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쓸모를 침대에서 보여요?
“예, 예?”
“두 번 말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이리 와! 들자고.”
이안의 말을 들은 시종들이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두려움에 잠긴 노루의 눈이 시종들을 향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노루를 옮기는 것을 보고 있던 미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허공을 보았다.
“가지.”
이안의 목소리는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앞서 말을 모는 이안을 본 미아가 그를 따라 말을 끌었다.
괜한 부탁을 했나 후회를 할 때 즈음 이안은 미아의 말을 들어주었다.
잡은 것을 놓아주는 무른 성미도 없는 사람이라면서.
의외로 마음이 따뜻한가?
아니면 무슨 문제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미?
생각해보면 미아도 살려주었고, 올리비아와 카일렌 역시 살려주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 목을 베어버린다는 소문과는 달랐다.
그 소문이 진실이었다면, 이미 미아는 목숨을 잃었어야 했다.
“두 번 다시 이따위 일로 나를 귀찮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속마음을 들켰나? 진짜 귀신 같다.
마치 미아의 속을 읽은 듯, 곧장 경고하는 이안을 보며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청을 들어주었으니,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네, 죄송해요.”
“다음번엔 네 손으로 직접 사냥을 하게 해야겠군.”
그녀의 손으로 짐승을 직접 해친다?
상상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아는 기지를 발휘했다.
“……기왕이면, 정원을 가꾸는 쪽으로 써주세요. 죽은 식물 살리는 것에 재능이 있거든요. 아!”
미아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앞서가던 이안이 재빨리 말의 고삐를 쥐어 세우고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의 시선이 바로 그녀를 향했다.
이어 어디를 다친 것인지 세심히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오히려 그래서 미아는 당황스러웠다.
“저번에 뽑으려던 나무 뽑았어요?”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정원에 있던 그 오래되고 큰 나무였으니까.
그런 것을 함부로 뽑거나 베어버리면 분명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오래된 것엔 어떤 기운이 담겨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그것 때문에 고라니처럼 소리를 지른 것이냐?”
고라니?
미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안이 자신더러 고라니라고 한 것인가?
고라니라니……, 고라니라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당황스럽고 창피한 말이었다.
그녀는 한평생 스스로를 고라니에 비유 당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 없이 갑작스레 소리를 지른 적도 없었지만.
“……네.”
“두었다.”
“정말요?”
“그래.”
“그 나무, 꽃나무죠?”
“모른다.”
“아이가에 찾아올 봄에 제가 그 나무의 꽃을 피울게요.”
“네가?”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에는 미아를 향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미아가 절대 꽃나무의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하긴, 아이가의 추위를 알면서도 꽃을 피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왜요. 안 믿기세요?”
“믿기지 않는다.”
“저는 제가 피울 수 있다고 믿어요. 피울 수 있다면 어떡하시겠어요?”
미아는 평소엔 잘 부리지도 않는 오기를 부렸다.
이상하게 이안의 앞에서만 이런 사나운, 대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폭군이었던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쩌면 미아는 그녀도 모르게 망가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이미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그에게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기는커녕.
“못 피우면 어쩔 것이냐. 뭘 걸 수 있지?”
“무엇이든 걸게요! 제가 만약 실패하면 이안 경의 청을 들어드릴게요, 대신 성공하면 이안 경도 저의 청을 들어주세요.”
이건 기회였다.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 ‘쓸모’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 그에게 미아가 그렇게 약하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오늘은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 보이는군.”
이안은 미아의 말을 듣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미아는 그가 자신의 기분을 신경 써줄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제가요?”
“노루를 구해달라질 않나, 나무를 꽃 피우겠다질 않나. 나와서 신이 난 것인가?”
“아…….”
이안은 미아를 무안하게 하려 물은 것은 아닌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무안해졌다.
카일렌 앞에서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그녀조차도 그녀 스스로가 조금은 낯설던 참이다.
이안이 너무 거칠게 나와서 그런가, 미아도 그런 그에 호응하듯 자꾸 말이 늘었다.
“……돌아가지, 슬슬.”
미아가 아무 말이 없자,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말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옆에 끌어다 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귀족 영애는 사용인들 앞에서 고개 숙인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다.”
“…….”
“황태자비가 아니더라도, 그대는 그대 가문의 영애가 아닌가.”
미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이안을 보았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거려서, 미아는 숨을 죽였다.
❀ ❀ ❀
“…….”
씻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애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따뜻한 물 위에 어렵게 구해온 찻잎을 띄워줄 때까지도.
옷을 입는 순간에서야 알았다.
아, 밤이구나.
사냥에서 돌아와 곧장 어딘가로 향한 이안을 뒤로 한 채 미아는 애니가 챙겨준 간식을 먹었다.
애니는 마치 미아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듯, 자신이 직접 구운 쿠키를 가지고 왔다.
고소하고 단 것이 맛있어서, 미아가 환히 웃으니 애니는 안도하며 손뼉을 쳤다.
“저, 애니…….”
“네. 옷이 불편하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역시 여기 솔기가 좀 튀어나온 것이 거슬리죠. 제가 금방 뜯어서 다시 기울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이안 경은 어디 계셔?”
