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형을 죽이는 아우
아이를 죽인다고?
폐위된 황제의 아이가 환영받을 리 없다.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마, 그래서 아이를 달라고 한 것인가?
카일렌에 대한 복수로 아이가 필요한 것은, 아이에게 그런 그늘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아니, 아니겠지. 설마.’
미아가 본 이안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표정이 어두워졌군.”
“…….”
“들키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그대에게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현재의 황제로선 알 도리가 없으니.”
“저, 황제 폐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멍청한 놈이지.”
이안은 짧게 답하고 말았다.
물론 좋은 식으로 묘사하긴 어려울 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을 해버리면 어떻게 대책을 세울까.
적을 아는 것이 싸움의 전략을 짜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황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다.
물론 다른 며느리들 사이에서 미아가 기죽지 않길 바라고 한 말이었지만.
또 저도 모르게 옛날 생각을 해버렸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미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식사를 다 마쳤으면, 이만 일어나지.”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보고 있던 미아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아.
이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
미아가 앞서 걷는 이안에게 따라붙었다.
이안이 흘깃 그녀를 보았다.
“저, 이안 경.”
“무엇이지.”
“오늘은 제 방에서 잘 수 있을까요?”
“…….”
“물론! 당연히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안 경께서 자꾸 저와 혼인하겠다고 하시니 드리는 말씀이에요.”
미아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이안과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만약 이안이 진심으로 혼인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것을 핑계로 미아가 부탁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저는 혼인 전까지는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아요, 이안 경.”
“어째서지?”
“그야…… 부끄럽잖아요.”
미아가 그렇게 말하며 뺨을 조금 붉혔다.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수를 잘 써보지 않은 그녀였지만, 막상 닥치니 다 하게 됐다.
“……올라가서 난로에 불을 지펴라.”
이안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하인에게 명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미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같이 자는 것이 불편했겠지, 이안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원래도 잠버릇이 그런가?”
“잠버릇이요?”
미아가 되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껴안는 버릇이 오래되었다면, 카일렌도 분명 미아의 품에 안겨 보았을 테였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어딘가 심사가 뒤틀려서 이안의 입꼬리가 굳었다.
서늘해진 그의 기척을 느낀 미아는 제가 아무래도 자는 동안 이안을 껴안은 것도 모자라 때린 것이 분명하다며 자책했다.
❀ ❀ ❀
성 안이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언제 황제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 같았다.
미아는 제가 도울 것이 없나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으나, 어쩐지 모두 미아를 어려워하는 느낌이 들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이안이 미아를 아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 미아는 몹시 어려운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자칫 잘못해 미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언제 이안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니, 혹시 황제 폐하에 대해 들은 것이 있어?”
“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몹시 온화하시대요.”
“온화해?”
“네. 사실 이안 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기는 하지만, 워낙 이안 님이 무섭다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모두와 잘 어울리고 존경받을 만한 황제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온화한 사람이 이안을 죽이려 했다?
그건 말이 안 됐다.
미아는 애니에게 알려주어 고맙다고 말한 뒤, 정원으로 들어섰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정원인데도, 황량한 풍경이기 그지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이안의 내면이 이렇게 황량하다고 대변하는 것만 같아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때,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요새 부쩍 외출이 잦았다.
마음이 심란한 것인지, 아니면 아우가 올 것을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중인지.
자세한 내막은 미아에게 얘기를 하지 않으니, 그녀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뭘 좀 심어보고 싶어서요.”
“무엇을?”
“추운 땅에서도 피는 꽃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었군.”
이안은 곧장 말했다.
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할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가 떼었다.
“다음에 직접 가서 꽃씨를 고르거라.”
“직접요? 어딜요?”
“마을에 나가면 이것저것을 파는 상점들이 있다.”
“정말요? 나갈 수 있어요?”
순식간에 미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성에만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겠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동자가 활기로 반짝였다.
미아의 머릿속에는 벌써 이런저런 꽃들이 피어나고 풀들이 돋아난 정원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자신이 떠나온 궁의 풍경이 잇따라 생각났다.
“그렇게 좋은가?”
“……식물을 기르는 건, 정직한 일이라 좋아요. 살뜰히 돌보면 돌보는 대로 예쁜 꽃을 피워주니까요. 정말 감사해요, 이안 경.”
“……별게 다 감사하군.”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를 보던 미아가 대충 치워놓은 듯 한쪽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를 하나둘씩 줍기 시작했다.
이런 것만 정리해도 훨씬 깔끔해 보이는데.
그녀가 지내던 황궁 같았으면 황후가 이런 정원의 모습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곧장 불호령이 떨어졌겠지.
