리엄이 뱉은 말은 그녀를 향한 말이 아닌 그를 향한 말이었다.

그에게 선전포고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단 뜻이다.

굳이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 역시 미아의 여린 마음을 이용해보려는 얄팍한 수작이었음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이안은 또렷이 알았다.

“그래요. 그럼 제 대답을 대신 전해주세요. 저는 가겠다고요.”

하지만 그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뜻을 전부 속이고 숨길 만큼 어리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틀린 마음에 가시 돋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뭐?”

“가겠어요, 거기가 어디든. 여기보다야 낫겠죠.”

미아는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동안 이안의 터무니 없는 말들에도 굴복하고 지냈던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아니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는 두려움.

자신을 받아준 이안에 대한 고마움.

그 두 가지의 감정이 미아를 이안 곁에 머무르게 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그 두 가지를 깨트리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나가겠다고?”

“네. 황궁에 가서 황태후 전하의 마음이라도 사서, 어떻게든 그 ‘쓸모’를 증명해 보일게요.”

순간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그대가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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