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죽거나, 죽이거나, 사랑하거나
‘음식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미아가 이안을 처음 만난 것은, 삼 년 전의 일이었다.
이안은 막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평화 유지 협정을 맺은 달브 황국에 인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식사 자리에 올릴 음식에 손수 꽃과 풀로 장식을 더한 미아는 식사 시간 내내 긴장한 상태였다.
옆에 앉은 카일렌은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미아는 무심코 건너편에 앉은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오만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황위에 오른 사람치고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그 옆에 앉은 황후 올리비아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이안은 거의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보다.
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식사 자리는 성공적으로 끝날 수 없는데.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순간,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미아는 당황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안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위에 올려진 꽃을 포크로 꽂아 입으로 가져갔다.
꽃잎이 두 입술 새로 사라지는 것을, 미아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었다.
그래, 그랬어.
그때 분명 보았어.
그러니까 전쟁 중 적국의 황제에게.
그것도 폐위된 황제에게 나는 잡힌 거구나.
“……이안 폐하?”
미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안은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대답하는 그녀에 조소했다.
그리고 미아를 붙잡은 손을 풀어주었다.
“이제야 알아보는군.”
“…….”
차라리 그 눈발 속에서 죽는 것이 나았을까?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전쟁을 일으켰던 이안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이 커졌고, 끝내 반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안의 동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죽임을 당하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 척박한 땅으로 보내졌을 줄이야.
“왜 말이 없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아는 그와 마주했던 시선을 돌렸다.
사고가 마비된 것만 같았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고.
그 목숨을 구해준 이는 다름 아닌 적국의 폭군이다.
이런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리 어린 시절 글을 쓰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그녀였다지만, 이런 상황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저…… 이안 폐하.”
“나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높은 목소리가 아닌데도 그랬다.
가슴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시린 목소리에 미아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안 죽었으니까, 살았으니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맞았다.
“길을 잃은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다?”
“…….”
이안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붉은색의 머리칼이 몸을 감싸고 있는 미아는, 예쁘장하지도 않았다.
시장에서 보았다면, 어느 평범한 집에서 나고 자란 평민이라고 생각될 만큼.
키도 크지 않고, 몸매도 날씬하지 않았다.
이안이 궁에서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따져보자면 못났다.
허나, 이안은 알았다.
미아가 이 순간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그럼 감사함의 표시로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지?”
미아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갔다.
지금 그녀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있던 다이어리조차, 불길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미아는 맨손에, 맨몸이었다.
“여기서…… 여기서 일을 하겠습니다.”
“일?”
“무슨 일이든 할게요.”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다른 수가 없었다.
이안은 그 대답이 재밌다는 듯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아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몸을 숙였다.
미아는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안의 숨결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미아는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든?”
“……요, 요리도, 청소도 할 줄 압니다. 절대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게 그런 일이 아니라면.”
그런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
미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이안은 미아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손을 내려, 미아의 목덜미를 움켜쥔 이안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미아가 당황한 듯 몸을 굳히며 그의 어깨를 쥐었다.
이안이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건방지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서도, 미아는 손을 놓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이상 가까워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이미 미아는 결혼을 했고, 정조가 있다.
비록 남편인 카일렌이 그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도.
아니, 잠깐만.
카일렌과 밀애를 나누던 것은, 올리비아.
올리비아는…… 이안의 아내가 아닌가.
“내 앞에서 감히 다른 생각을 하는군.”
이안이 미아를 보았다.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안은 그 사실을 알까? 둘이 밀애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만약 이안이 폐위되어 이곳으로 보내졌다면 황후였던 올리비아 역시 이곳에 있어야 마땅했다.
“저, 폐하. 아니, 이안…….”
“경.”
“이안 경.”
“그래, 말해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러시면 황후 폐하, 아니 그러니까. 전 황후 폐하께서 서운해하실 겁니다.”
미아는 돌려 묻기를 선택했다.
차마 용기 있게 당신의 아내가 내 남편과 밀애를 즐기고 있음을 아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알았더라면 미아를 살려두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황후?”
“예. 그때 같이 오셨잖습니까.”
이안은 미아를 일으켰다.
미아가 그의 손길에 따라 몸을 세우자, 그대로 이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향했다.
그리고 곧장 당겨 안았다.
헙, 하는 소리와 함께 미아가 숨을 들이켰다.
이안의 몸과 미아의 몸이 바짝 닿았다.
“기억나지 않는군.”
“……네? 그때, 달브 황국으로 찾아오셨을 때 식사 자리에서.”
“아니. 황후 말이다.”
