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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나와 밤을 보내거라 (3/95)

03화. 나와 밤을 보내거라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미아가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의 손을 쳐낸 것은 이안이었다.

미아는 너무 놀라서 손등이 얼얼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사이에 데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리석구나. 너를 버린 이를 위해 목숨을 걸다니.”

이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미아조차 고민됐던 것이 사실이다.

배신한 남편을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일.

그것만큼 어리석고 멍청한 일도 없을 테지.

그러나 카일렌은 달브 황국의 황태자다.

누가 뭐라 해도, 달브 황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미아 하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목숨이었다.

목숨에 값이 있고, 무게가 있기 때문에.

미아는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미아를 비웃고 싶은 걸까?

그녀에게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도, 모두 카일렌 때문에 화가 나서일까?

“저도 알아요.”

“……?”

“제가 어리석은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이미 카일렌은 날 떠났는데.”

“그래. 널 떠났다. 그걸 알면서도,”

“하지만 어떡해요! 그 사람은 한 나라의 황태자예요!”

미아의 말끝에 울음이 묻어났다.

어쩌면 그녀와 이안은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미아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이안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막막해졌지만.

이안이 차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우습다고요?”

“당연히 우습지. 그 자식이 황태자이든, 거렁뱅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째서…….”

“배신의 대가는 죽음뿐이니까.”

이안의 나른한 목소리가 미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공포스러운 느낌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곧장 제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안은 일단 미아가 죽는 것을 막았다.

어쩌면, 그는 미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너를 이용할 생각이다.”

“이용?”

“너를 통해 카일렌을 끌어들이고, 카일렌의 목을 네가 보는 앞에서 자르겠다.”

“……!”

미아는 순간 너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안의 소매를 붙들었다.

마치, 이안이 지금 카일렌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과 같이 간절하게.

그는 그런 미아를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내려볼 뿐이었다.

“취소해요.”

“……웃기는군.”

“방금 한 말 제발 취소해주세요.”

“그럼 내가 널 뭘 위해 살려둬야 하지?”

이안이 지그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의 눈동자에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매달린 미아가 비쳤다.

그 모습이 너무나 무방비해서, 마치 떨어뜨리면 그대로 깨져버릴 유리잔과도 같았다.

뭘 위해서? 그래, 뭐를 위해서.

미아는 비록 귀족 영애로 편하게 자랐지만, 사람이 놀고먹을 수만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황궁에서도 항상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니까, 미아는 이안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제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폐하, 아니. 이안 경의 평판을 위해서입니다.”

“평판?”

“네. 평판이요! 저를 살려주신다면, 폭군이라는 오명(汚名)으로 얼룩진 이안 경의 평판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황족으로…….”

이안은 몹시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흔들린 탓에, 소매깃을 쥔 미아의 몸도 흔들렸다.

이안이 그대로 힘을 주어 끌자 미아의 두 손이 그의 가슴팍을 짚었다.

이안이 그녀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간질이는 감촉에 미아의 허벅지에 소름이 돋았다.

“폭군이라는 것은 오명이 아니다.”

“…….”

“나는 실제로 폭군이고, 내 말을 듣지 않는 이는 모조리 죽여왔다.”

“…….”

“그러니 너 하나쯤 죽이는 것도 내겐 어려울 것 없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해도 내가 달리 뭘 할 수 있는데?

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안은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미아의 손등을 잠시 보던 이안이 그대로 그녀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렸다.

훽, 하고 눕자 순간 가운 앞섶이 벌어져 미아가 황급히 옷을 가다듬었다.

“날이 밝으면 생각하도록 하지.”

“날이 밝으면요?”

“사흘, 아니 나흘을 주겠다.”

“…….”

“나흘 동안 증명해라, 너의 쓸모를.”

이안은 그렇게 말한 뒤 문으로 향했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과 함께 흩날렸다.

정말 이대로 가는 건가?

나, 아직 안 죽는 거야?

미아의 시선이 이안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곧 문이 닫혔다.

그제야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미아는 이안이 머물렀던 자리에 남아 있는 향을 맡았다.

차 향이 워낙 강해서 알지 못했는데, 이안에게서는 꼭 젖은 숲과 같은 냄새가 났다.

이리 황량한 땅에서도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새삼 신기해서, 미아가 자신의 상황도 망각하고 있을 때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까 들어왔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깨진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미아는 몸을 일으켜 시녀에게 다가갔다.

“손 조심해요. 제가 할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미아는 자신이 방해하면 괜히 다칠까봐 더 다가가지는 못하고, 한 발 치 떨어진 곳에서 시녀를 보았다.

시녀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시중드는 일을 해온 듯, 아주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깨진 찻잔을 치워냈다.

그만큼 무언가가 깨질 일이 많았나, 생각하면 이안의 성질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아, 그리고 이거…….”

