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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18/95)

18화.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이안과 미아의 얼굴이 굳었다.

갑작스레 아이를 언급하는 윌리엄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올리비아야 특별한 능력이 있다지만, 윌리엄은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육안으로 구별될 정도로 미아의 배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하는 말이라기엔, 그의 뜻이 의심스러웠다.

폐위된 황제였으나, 어쨌든 한때는 황제였던 이안이었다.

목숨을 잃지 않았으니, 황족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 이안의 아이라면 윌리엄이 충분히 신경쓸 만도 했다.

“오히려 아이가 생기면 곤란하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미아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거든.”

농염한 이안의 목소리와 말투에, 윌리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윌리엄이라도 형제의 이런 모습을 참고 견딜 만큼 비위가 좋지는 못했다.

미아의 몸이 긴장으로 굳자 이안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럼 식사를 해볼까.”

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윌리엄은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안과 미아가 시시덕거리는 것을 더 보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클 터였다.

미아는 조금 긴장한 채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각자 자리를 찾아 앉자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앞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입덧이었다.

한동안 괜찮던 속이 긴장한 탓인지 기름 냄새를 감지하자마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음식을 준비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하필 지금.

미아는 창백해진 얼굴을 숨기려 애를 쓰며 손을 뻗어 물이 든 잔을 쥐었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죠. 미아 양, 잘 먹겠습니다.”

“……네, 입에 맞으셔야 할 텐데요.”

미아가 간신히 웃으며 윌리엄에게 말했다.

윌리엄은 기대된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입에 맞는 듯 윌리엄의 표정이 밝았다.

이어 식사를 시작한 이안 역시 음식이 괜찮은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속이 좋지 못한 미아 혼자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일단 물을 마시자.

물을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

절대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돼.

미아가 손을 뻗어 물을 몇 모금 삼켰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중들은 저희를 도와 음식을 한 미아의 반응이 누구보다 궁금했다.

미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샐러드 야채를 입에 넣었다.

파드득하고 씹히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이건 먹을 수 있겠구나.

그 판단이 들자, 미아는 야채를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대충 샐러드와 빵, 수프를 돌려가며 먹는 시늉을 하면 입덧인 줄 모를 것이었다.

“듣던 대로 솜씨가 좋으시네요.”

“원래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 모두 뛰어난 음식 솜씨를 가지고 계세요.”

“그것 참 다행이네요. 형이 유난히 혀가 예민해서 맛없는 음식은 입에도 가져다 대질 않거든요.”

“그래요?”

미아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조용히 나이프질을 해 고기를 입에 넣었다.

미아는 그런 이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앞에 놓여있는 스테이크 덩어리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미아 양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듣기엔, 달브 황국의 황태자인 카일렌 군께서 고기를 좋아하신다던데요. 특히, 양고기를요.”

“아아…….”

확실히, 카일렌이 고개를 좋아하기는 했지.

하지만 카일렌의 얘기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관심이 자기에게 기우는 것이 싫은 미아는 하는 수 없이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지나간 인연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구나, 윌리엄.”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이름을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나에게 황제 대우라도 바라고 온 것이냐.”

“당연하지. 형에게 그것 말고는 바랄 게 없어. 어머니는 형을 굳이굳이 죽이고 싶어하시지만, 나는 형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살려두고 싶거든.”

“우스운 소리를 하는구나.”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씹고 있었다.

혀에 닿는 고기의 미끈한 감촉과 고기에서 새어 나오는 육즙에 속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뱉고 싶다, 미치도록 뱉고 싶어.

하지만 여기서 뱉는다면 당연히 의아하게 여기겠지.

씹자.

씹어서 삼켜야 해.

식탁 아래로 원피스 자락을 움켜쥔 미아의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인 미아를 눈치챈 듯 이안이 손을 들었다.

“와인 좀 가져다주지.”

“예, 알겠습니다.”

“너도 한잔해.”

“아이가의 포도가 달던가? 요새는 생산 자체를 안 한다던데.”

“묵혔으니 그만큼 독할 것이다.”

“독한 걸 먹이려 들다니, 형도 참. 그래도 형의 성의를 봐서 거절하지는 않겠어. 미아 양도 좀 드시죠.”

“아, 아닙니다. 저는 술을 즐겨하지 않아서요.”

“한 잔도?”

윌리엄의 눈꼬리가 굳었다.

그 사이, 윌리엄 앞에 놓인 잔 위로 시중이 와인을 부었다.

새큼하고 단 와인의 향이 퍼졌다.

고기의 향을 중화시키는 향에, 조금이나마 미아의 속이 나아졌다.

“마시지.”

이안이 자신의 잔을 들어 보였다.

