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새 신부를 맞이할 생각이다
“데운 우유다.”
“…….”
“꿀이라도 타라 이를까.”
꿀?
단 것을 좋아하는 미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 변호를 눈치챈 이안이 뒤에서 명을 기다리던 시중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시중은 얼른 꿀을 가져와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 꿀을 풀었다.
이안은 직접 찻잔을 가져와 미아의 앞에 놓았다.
그녀의 배에서 작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당황한 미아가 황급히 배를 움켜쥐었다.
이안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먹어라.”
“……저, 이안 경은.”
“나는 되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 같은 취미는 없다.”
단 것을 좋아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미아는 슬쩍 억울해졌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기껏 차린 상을 자신 때문에 무르게 했다는 게 신경이 쓰여서.
그녀의 손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먹기 싫은 것이냐.”
“그게 아니라…….”
“독이라도 탔을까 두려우냐?”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성가시게 구는군.”
이안은 찻잔을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미처 미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우유를 제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미아의 고개를 끌었다.
“읍!”
입술끼리 맞닿자 당황한 미아가 신음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우유가 흘러들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달큰한 우유의 맛이 그녀의 혀끝을 물들였다.
미아가 우유를 삼키는 것을 보고서야 입술을 떨어뜨린 이안이 우유가 묻은 제 입술을 손으로 닦아냈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네가 믿지 못하니, 내가 먼저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
그게 아니라.
미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안과 입을 맞추다니.
그것도 고작 우유 때문에!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본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미아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찻잔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온기가 전해졌다.
빤히 쳐다보면 먹기 좀 창피한데, 이렇게 보지 않으니까 그나마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아는 조심스럽게 우유를 몇 모금 들이켰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우유에, 안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저 아이에게 말해라.”
이안이 손을 들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중을 가리켰다.
그 시중은 전에 미아의 방에 들어와 찻잔을 치웠던 그 아이였다.
미아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죠?”
“이름?”
이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름을 모르세요?”
“내가 왜 한낱 시녀 따위의 이름을 알아야 하지?”
“이안 경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잖아요!”
“우습군. 나를 위해 애쓴다니.”
이안의 말에 미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이라지만, 시중이 보는 앞에서 저렇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미아가 자신의 대답을 마뜩잖아하는 것을 느낀 이안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뱉고 이어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저, 저요? 애니입니다.”
“애니! 고마워요. 우유 맛있어요.”
“우유를 대령하라 이른 것은 나다.”
이안이 발끈하며 말했다.
미아는 그런 그에게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네, 네. 알아요! 이안 경께서 저를 배려해주셨다는 것을.”
“안다니 다행이군. 그럼 그 넓은 아량에 부응하겠지.”
이안은 미아가 찻잔을 다 비울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하는 수 없이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찻잔을 홀짝이며 느릿느릿 비워가는 미아를 보던 이안이 애니에게 손짓했다.
애니가 급하게 뛰어왔다.
“꿀을 넣은 다른 것이 성 안에 있느냐?”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전 이것으로 배가 불러요. 이상하게 식욕이 별로 없어서.”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하던 미아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하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떠났는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입맛이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럼 되었다. 물러가거라.”
“네, 네!”
애니는 미아가 비운 찻잔을 가지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타닥타닥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이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그 눈빛이 부담스럽다 느끼며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손이 많이 가는군.”
“예?”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의 입술을 훑었다.
그의 손끝에 흰 우유가 묻은 것이 보였다.
“아아, 죄송합니다.”
이안은 입술을 훑은 엄지를 제 입술 새로 가져갔다.
붉은 혀가 입술에서 나와 엄지를 핥았다.
이안의 혀끝에 단맛이 감돌았다.
“이제 어쩔 셈이지?”
“네?”
“잊진 않았겠지. 네 쓸모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
“아아…….”
미아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푹 숙인 시중이 편지 더미를 들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펴,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두고 가거라.”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편지 더미를 손에 움켜쥔 이안이 벽난로로 다가갔다.
타오르는 벽난로 속으로 미련 없이 편지 더미를 집어 던지려는 그때, 미아의 손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이안이 손목을 꺾었다.
“아!”
미아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은 이안이 뭐 하냐는 눈길로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편지를 다급히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안 돼!”
“뭐 하는 짓이지.”
이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미아는 멈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편지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편지들을 왜 버려요!”
“이건 내 편지다. 이 편지를 태우든, 갈가리 찢어버리든 그건 내 선택이야.”
“그치만!”
이안은 미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봉투에도 담기지 않은 투박한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이건…….