시녀가 미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흰 천 사이에 든 것은 약초였다.

웬 약초? 미아가 의아한 눈으로 시녀를 보니, 시녀가 그녀의 손을 쥐고 직접 손등 위에 약초를 가져다 대었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그제야 미아는 제가 손등을 데인 줄 알았다.

“그럼 편히 주무세요.”

시녀는 후다닥 주위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미아는 시녀에게 고맙단 인사를 건넸다.

“척박한 이곳은 아이가……. 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아이가, 내가 있던 곳과 먼 이곳.

이곳에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미아는 침대에 누워 마름모 모양의 타일로 장식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고단한 몸이 푹신하고 따뜻한 이불에 둘러싸이자 해일과 같은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고는 암전이었다.

❀ ❀ ❀

미아를 깨운 것은 요란한 파열음이었다.

어제와 같이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미아가 황급히 복도로 뛰쳐나가자, 복도를 따라 사방으로 깨어진 석고 조각이 보였다.

조각상이 부서진 건가?

깨진 조각상이 있었을 자리 옆으로 선 이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안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린 사람은 황국에서 보낸 시종 같았다.

아직 어려 보이는 것이, 열여덟은 되었을까.

“……폐하께서, 내게 이것을 보내셨다고.”

“예, 저, 저는 그냥 가져다만 드리면 되는 줄 알고.”

“정녕 몰랐단 말이냐. 이 조각상의 끄트머리에 독침이 꽂혀 있었다는 것을.”

독침?

생각해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바트르 황국에서는 황제의 조각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한 뒤 손을 맞잡아 경외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미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석고상 조각에 꽂힌 바늘이 보였다.

반작거리는 바늘의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검은빛으로 물이 들어있는 것도.

설마 바트르 황국의 황제, 즉 이안의 동생이 이안을 죽이려고 라도 했다는 걸까.

“정말! 정말 몰랐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불쌍한 아이는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미아는 제 사정이 아이보다 나을 바 없음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차게 웃었다.

“모른 것도 죄다.”

이안이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 미아가 아이 앞에 뛰어들었다.

이안의 검날이 번쩍하다, 궤적을 황급히 바꾸었다.

미아의 머리칼이 조금 잘려 허공을 날았다.

“이, 이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지 않습니까!”

“뭐 하는 거지?”

이안의 목소리가 노여움으로 물들었다.

미아는 울음으로 얼굴이 온통 벌게진 아이와 눈을 맞춰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 뒤 이안을 보았다.

사흘, 아니 나흘. 미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 어차피 그날들 안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죽을 목숨이니까.

꽤 기질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던 황후의 시중들을 도와줬던 경험을 살려보기로 했다.

“폐하, 아니 이안 경께서는 이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입니다.”

“뭐?”

“이 아이를 여기서 죽인다면, 그것은 바트르 황국에서 보낸 아이를 죽이는 일이니 황국민들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안은 미아의 말이 우스웠다.

그러나, 넓은 아량으로 한 번 들어주겠다는 듯 계단참에 걸터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그가 지그시 미아를 보았다.

미아는 어쩌면 제 설득이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살려 보낸다면, 바트르 황국의 황제 폐하, 성함이 뭐였더라……. 맞아, 윌리엄 폐하께서 오히려 당황하지 않으실까요? 그럼, 이안 경의 현명함도 보일 수 있고, 무엇보다…… 윌리엄 폐하의 손에 놀아나지 않으시는 거니까요.”

“윌리엄의 손에 놀아난다라…….”

아차, 표현이 너무 과격했나?

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늦게 후회할 때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고 있던 검은색의 블레이저 속에 든 무언가를 꺼냈다.

“친애하는 형에게. 형, 멀리 추운 땅에서 고생하고 있을 형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나를 오래 보지 못하여도, 내가 형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줘. 사랑하는 윌리엄.”

“…….”

“이런 편지와 함께 자신의 조각상을 보내는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윌리엄의 손에 놀아난다고?”

“제, 제가 드린 말씀은 그런 게 아니라.”

이안이 미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미아의 몸을 돌려 제 앞에 세우고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안이 움켜쥔 턱이 아팠다.

미아의 얼굴이 주저앉은 아이를 향했다.

“저 아이는 내 아우가 준 장난감이다.”

“…….”

“처음부터 죽일 거라 생각하고 보낸 아이란 말이다.”

“당치 않아요. 처음부터 죽어도 되는 사람은…….”

“우습군.”

싸늘한 이안의 목소리가 미아의 귓전에 울렸다.

“어젯밤 너는, 네 남편을 대신해 죽으려 했으면서.”

“…….”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그, 그건.”

이안이 미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파란 핏줄이 불거졌다.

미아가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 밤을 보내거라.”

“…….”

“그럼 저 아이를 살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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