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화. 새 신부가 될 이의 이름 (6/95)

06화. 새 신부가 될 이의 이름



 

“……이안 경?”

“지금 들어보니 경이라는 호칭은 부부 사이에 좀 딱딱하군. 다른 것을 찾는 편이 좋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잘못 들은 걸까.

분명히 미아 비잘린으로 들렸는데.

미아는 혼란스러웠다.

제 앞에 놓인 편지지를 들여다보던 미아는 결국 펜을 내려놓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요.”

“무엇이라 들었지?”

“그게…….”

미아 비잘린으로 들었습니다.

라고 바른대로 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아내로 칭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들은 대로 말했다간 틀림없이 ‘제정신이 아니구나’라며 비웃을 것이었다.

“무엇이라 들었냐 물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씩 하는 취미는 없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잘못 들은 내용을 다시 말해줄 법도 했는데, 굳이 다시 묻는 것을 보니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미아의 입술이 몇 번이나 망설임으로 달싹였다.

갈등으로 속이 요동쳤다.

정말로 들은 내용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억지로 지어서라도 다른 이름을 말해야 할지 고뇌 되었다.

거짓을 말한다면, 이안은 어떻게 생각할까?

잘못 들었으니 대충 아무거나 지어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안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피할 도리가 없었다.

무슨 대답이라도 금방 내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이제껏 용케 그의 앞에서 살아남은 그녀였지만 정말 수가 틀리면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미아, 가진 것을 내어주더라도 살아야 할 때는 살아야 하는 법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었지.

가진 것도 없지만, 만약 지금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자존심이라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굴욕적이더라도 진실을 내놓는 편이 나았다.

이윽고 미아의 입이 열렸다.

“……미아 비잘린으로 들었습니다.”

이안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매우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다시 묻기를 잘했다.

흥미가 돋으면 괴롭혀 보고 싶은 성미가 도는 것이 이안의 나쁜 취향이라면 취향이었다.

평소라면 저런 모습을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을 텐데.

제 앞에 서면 누구나 말을 웅얼거리고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자연히 그런 모습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이상하게 그녀의 이런 모습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더욱 집요하고 짓궂게 괴롭히고 싶다는 느낌이 들 만큼.

“미아 비잘린으로 들었다라.”

“죄송해요.”

이런 반응을 보일까봐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인데.

미아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침묵이 길었다.

꼭 그 시간이 이안이 자신을 비웃는 시간처럼 느껴져서, 미아는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싶었다.

잘못 인지한 자신에게 설명이라도 해주기를.

그러나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쓰지 않는 거지?”

“네?”

“미아 비잘린으로, 라고 적어라.”

“방금 잘못 들었다고…….”

“옳게 들었다.”

미아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반면 이안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기까지 했다.

똑.

오랫동안 쓰지 않아 잉크가 고인 펜촉에서 잉크가 떨어졌다.

미아는 종이에 잉크가 번질까 다급히 손으로 닦아냈다.

이안이 그런 미아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포개 쥐었다.

마치 뒤에서 끌어안은 듯한 자세가 되었다.

비에 젖은 숲을 연상케 하는 그의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미아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지금 이 자세는.”

“그대가 고작 몇 글자를 쓰는데 종일이 걸릴 것 같아 내 친히 도와주려고 하는데.”

가족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이런 식으로 접촉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자동으로 숨이 멎었다.

숨을 쉬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잘못하면 정말로 살과 살이 온통 맞닿아 버릴까 봐.

그녀의 동요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 듯, 그는 태연하게 글씨를 이어 썼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 가지 틀린 게 있군.”

“……틀린 거요?”

“그대가 잘못 들었다 오해한 것도 이상할 것 없지.”

미아는 그제야 몸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여전히 살이 닿은 손등의 감촉과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품이 신경 쓰였으나 편지에 적힐 이름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누굴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 으스스한 폭군과 혼인을 할 사람이.

‘미아 다르뷔로’

미아라니, 미아가 잘못 들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름이 똑같아 성을 틀린 것이었구나.

잠깐…….

무심코 생각하던 미아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이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다르뷔는 이안의 성씨였다.

그 뜻은…….

“이제 마무리로 나의 이름을 적어라.”

“저기, 미아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이 성에 또 있나요?”

특별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이름도 아니었다.

우연히 미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안이 말하고 있는 ‘미아 다르뷔’란 이안과 혼인하면 미아가 갖게 될 이름이었다.

“또?”

“네. 저 말고.”

