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수수하지만 우아해
죽어?
나와 함께?
잠깐만, 이안을 죽이는 건 알겠는데, 나는 왜.
아니.
나를 죽이는 건 알겠는데, 이안은 왜?
아니…….
어느 쪽이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워진 미아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당황한 기색이 없는 얼굴로 윌리엄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윌리엄이 이안과 미아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농담인데, 왜 아무도 안 웃어?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놀랐다면 죄송합니다, 비잘린 양.”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윌리엄이 미아를 보며 사과했다.
그런 말에 웃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힘이 없는 이도 아니고 일국의 황제가 하는 말인데.
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괜히 자극하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이런 순간에도 미아를 부르는 칭호가 ‘비잘린’이라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이안 역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그의 편이었다.
“안으로 안내해줘야지.”
“그래. 가자.”
이안은 그제야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아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라, 그녀도 자연스레 이안을 따라 움직였다.
이안이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안은 윌리엄이 처음부터 미아에게 접근하려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미아를 신경 쓰는 거지?’
카일렌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아보다는 이안을 경계해야 함이 먼저였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답니다!”
“뭐라고요?”
“벌써?”
급작스러운 윌리엄의 등장에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허둥지둥했다.
일렬로 나와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윌리엄은 그중 하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저 아이는.
자신이 조각상과 함께 이곳으로 보낸 아이였다.
그런데 버젓이 살아 이곳에 있다니.
아이가 얼굴을 숨기려는 듯 허리를 과하게 숙인 것이 보였으나,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자신이 골라 보낸 아이이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성 안의 수족이 생각보다 적네, 형.”
“폐위된 황제에게는 이 정도도 황송한 거 아닌가?”
“정말이지. 형은 형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윌리엄이 웃었다.
시중 하나하나에게 온화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아는 저런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는 윌리엄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미아의 눈에는 이안보다 윌리엄이 훨씬 위험한 사람이었다.
“미아.”
이안이 미아를 불렀다.
미아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보자, 그가 자신의 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들어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알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 참. 미아 양이 그렇게 요리를 잘하신다면서요?”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랬나?
미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또 뭐 하려는 개수작이지.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으시다면, 음식을 직접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이곳의 주인이지, 시종이 아니다.”
“전쟁 후 남은 포로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형.”
“…….”
미아는 충돌하는 이안과 윌리엄을 번갈아 보았다.
윌리엄이 미아를 건드는 것은 이안을 자극하기 위함인가?
요리를 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이 도와줄 테니 하려면 하겠지만, 윌리엄이 굳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이는 건 집안 내력인 듯싶었다.
“저기…….”
미아가 무거운 공기를 뚫고 입을 열었다.
이안과 윌리엄의 시선이 동시에 미아를 향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안 경?”
미아가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미아는 윌리엄의 앞에서 자신에 대한 권리가 그에게 있음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별 타격이 없었는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지?”
“저야, 요리하는 분들을 도와 요리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전에 황궁에서도 몇 번 시도해 보았고요.”
“황후가 까다로운 분이시라 들었는데.”
“맞아요. 황후 폐하께서는 입맛이 까다로우셔서 제가 먼저 꼭 맛을 보아야 했어요. 제가 본다고 뭘 아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역시, 저도 부탁하고 싶군요.”
윌리엄은 일부러 미아에게 친숙한 황후의 얘기를 꺼냈다.
그것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만 미아를 보던 이안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가서 시중을 도와도 좋아.”
“네. 두 분은 부디, 편히…… 편히 대화를 나누세요.”
미아는 어쨌든 둘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이 놓였다.
뒤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애니에게 다가간 미아가 식당의 위치를 안내받아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윌리엄을 보았다.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 ❀
“먼 아이가 땅까지 아무런 용건 없이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찻잔에 띄워진 찻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안이 고개를 들어 윌리엄을 보았다.
윌리엄은 후, 하고 차를 불더니 한 모금 머금었다.
약초의 향이 입에서 화하게 퍼지며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아이가에서만 나는 약초라더니, 진귀한 약초인 듯했다.
“형이 보고 싶어서, 라고 하면 안 믿어주려나?”
“실없는 소리나 들으려고 너에게 시간을 내어준 것이 아니다.”
“왜. 형에게는 넘치는 것이 시간이잖아. 그러니 괜히 이상한 장난을 쳐보고 싶었던 거지.”
“장난?”
