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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속내를 모르겠어 (11/95)

11화. 속내를 모르겠어



 

제정신이 아니야.

폭군이라더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안이 제정신이었다면, 자신에게 이토록 집착할 수는 없었다.

이런 기형적인 방법으로 복수할 생각을 하다니.

단순히 잔인한 것으로, 사람들을 가감 없이 벌주는 것으로 폭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소문대로라면 그날 카일렌과 올리비아는 죽어 마땅했다.

적어도, 어디 한 군데 크게 상처가 났을 터였다.

그런데 정작 이안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외려, 그들이 떠나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자칫 미아의 임신으로 인해 어그러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미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저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요?”

침실에 강제적으로 끌려와 침대에 앉아 있자니, 일 초가 영겁같이 느껴졌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 놓인 우유가 담긴 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유만 가지고는 생활할 수 없을 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제 식사할 마음이 드느냐?”

“방금 우유 마셨는데…….”

이번에는 먹는 것으로 괴롭힐 생각인 건가?

확실히 배가 불러도 계속, 엄청난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벌을 주는 나라도 있다고 들었다.

얼마나 사치스럽고 소모적인 벌인가 경악하며 책장을 넘겼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 같은데.

정작 자신이 그런 벌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너는 네 아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구나.”

“아아.”

이안이 던진 말은 뜻밖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니.

그 말인 즉, 이안이 그녀를 먹이려 한 것은 그녀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는 뜻이었다.

미아는 그제야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충격 받기만 했지, 정작 미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자신의 배 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좋든 싫든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던 시중을 불러 먹을 것을 내오라 일렀다.

대신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비스킷과 빵, 부드러운 수프 위주로 챙길 것을 섬세하게 지시했다.

시중이 주방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본 이안이 방의 문을 닫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

“……네.”

주어가 빠져 있어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카일렌과 올리비아였다.

둘은 지금쯤 달브에 도착했을 터였다.

황궁으로 곧장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편지를 쓰도록 해주겠다.”

“편지요?”

이안은 선심 쓰듯 제 손가락 사이를 교차시켜 포개며 말했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림자 진 뼈마디가 묘하게도 아름다웠다.

미아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가? 네가 무사하다는 것을.”

가족. 미아는 편지를 받는 대상이 가족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사고의 흐름을 좇을 수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가 이렇게 사려 깊은 말을 뱉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카일렌과 올리비아가 도착했을 거라는 것도 단순히 그녀의 속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이리라 짐작했다.

생각이 그녀의 가족으로까지 미쳤을 줄이야.

미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

그들이 보고 싶었다.

특히 아이를 가진 지금, 이상하게도 미아는 어머니가 그렇게 그리웠다.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카일렌이 올리비아와 함께 무사히 달브 황국에 도착했다면, 누구든 알 터였다.

카일렌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그 상황에서 미아가 편지를 보낸 게 알려지면 가족들은 위험에 처할지도 몰랐다.

카일렌이 가지고 있는 자리를 탐하는 이들이 한둘도 아닐 텐데 말이다.

달브는 소란스러워질 터였고, 그 소란의 한 가운데에 돌아오지 않은 미아가 있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편지는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답답할 정도로 멍청하군.”

이안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의 날 선 비난이 어색했다.

그런 말을 자신에게 뱉은 이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이안은 상처받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대만 생각해도 되지 않나? 어차피, 남들은 다 그대를 버렸다.”

“예?”

“네가 지은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고 미련하게 눈치를 살피고 있단 말이다.”

연거푸 이어지는 원색적인 비난에 미아의 마음이 조금 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는가.

“저는 남편이 져버린 아내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고개를 빳빳이 들겠어요.”

“그래, 확실히.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은 너의 죄지.”

뭐라고?

미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황태자비로 간택 받을 때, 카일렌은 달브에서 최고의 미남으로 칭송받는 남자 중 하나였다.

비록 형들의 위세가 너무 높아 나약한 황자의 이미지를 벗기는 어려웠으나, 황국 내 내로라 하는 귀족 영애들이 모두 혼인하려 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미아가 결혼하게 된 건 오빠의 입김 덕이 컸지만, 내심 그녀 역시 카일렌과의 혼인을 기대했다.

그 어린 날의 동경과 염원이 산산이 조각날 줄은 몰랐다.