“없다.”

“그렇다는 건…….”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결국 달라진 것 없이 도돌이표였다.

다른 이름을 가진 이가 없다면, 그리고 미아가 지금 이해한 상황이 맞다면.

“맞다.”

“……?”

“인내심이 많지 않은 편이라, 언질 주었을 텐데. 또 기다리게 하는 것인가?”

“아, 그게 아니라…….”

미아는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이안을 돌아보다, 너무 가까운 그의 모습에 놀라 다시 몸을 틀었다.

별 수 없었다.

미아는 머뭇거리며 ‘이안 다르뷔가’ 라고 글씨를 적어 넣었다.

이안은 손을 움직이는 미아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제 서명을 적어 넣었다.

보기와 달리 아주 반듯하고 힘 있는 필체였다.

글씨의 아름다움 따위 미아에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미아는 당황한 상태였으나.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무슨 생각으로 이리 행동하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물을 자유조차 없는 듯했다.

“글을 쓰는 사람치고, 그대는 악필이군.”

“예쁘게 쓰려고 힘을 주다 보니까……! 이상하게 쓰였어요. 죄송합니다.”

미아는 내심 시무룩해졌다.

잘 쓰는 글씨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쓰는 글씨라고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 말에 감히 토를 다는 건가?”

이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아도 자신의 글씨가 이안의 것에 비하면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씨를 누구에게 보여줄 일이 없었으니 글씨가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미아는 머뭇거렸다.

그 사이,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답이 없군.”

“……물론, 이안 경의 것만은 못하지만 악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집 한 번 세군.”

미아는 자신이 뱉은 말에 자신이 놀랐다.

한 번도 누군가의 말을 이렇게 부정해본 적이 없던 미아였다.

그런데 이안의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악필이 아니라 항명하였다.

“……네.”

당장이라도 죽이려 들면 어떡하지?

자신의 말을 어기는 이들은 다 죽여버린다던데.

하지만, 이미 미아는 한 번 죽음을 결심했던 사람이었다.

아이가에 지내는 동안 이안의 말을 다 수용한다면, 나중에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절대로 ‘악필’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는 아니고.

“그래, 악필은 아닌 것으로 하지. 다만 명필도 아니다.”

어쩐 일인지 이안은 미아의 말을 수용해주었다.

미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투명할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치 투명한 물방울처럼 전부 다 드러난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편지를 쓰는 재주는 있군.”

“그럼 이제 저 여기서 지낼 수 있는 거예요?”

“글쎄.”

이안은 고민하는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물러설 길이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이안이 폭군이라지만, 저 냉철한 얼굴에 담긴 속을 알 수 없다지만.

황량하고 추운 아이가의 바깥 땅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안이 완전히 무섭지는 않았다.

진짜로 무서운 건, 돌아올 곳도 없이 버려진 지금 이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편지를 쓸 일이 많지 않다.”

“이제 많이 쓰시면 되죠.”

“폐위된 황제의 편지를 반길 이가 있는가?”

“……그럼, 저와 주고받아요.”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이안은 미아를 조소하듯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무리수였나…….

미아가 속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저 자신을 원망하던 그때.

그의 고저 없이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여기가 마음에 드는가?”

“네?”

“이 방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그건…….”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 싫을 리가 있나.

고풍스러운 책상과 고급스러운 의자, 따뜻한 불빛을 뿜어내는 벽난로.

어느 것 하나 눈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럼 여기 있어.”

“어디 가시게요?”

“마치 그걸 바라는 듯하군.”

“…….”

“책을 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나는 용무가 있으니.”

이안은 속내를 들킨 듯 당황한 미아를 둔 채 서재를 빠져나갔다.

미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중히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책의 종류는 아주 다양했다.

이안의 취향일까, 아니면 이안보다 앞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주인의 취향일까.

미아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그렸다.

‘사랑의 덫’

제목이 오묘한 책이었다. 소설인 것 같았다.

소설은 미아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였다.

지루한 마법서나 역사서와는 달리 그곳엔 정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미아도 언젠가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이야기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당연히 황태자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를 위해서 이야기를 수도 없이 지어주고 싶다고.

그래서 그 아이가 용감하고 씩씩하고 행복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지.

투욱.

미아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며 겨우 살아남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삶이었다.

“……따뜻해.”

미아는 이안이 피워주고 나간 불을 바라보았다.

활활 잘만 타오르는 불을 보니 괜히 노곤해져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놓여서.

그녀는 이내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하지만 미아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