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구미가 당겨
이 상황에서 동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안이 유일했다.
대체 이안은 언제 알았던가, 미아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미아를 어쩔 셈이지?”
“내가 어쩌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
카일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미아는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아이를 가졌다면, 이 배 속에 아이가 있다면.
그건…… 이안의 아이가 아니라 카일렌의 아이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일렌의 아이라면 벌써 가진 지가 한 달이 넘었다는 뜻인데……, 왜 몰랐을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왜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이라고 하는 것일까.
“미아,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미아!”
카일렌이 미아를 불렀다.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에요. 이안과 아이를 가졌을 리 없잖아요.’
미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곧장 이안이 앞을 막아섰다.
여기서 미아가 사실을 고백하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상황도 없었다.
“아내를 버리고 간 사내가 말이 많군. 내 아내를 가진 것으로는 충분치 않던가.”
“오해입니다, 나는.”
“오해요?”
뒤에서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속상한 듯 되물었다.
올리비아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거짓 같았다.
물론 무사히 달브로 넘어가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이안을 보고 싶었다.
이안이 저를 완전히 잊었는지, 아니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의 아내를 새삼 그리워라도 하는지.
알고 싶었다.
“…….”
폐위된 황제인 이안을 대신해, 카일렌은 자신을 황후로 만들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좀 밍숭맹숭한 사람이어도 카일렌을 택했다.
만약 이안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볼 수 있었으련만.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저 빌어먹을, 미아 비잘린의 등장 때문에.
“올리비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는 지금 적국 황태자비가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 말씀하신 겁니까?”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가 그렇게 아이를 갖자고 애원할 때는 듣지도 않으시더니?”
“네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새삼스레 억울하기라도 한 건가? 다른 사내의 손을 잡고 와 살려달라고 비는 주제에 말이다.”
“…….”
“둘 다 꼴 보기 싫으니 당장 여기서 나가라. 문은 열어주겠다.”
“……미아.”
“어서!”
이안의 호령이 떨어졌다.
미아는 끈질기게 따라오는 카일렌의 눈길을 애써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왜 이 미아가 가진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지금 카일렌이 여기 온 것은 올리비아와 함께 달브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카일렌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한들, 카일렌과 달브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을 외면하는 미아를 바라보던 카일렌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올리비아가 그런 카일렌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후문으로 향했다.
카일렌은 올리비아를 따라가면서도, 못내 미아가 눈에 밟히는지 미아를 돌아보았다.
미아는 고개를 수그렸다.
배에 손을 얹어보았으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왜 얘기하지 않았지?”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가 멍한 눈빛으로 이안을 보았다.
그녀가 마주하기엔 너무 버거운 진실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카일렌이 다른 여자와 함께 황국으로 돌아간다는 것.
황국이 너무 버거워서, 카일렌에게 황태자의 자리가 너무 무거워서 도망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내 아이가 아닌 것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요?”
“무엇을.”
“제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요. 저도 몰랐는데.”
“쓰러진 너를 데려다 의사에게 보였다.”
“그런데도 저에게 독이 든 차를 권하신 거예요?”
미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사실 미아가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이안이 아니었다.
미아는 카일렌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다른 선택지도 주었다, 나는 분명히.”
“당치 않은 말이에요.”
“당치 않아? 무엇이. 그런 무른 마음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따라가지 그래?”
이안이 차가운 얼굴로 미아를 마주했다.
이안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도 이안이었다.
카일렌의 앞에서 미아가 이안의 아이를 가졌다 말하지를 않나, 미아더러 ‘내 여자’라고 하지를 않나.
물론 외도를 한 것은 카일렌이 먼저였으나, 미아는 카일렌 앞에서 항상 떳떳하고 싶었다.
“…….”
미아는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지금 당장 카일렌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 머무를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아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결국 모두에게 우스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한걸음, 한걸음.
미아는 무거운 걸음을 조금씩 떼내어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뱉더니 걸음을 옮겨 미아의 팔을 쥐었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미아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아, 아파요.”
미아가 이안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내려 몸을 뒤챘다.
이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면서도 손에서 힘을 풀었다.
곧이어 미아의 침실에 도착한 이안은 문을 열고 미아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문을 닫아버렸다.
“넌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문틈 사이로 이안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미아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 마음 대로요.”
“나가려거든, 그 아이를 주고 가라.”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미아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이 아이를 내어두고 가라니, 그건 절대 당치 않은 말이었다.
이안은 문 너머로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치는 미아를 달래듯 낮게 속삭였다.