“이안 님이요? 이안 님께서는 아마 서재에 계실 거예요. 곧 침소에 드시겠네요. 사냥을 다녀오신 뒤에는 씻고 서재에 머무르시다가 조금 일찍 침소에 드세요.”
역시 그래, 그 부분이 걸렸던 거였어.
잊고 있었다.
이안이 미아에게 당분간 그의 방에서 지내라고 했던 사실을 말이다.
애니는 그제야 미아의 물음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깨닫고 슬쩍 얼굴을 붉혔다.
“저, 아가씨.”
“네?”
“바르면 좋은 향이 나는 오일이 있는데…….”
“어머, 애니! 그런 거 아니에요!”
미아는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애니가 더 놀라 몸을 퍼뜩 일으켰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게,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제 또래의 아가씨가 들어오셔서. 그리고 전에 저한테 다정히 대해주시기도 했고. 그래서 저 혼자 너무 아가씨를 가깝게 느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애니는 자신이 괜히 미아의 마음을 앞서 짐작하고 오지랖을 부린 것이 당황스럽고 죄송스러웠다.
장성한 남녀가 보통 같은 처소에 든다고 하면 밤을 함께 보낸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권했던 것인데 그게 미아에게 어떻게 전해질지는 생각지 못했다.
미아가 원해서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아니에요. 나도 애니를 가깝게 느꼈던걸요!”
“그래도 이번엔 제가 선을 넘었던 것 같아요.”
“애니가 그렇게 말한 것도 이해돼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애니는 그래도 자신이 잘못했다며 계속 사과를 구했다.
미아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제 가야겠죠.”
옷도 다 입었으니, 이제는 미룰 핑계도 없었다.
애니는 덩달아 미아처럼 결연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가서 말하자. 다시 나의 방, 그러니까…… 원래 지내던 방으로 가겠다고. 어쩌면 그 소원도 들어주실지 몰라.’
라며 침실로 향한 미아였다.
“안 된다.”
물론 이안은 단칼에 거절했다.
미아가 허망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춥지도 않은지 흰 실크 셔츠 차림에 실크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흰 피부가 더욱 희고 아름답게 빛났다.
검은 머리칼에 대비되어 얼굴이 더 돋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붉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그것이 꼭 미아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 저는 잠버릇이 있어요.”
“…….”
“엄청 괴로우실 텐데? 제가 실수로 이안 경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
미아가 이안의 곁에 서서 애원하듯 말했지만, 그는 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다가 힐긋 미아를 볼 뿐이었다.
“옷이 추워 보이는군.”
“하나도 안 추워요. 그리고 원래 지내던 방도 이 방만큼은 아니지만, 따뜻하고…….”
“한 마디만 더 해보거라.”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한마디를 더 했다가는 그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안이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장작을 몇 개 벽난로 안에 집어넣고 손을 털었다.
불꽃이 일순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미아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차의 향이 나는군.”
“아, 애니가 목욕물에 띄워주었어요. 달브에서는 주로 꽃을 넣었는데, 아무래도 여기는 꽃이 잘 피지 않다 보니 찻잎을 띄워준 것 같아요.”
“애니?”
이안이 물었다.
설마, 자기가 부리는 고용인의 이름을 모르는 건가?
그때 애니에게 직접 물었던 것 같은데.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 남자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나.
분명 조금 전엔 눈빛이 매서웠는데.
촘촘한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올라갈 때마다, 그 안에 담긴 투명한 눈동자가 더욱 맑게 빛났다.
어쩐지 무결하고 귀여워 보이네…….
미아는 잠깐 넋을 놓고 이안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입을 열었다.
“저에게 붙여주신 시녀요.”
“아, 그 계집 이름이 애니인가.”
“네, 맞아요. 이안 경께 감사드려요. 그 아이와 잘 지낼 수 있게 해주셔서.”
“별게 다 고맙군.”
“정말인데.”
“그럼 갚아야지?”
“네?”
이안이 미아에게 다가섰다.
미아가 당황해 이안의 얼굴을 올려보자 그가 고개를 수그리고 그녀의 뺨을 쥐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거짓이군.”
“……거짓은 아닌데.”
“오늘도 너는 너의 쓸모를 다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증명해야겠구나.”
“지금이요? 여, 여기서?”
미아가 당황해 허둥댔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보더니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미아가 당황해 몸에 힘을 주었으나,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뒤로 걸음을 무르다가, 침대 기둥에 발이 걸려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풀썩.
미아의 등이 침대에 닿아 출렁였다.
미아를 잡고 있던 이안이 그녀의 위로 몸을 구부렸다.
“……!”
미아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햇빛 아래에선 투명한 주황빛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달빛 아래에서만큼은 태양보다도 더 붉게 빛났다.
“……이, 이안 경.”
미아가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이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목을 한 손안에 거둬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미아의 양 팔이 속박되었다.
미아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 이 자세는…… 다소 민망한데.
이대로 이안이 고개를 숙이기라도 하면, 금방 입술이 맞닿을 것만 같았다.
쓸모를 증명해 보이라는 게 역시 이런 식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거였나?
“……저, 이안 경.”
“말하거라.”
미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쓸모라면, 미아에게도 하나 있긴 했다.
“책 읽어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