이안이 손을 뻗었다.
미아의 손에 들려있던 편지 중 하나를 빼앗듯 가져가자, 나머지 편지들이 우루루 떨어졌다.
미아는 차마 그것들을 줍지 못했다.
그의 굳은 얼굴 때문이었다.
‘엄마가.’
이안의 반응을 본 미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안과 이안의 어머니 사이를 미아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태울 편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그 편지를 잠시 응시하는가 싶더니 이내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자, 잠시만!”
화르륵.
대든 보람도 없이 편지는 금방 타올라 사라져 버렸다.
허망하게 벽난로를 바라보는 미아를 본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웃기는군.”
뭐가 자꾸 웃기다는 걸까.
미아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의 어머니는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
지금 황제의 어머니이자, 이안의 어머니였다.
아들이 차고 황량한 땅에 있는 것이 걱정이 되셨을까.
혹시, 황제가 아들을 죽이기 위해 조각상을 보낸 것을 알고 조심하라 연락한 것은 아닐까.
미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 이안이 미아의 손목을 쥐어 끌었다.
미아는 이안에게 다시금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따라오라는 말이면 되는데, 말을 하는 법이 없군.
불평할 용기는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안이 미아를 이끈 곳은 그의 서재였다.
문을 열자마자 올라오는 한기에 미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추운 성 안에서 이안은 고작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추위를 타지 않는 건가?
바트르 황국이 달브 황국보다는 춥다고 들었지만.
담요와도 같은 망토를 둘러도 이렇게 추운데.
“불을 붙일 테니, 기다려라.”
이안의 말에 미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대들었으니, 오늘은 그만 대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조용해진 그녀를 본 이안이 성냥을 그어 불씨를 일으켰다.
곧 난로에 불이 붙었다.
미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지 쌓인 책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꽂혀 있는 듯했다.
책상엔 의자가 두 개,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이안이 두 의자 중 한 의자에 앉더니 미아에게 눈짓했다.
미아는 하는 수 없이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보아하니 글재주가 있더군.”
“……그냥, 혼자 쓰는 수준이에요. 아직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어요.”
“그렇다면 그대의 필체도 알아보는 자가 없나?”
“없어요. 아……!”
딱 한 번, 글을 쓰던 것을 카일렌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글을 쓰다 존 탓인데, 카일렌은 그 후로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미아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면 미아가 쓴 것이라 생각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니, 미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안은 미아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 나만 안다니, 오히려 좋군.”
그리고 종이와 펜, 잉크를 미아의 앞에 내밀었다.
미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안을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선물을 보냈는데, 답례를 해야지.”
“답례요?”
“잘 받았다는 의미로 서신을 전하려 한다.”
“아…….”
그렇지만, 서신을 전한다는 건 내가 멀쩡히 살아있음을 알린다는 것인데.
이안이 그래도 되는 걸까?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다면 위험에 지는 것은 아닐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는 몰라도, 미아는 이안이 걱정스러웠다.
대놓고 독침을 꽂아놓다니, 그건 죽이겠다는 의도를 다분히 담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 의도를 숨기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글재주가 없으니…….”
설마, 아니지?
아니겠지?
미아가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가 대신 서신을 써라.”
“하지만…… 저는 두 분의 관계도 모르고. 또 황제에게 한 번도 편지를 쓴 적은 없어서.”
“쓰지 못하겠다는 건가?”
이안의 눈매가 굳었다.
쓸모, 그래 쓸모를 증명해야 했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야.
미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야 이안은 표정을 풀었다.
미아는 숨을 길게 내뱉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제대로 펜을 잡는 게, 너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시작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친애하는, 아우에게.”
“…….”
황제를 아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은 이안이니까, 이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최대한 예쁘고 기품 있게 써보자.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미아가 글씨를 적어넣었다.
“그다음은 무엇으로 할까.”
이안의 시선이 미아에게 향했다.
미아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동생에게, 자신을 몰아낸 황제에게.
이안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머뭇거리던 미아의 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이 눈을 내리깔고 미아의 펜 끝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의 입꼬리가 경직되는가 싶더니, 이내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불행히도, 보내준 선물을 받지 못했구나.’
어쩌면 미아는 이안의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몰랐다.
마음에 드니, 상을 조금 줄까.
“이어 이렇게 쓰지. 대신, 다른 선물을 받았다. 새 신부를 맞이할 생각이다.”
새신부?
무심코 따라 쓰던 미아가 펜을 멈췄다.
“미아 비잘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