“그대는 지금 정신이 나간 것 같군. 정신을 차리는 데에 좋은 차를 들라 할 테니, 그 방에 틀어막혀 ‘생각’이라는 걸 해보아라. 지금 그대를 거둬줄 수 있는 게 누구인지. 네 목숨줄을 쥔 것이 누구인지.”
이안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미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분하게도, 이안의 말이 옳았다.
미아를 거둬준 것도, 이 아이를 살게 해준 것도 모두 이안이었다.
독이 든 차를 권했지만, 마시려는 순간 이안은 차를 빼앗지 않았는가.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아이를 가졌다니…….”
미아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몸을 구부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세상에 덩그러니 내버려진 느낌이었다.
외딴 섬에 홀로, 그러나 또 완전한 홀로는 아니라서.
이제 미아는 죽을 수도 없었다.
❀ ❀ ❀
“저……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미아 아가씨께서 여전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예, 조, 조금도요.”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읽고 있던 서책을 내려둔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애니가 다급히 몸을 숙였다.
이안에게서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사실 불호령이라면 다행이었다, 목만 베이지 않는다면.
“쓸만한 요리사가 없는 모양이군.”
“…….”
그게 정말 요리사 탓일까.
애니는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이안이 낮은 신음을 뱉더니 걸음을 옮겼다.
애니는 얼결에 이안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안이 향한 곳은 미아의 방 앞이었다.
미아의 방 앞에는 미아가 먹지 않고 내어둬서 다 식어버린 식사가 놓여있었다.
이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손도 대지 않았군.
나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에는 잘못이 없어 보였다.
이안도 같은 것을 먹었으니, 맛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먹을 의지가 없었던 건가?
이안은 음식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하던 미아를 떠올렸다.
“차는 마시더냐?”
“몇 모금 마시긴 하셨어요.”
의심 없이 용케도 차를 들이켰군.
애니가 머뭇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저, 잠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고. 눈은 항상 부어 계세요. 이러다가 잘못 되실까봐 너무 걱정돼요.”
“……저번처럼 우유를 데워 꿀을 타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애니는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안은 문으로 다가섰다.
그냥 문을 열까 하다가 손을 들어 두 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방금 전까지 웅크리고 있었던 듯 어쩐지 피로해 보이는 미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안 경!”
놀란 미아가 두 걸음 뒤로 무르자 이안이 방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벽난로는 타오르고 있었으나, 방 안에 싸한 기운이 맴도는 것이 찬 바람이 새어드는 듯했다.
이안의 시선이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향했다.
“춥지도 않은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애니의 말처럼, 물끄러미 바라본 미아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잠을 못 잔 듯 핼쑥해진 얼굴에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몸을 차게 하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 달브 황국은 이리 추운 겨울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냥 방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나가게 해줄 테니 문은 닫도록 하지.”
이안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아는 더는 그를 막아서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
창가로 다가간 이안이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미아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이안을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던 미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건가?”
“……아닙니다. 혹시 애니를 벌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 아이가 죄라도 지었던가.”
“아니에요! 애니는 저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어요.”
“전혀 보살핌 받은 얼굴이 아닌데.”
“그건 그냥, 앞으로의 일이 막막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안이 자신을 왜 받아준 것인지, 앞으로 미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 아이는 또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든 것이 뿌옇고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미아가 발을 딛고 선 이 현실이, 미아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미아 비잘린.”
“네.”
“너는 내 아내를 빼앗고 나를 폐위시킨 황태자의 아내다, 그렇지.”
“……네.”
“게다가 그 사내의 아이까지 갖고 있지.”
“하시려는 말씀이,”
“나에겐 구미가 당겨.”
“……!”
이안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미소였다.
구미가 당긴다는 건, 설마 복수라도 생각하는 건가?
너무 순순히 올리비아와 카일렌을 보내준다는 생각은 했는데.
어째서 자신을 대신 붙잡은 거지.
미아가 몸을 뒤로 무르자,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내 곁에서 아이를 낳아.”
“……이안 경.”
“그리고 그 아이를 내게 줘.”
“아이는, 아이만큼은 무사히 지내게 해주세요. 내키지 않으신다면 달브 황국으로 보내도 되니까, 그러니까…….”
순식간에 이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안이 몸을 일으켜 미아의 턱을 쥐어 당겼다.
미아가 까치발을 든 채 그와 눈을 맞췄다.
“지금 뭐라고 했지?”
“카일렌은 적어도 자신의 아이는 외면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는 살아서 이 성을 떠날 수 없어.”
이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