윌리엄도 호응하듯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그제야 고기 한 조각을 삼켜낸 미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이안이 조용히 미아의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의미지?

절대 들키지 말라 주의를 주는 것인가.

아니면 미아의 자리에 있는 것 중 무언가를 건네 달라는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미아가 그의 행동에 반응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안이 그녀의 손을 턱 하니 잡았다.

그가 미아의 손가락 사이를 주무르듯 몇 번 어루만지더니 손을 뗐다.

“이만 그대는 물러가지.”

“벌써? 이제 흥이 오르기 시작하려는데.”

“둘이 대화를 나누는 편이 낫지 않겠니. 누구 덕에 음식을 준비하느라 피곤할 텐데.”

“그 생각을 내가 못 했네. 미안해요, 미아 양.”

“아닙니다.”

“그런데 거의 식사를 안 하신 거 아니에요?”

“저, 저는 요리하면서 음식의 맛을 봐서 그런지 배가 부르네요.”

“저런. 다음 끼니는 제대로 함께 하도록 하죠.”

“좋아요.”

“애니. 미아 양을 방으로 안내해라.”

헤엑.

주인님이 내 이름을 외웠다니.

애니는 깜짝 놀라 퍼뜩 몸을 떨더니 미아에게 다가왔다.

미아는 애니의 안내를 받아 식당을 빠져나왔다.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고생한 보람이 있어, 모두.”

“저, 그런데 속은 좀 괜찮으세요?”

미아를 계속 옆에서 지켜봐 왔던 애니였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응, 이제 좀 괜찮아.”

미아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애니가 안내해준 대로 방으로 들어간 미아는 찬 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바깥의 시린 바람을 쐬자 올랐던 열이 조금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아까 이안은 미아의 손을 잡아준 걸까.

그녀가 먹기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챈 걸까.

그런 거라면, 너무…… 너무 다정하잖아.

카일렌이 먼저 손을 내밀 때는 어딘가를 올라야 할 때나 말에서 내려와야 할 때였다.

아무 일 없이 그저 미아가 걱정돼서 손을 내밀어준 적은 없었다.

폭군이라며.

폐위될 정도로 흉악한 폭군이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며.

그러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지?

미아는 그 사실이 의문스러운 한편 아까 자신이 의도치 않게 엿들은 대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두말 말고 죽으래.’

왜 그런 말을 하신 걸까?

이안이 살아있음으로 윌리엄의 황위가 위협받기라도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안은 이미 먼 북방의 땅, 황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땅 아이가로 보내지지 않았나.

그를 섬기는 세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가 윌리엄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개인적인 원한인가.

머리가 복잡하니, 괜히 더 속이 얹힌 것만 같다.

미아는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침대에 앉았다.

이안은 윌리엄과 술을 마시니, 밤늦게나 돌아가겠지.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일이나 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되었다.

❀ ❀ ❀

스르륵.

설핏 잠이 들었나.

미아는 문이 열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슴프레 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안?”

미아의 입술 새로 작은 목소리가 샜다.

이안은 미아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푹신한 침대가 그의 무게만큼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열이 있군.”

찬 이안의 손이 미아의 이마에 닿았다.

시원한 감촉이 좋아서 미아는 그대로 고개를 내어주었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이안이 손을 내려 그녀의 목을 짚었다.

찬 기운에 미아의 몸이 움츠러들자, 이안이 속삭였다.

“어째서 미련하게 음식을 삼킨 거지?”

“……괜히 들킬까 봐.”

“들킨다고 하여도 윌리엄은 너에게 티끌 하나 상처 낼 수 없다.”

“…….”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미아는 이안의 말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그녀는 그냥 포로일 뿐인데, 그것도 자신을 황위에서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적국 황태자의 아내.

그가 그녀를 죽이러 들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카일렌의 앞에서 ‘내 여자’라고 해주지를 않나.

그녀를 위협하는 황제의 앞에서조차 그녀를 소중하게 대해주었다.

“이안 경.”

“왜 부르지.”

“고마워요.”

미아가 말했다.

이안은 미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무엇이.”

“저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요.”

“딱히 잘해주었다는 생각은 한 적 없는데.”

“얼핏 보면 되게 무서운 사람 같은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시선을 돌리고 숨을 내뱉으며 작게 웃었다.

“나는 사람을 여럿 죽였다.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후로. 그런 사람에게 일말의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군.”

“죽이고 싶지 않았잖아요.”

미아가 말했다.

이안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이상하게, 미아에게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안이 그렇게 나쁜 사람일 리 없다고.

“사실은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에요?”

미아의 목에 얹혀있던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아는 턱, 하고 자신의 목을 쥐는 이안에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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