“저 여자 말이야. 왜 받아준 거야?”
“…….”
윌리엄이 장난기 머금은 눈빛으로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말이 없었다.
제 동생이지만 저에게 늘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 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안에게도 이안의 사정이 있었다.
이안은 어머니의 기대와 협박 속에서 모든 것을 척척 해내는 황제여야 했다.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라, 어머니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내며.
황제로서 어렵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형의 취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어떤 점이.”
“전 황후와 너무 차이 나잖아?”
황후라.
올리비아를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미아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애초에 올리비아를 사랑하는 마음 따위 이안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저 황후가 되고 싶었던 여자였고, 그런 올리비아의 야심이 황태후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계속해 아이를 갖고 싶다며 밤마다 찾아오는 올리비아에게 굳게 닫힌 문을 보여주었던 것도 이안이었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그렇지. 만약 달브로 무사히 돌아간 황태자가, 자신의 아내를 찾지 않는다면 말이야.”
“…….”
그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설마, 카일렌이 미아를 찾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가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이안의 눈매가 굳는 것을 느낀 윌리엄이 말을 줄였다.
정말 마음에라도 품은 건가, 미아라는 여자를.
윌리엄의 눈에는 별달리 보잘것없는 여자였다.
유난을 떨 것도 없이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몸매.
수수한 것이 매력이라고는 하나, 수수해도 지나치게 수수해 오히려 시중과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특별한 것은 기품.
그래, 비록 나뭇가지를 치우다 마주쳤어도, 몸이나 행동거지에 묻어나오는 기품이 달랐다.
말씨나 행동, 목소리가 모두 귀족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더 나아가 황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우아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현혹되는 사람이었나, 이안이?
“아내를 버리고 간 자가 다시 아내를 찾겠다니.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있나.”
이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니면 말고. 그런데 말이야. 황태후 전하께서 몹시 궁금해하셔.”
“…….”
툭.
찻잔을 내려놓는 손이 멈칫했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형이 혼인을 다 하겠다고 하는 건지.”
“…….”
“미아 다르뷔라고 이름을 붙인 걸 보니 마음이 확고한 거지?”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워.”
“잔꾀를 부리는 게 내 취미라지만, 이번엔 아니야. 난 그저 어머니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일 뿐이니까.”
“어머니?”
“두말 말고 죽으래.”
“…….”
여기까지 보내놓고도 죽기를 바라시는군.
아아, 우리 어머니.
정말 잔혹하기도 하시지.
한편, 미아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길을 멈췄다.
두말 말고 죽으라니.
세상에 그런 것을 자식에게 부탁하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가 폐위된 황제라고 하더라도, 세간에서 그를 폭군이라고 알더라도.
가족이라 함은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끝까지 믿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해져, 미아는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안이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 이유가 이거였던가 싶어서.
그때,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미아가 당황해 몸을 굳혔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윌리엄의 얼굴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오셨으면 문을 두드리지 않고요.”
윌리엄의 뒤편으로 굳은 얼굴로 미아를 보는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들었다는 것을 안 건가?
미아는 당황함을 감추려 고개를 훽 돌렸다.
“아, 중요한 대화 중이신 것 같아서. 바, 방금 막 도착했어요.”
“그렇습니까.”
“식사가 준비됐으니 식사하러 가시죠.”
“예, 좋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윌리엄이 싱긋 웃으며 미아를 지나쳐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미아와 잠시 눈을 맞추더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디서부터 들었지?”
“아,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네. 무, 문이 두꺼워서. 잘 안 들리더라고요.”
“들으려고는 했단 말인가.”
“예, 예?”
“됐다.”
이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빠져나왔다.
서늘해진 이안의 뒤를 따르며 미아는 어쩐지 힘이 풀렸다.
그의 기분이 상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아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지 않나.
아, 아니지.
미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이안과 가까운 사이라 착각한 것이 민망해졌다.
그는 그럴 생각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걸은 탓에, 식당에 다다른 것도 몰랐다.
앞서 걸은 이안이 걸음을 멈추자, 미아의 얼굴이 그의 등에 부딪혔다.
뒤로 넘어지려는 미아의 팔을 움켜쥔 이안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아, 죄송해요!”
“넘어지면 어쩔 뻔했어.”
“죄송합니다…….”
홑몸도 아니면서.
이안은 그 말을 겨우 삼켰다.
화가 난 듯한 이안의 얼굴에 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사이가 이리 정다우니,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