황후와 많은 것을 함께했던 미아였기에, 정원을 가꾸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아.”
미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샜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잡았던 것이 가시엉겅퀴였던 탓이다.
미아는 피가 나는 손끝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아픔보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이 꽃이 엉겅퀴라면, 분명히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의외로 엉겅퀴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랐다.
관리가 안 됐을 뿐이지, 잘 가꾼다면 여기도 분명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해야 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미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싶지 않았다.
카일렌에게 버림받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킬 때 불쑥 그녀의 시야로 흰 손수건이 들어왔다.
흰 손수건에는 금장 무늬가 박혀 있었다.
이 문양은…….
“반갑습니다. 미아 양.”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고 선 남자였다.
반듯하게 접힌 눈꼬리가 유했고 한눈에 봐도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성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인데 누구지?
나를 안다고?
“아, 안녕하세요.”
미아가 일단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미아의 손끝에 난 상처를 손수건으로 움켜쥐었다.
옅은 통증에 미아가 미간을 좁혔다.
“손을 다치셨네요.”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아가 어색함에 서둘러 손을 거뒀다.
남자는 어쩐지 계속 빙글빙글 웃었다.
찬찬히 남자를 살펴보기 시작하니, 남자가 입은 기사복이며 어깨에 매달고 있는 휘장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새로 온 손님인가?
미아가 그렇게 생각할 때에, 누군가 그녀를 뒤로 확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
놀란 미아가 몸을 굳히며 웅크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내 것이면 일단 손대고 보는 버릇, 분명히 고치라 말했을 텐데.”
이안?
미아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안고 선 그가 보였다.
이안의 앞에 선 남자는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시고는 오른쪽 팔을 왼쪽 가슴에 얹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바트르 황국의 황제, 윌리엄입니다.”
“바, 바트르 황국의 황제요?”
“예. 맞습니다. 미아, 비잘린 양.”
미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 사람이 황제라니, 지금 황제와 마주하고 있다니.
그것도 놀라웠지만, 미아가 카일렌의 아내 즉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워서.
미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확실히 형제인 것처럼 둘은 머리 색이 같았다.
그러나 몸집은 이안에 비해 왜소했고, 얼굴도 웃는 상이라 그런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둘은 눈동자 색이 달랐다.
이안이 타오를 듯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면, 윌리엄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용케 찾아왔구나.”
“형이 있다는데, 아우가 오지 않을 수가 있나. 일전에 내가 준 선물은 잘 받았어?”
“보면 알겠지. 오다 깨졌는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도착하였다.”
“이거, 아쉽네. 내가 형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는데.”
겉으로 들으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형제간의 대화였으나, 그 어투와 느낌이 몹시도 서늘했다.
미아는 제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독침 사건만 없었어도, 아마 그녀는 윌리엄을 분명 선하게 생각하고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미아의 상처를 발견하고 먼저 손수건을 내밀어주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니, 윌리엄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안 돌려보낸 애는, 여기서 죽었겠지?”
“죽이라고 보낸 아이를 내가 살려두기라도 했을까 봐? 난 너처럼 마음이 무르지 않단다.”
말을 마음과 반대로 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인 모양이었다.
잭을 살려줬으면서도 순순히 고백하지 않은 건 다른 뜻이 있어서겠지?
아니면 쑥스러워서인가.
전자면 몰라도, 후자라면 의외의 귀여움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는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직접 시신을 수습하러 왔다더군. 눈사태를 만났고, 내가 거뒀다. 문제 될 것 있나?”
“달브 황국에서 전갈이 왔어.”
“무슨 전갈.”
“황태자가 살아있대.”
“…….”
이안이 잠시 침묵했다.
소문이 퍼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윌리엄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윌리엄이 작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난처하게 됐지 뭐야. 형이 물러났던 건, 카일렌 황태자를 죽였기 때문이잖아?”
“윌리엄.”
“그런데 황태자비는 또 여기에 있다고 하고. 내가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무슨 의심 말이냐.”
“황태자가 살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황태자비를 돌려보내는 게 옳아. 하지만 황태자비는 돌아가지 않았지. 그리고 말이야, 다른 소문에 의하면…… 황태자가 혼자서 돌아간 것이 아니래.”
미아의 몸이 굳었다.
이안이 물끄러미 그런 미아를 보더니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마치 다가올 말로부터 그녀를 감싸려는 듯.
“웬 여자와 같이 왔다더군. 그것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용건을 말해라.”
“미아 비잘린과 진심으로 혼인할 셈이야?”
“그렇다면.”
“그렇다면 형은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비잘린 양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