그걸 모른 건 내 탓이 아니야.

미아의 눈길에 담긴 원망을 무시하듯 이안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그 신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문이 열리고 따뜻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그 눈빛 하나는 아주 좋군. 그 살기로 저기 있는 음식들을 먹는 게 좋겠다.”

“먹고 싶지 않아요. 배가 불러요.”

이건 미아의 소박한 반항이었다.

물론 금방 우유를 마신지라,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님을 기억해라.”

“…….”

“내가 너를 살려두는 것은 배 속에 든 네 아이 때문이다.”

티끌처럼 남아있던 식욕도 사라지게 하는 화법이었다.

미아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뱉은 이안이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스푼을 쥐여주었다.

“난 두 번씩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미 말했을 텐데.”

“…….”

“네가 먹지 않는다면, 누가 벌을 받게 될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벌을 준다고? 누구를, 왜.

이안의 논리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터무니가 없었다.

굳이 벌을 줘야 한다면 이안의 명을 어기고 밥을 먹기를 거부하는 미아를 벌줘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벌을 받게 될 건 아마 그녀가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지 못한 주방의 시중들일 터였다.

미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전처럼 기름지고 냄새나는 음식들 대신, 가벼운 음식들만 놓여있었다.

신경 써준 건가?

이안을 흘깃 보니, 그는 그녀가 먹기 전까지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는 듯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미아가 하는 수 없이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입에 가져갔다.

‘어? 뭐야.’

전처럼 맛이 없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하고 고소한 것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달브에서 먹던 것과 은근히 맛이 비슷한 것이, 그리웠던 맛인 것 같기도 했다.

“입에 맞는 모양이군.”

미아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본 이안이 말했다.

어쩐지 창피한 기분이 들었지만, 미아는 아이를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미아의 아이다.

미아가 돌보지 않으면, 이 아이는 무럭무럭 자랄 기회조차 박탈당할 터였다.

이안은 무심한 척, 수프를 연이어 먹는 미아를 힐긋 쳐다보았다.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것이 아까보다는 기분이 누그러진 듯했다.

추운 방에 있을 때는 항상 보랏빛이던 입술도 지금은 붉은 자두빛이 되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거라.”

“예, 예?”

미아가 당황한 듯 수프를 꿀떡 삼키며 되물었다.

여기서 지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여기는 자기 침실이잖아.

게다가 침대도 하나고, 따로 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싫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여기서 지내면 이안 경께서는 어디서…….”

“내가 내 침실 말고 달리 지낼 곳이 있는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그러면 여기서 같이 지내시자는 말씀이세요?”

“그래.”

이안의 답은 태연했다.

미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꼭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 지금 진심인가?

“침대는 하나뿐인데요.”

“하나가 더 필요한가. 이제 곧 부부의 연을 맺게 될 우리인데.”

“이안 경.”

“왜 부르지.”

“진심…… 아니시죠?”

“진심이 아닐 이유가 있나.”

점입가경이었다.

혼인까지 언급하는 이안의 모습에 당황할 대로 당황한 미아가 입을 벌린 채 머뭇거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하는 것이나, 미아의 목숨이 자기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겉으로 보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챙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은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이 살아오던 사이였다.

그런 둘이 갑자기 아이가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부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혹시 오해 중인가?

미아네 집안이 재력가라든지, 아이가를 일으킬 정도의 세력가라고?

하지만 가족에게 편지를 쓰겠냐 묻는 거 외에는 그녀의 가족에도 별 관심을 갖지 않은 그였다.

아래로 놓인 스푼을 식사가 끝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이안이 시중에게 눈짓했다.

음식을 하나씩 거둬가는 시중을 가만히 보고 있던 미아가 입을 열었다.

“저를 놀리시는 거죠?”

“이게 농담으로 들리는가?”

이안은 음식을 거두던 시중에게 물었다.

엄중한 이안의 눈빛에 시중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시중은 공포를 겨우 억누른 채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미아는 앞으로 말을 하기 전 근처에 대신 벌 받을 다른 이가 있는지 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곳에 화풀이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곤욕이었다.

“……어떻게 하면 제 방으로 돌려 보내주실 거예요.”

“여기에 네 방이라는 게 있던가? 이 성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이다.”

“…….”

“치사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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