황후가 기억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에게 황후가 있던가? 아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군.”
‘있었어?’
그건 과거형이잖아.
그럼 지금은 같이 지내지 않는다는 건가?
하긴, 만약 지금도 이안과 올리비아가 함께라면 올리비아는 카일렌과 함께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카일렌은 미아의 남편이었다.
“죽였다.”
뭐?
미아의 눈이 커졌다.
미아가 당황한 듯 몸을 떨자 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투욱 건드렸다가 놓았다.
“됐다.”
무엇이 된 걸까?
미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안의 행동에 당황해 주춤했다.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아에게 일어나 보라는 듯 눈짓했다.
미아는 제가 입은 옷이 신경 쓰였으나,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이안이 벽난로를 꺼버렸다.
활활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이 꺼지자, 사방이 어둠이었다.
달빛에 의존한 시야가 어두웠다.
미아가 더듬더듬 걸어가 이안의 앞에 섰다.
“왜 돌아가지 않지?”
“어디로요?”
“죽지 않았으니, 너는 나에게 빌어야 했다. 달브 황국으로 보내 달라고. 네가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말이다.”
“…….”
아아.
이안이 이상하게 행동한 이유는 그것이었나.
확실히 미아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돌아갈 생각을 전혀 안 했던 탓이다.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였던 미아가, 아까 그 눈발 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탓일까.
아니면 카일렌의 배신 때문일까.
돌아가서도 남편을 잃은 여인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너는 빌지 않았지.”
“……네.”
“살려달라고 울부짖지도 않았다. 내 앞에 선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것이던데.”
그야, 이미 죽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미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량한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두 나의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지.”
“당치 않습니다.”
“어째서? 나는 폐위된 폭군이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그대조차.”
“제가요?”
“그대의 남편을 죽인 전쟁을 일으킨 것이 나잖아.”
이안이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미아를 보았다.
맞아, 이안은 그렇게 알고 있겠지!
미아는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만약 카일렌이 정말로 죽었더라면, 그녀는 이안에게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든 살려달라 빌든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말한 꼴이라니.
“죽지 않았지?”
“예, 예?”
“그대의 남편, 카일렌 비잘린.”
“…….”
“카일렌 비잘린이 죽었을 리 없지.”
“어찌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미아는 거짓말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진실을 말하는 편이 더 쉬웠으니까.
투명하게 변하는 미아의 얼굴이 이안의 구미를 당겼다.
거짓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안기는 이들만 지천에 깔렸던 터다.
“내 아내, 올리비아를 밀정으로 삼았으니까.”
밀정?
밀정이라면, 그동안 쭉 둘이서 내통해왔다는 건가?
“달브 황국 따위에 질 이유가 없었다. 올리비아만 아니었다면.”
“둘이 그럼 오랜 시간 내통했다는 건가요?”
순간, 미아는 감춰왔던 마음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카일렌이 언제부터 그랬는지, 얼마나 오래 그랬는지.
처음부터 올리비아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밀정으로 내통하다 마음이 생긴 것인지.
물을수록 비참해질 뿐인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역시.”
이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불꽃이 솟아났다.
타오르는 불꽃에 이안과 미아의 옆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아는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도 알고 있구나.”
“……무, 무엇을요.”
“그대의 남편인 카일렌과 나의 아내인 올리비아가 감히 밀애를 나눴다는 것을.”
“……!”
미아는 말을 잃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들리는 목소리는 잔뜩 겁을 먹은 듯 떨리고 있었다.
“폐, 폐하. 말씀하신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미아의 또래로 보이는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녀는 최대한 미아와 이안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이는 티는 강렬한 향을 풍겼다.
정식이 아득해질 만큼, 짙은 향에 미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녀는 몸을 굽혀 황급히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안이 미아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녀를 이끌었다.
테이블로 다가가자, 차향이 더욱 짙어졌다.
미아는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속에 입을 틀어막았다.
“괴로우냐?”
“차, 차향이 너무 진해서.”
“마시면 곧장 죽을 수 있는 독차다.”
“…….”
“카일렌의 죄를 생각하면, 카일렌의 아내인 너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는 없지. 감히, 내 아내를 탐했으니 말이다.”
역시 그런 건가.
미아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카일렌의 마음이 변한 것이 그대의 탓도 아닌 것을.”
정말 그럴까?
미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만 더 예뻤더라면, 똑똑했더라면, 우아했더라면.
올리비아와 같았더라면.
카일렌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지 은연중 생각해왔다는 것을.
“그러니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나는 반드시 카일렌을 죽일 작정이다.”
“폐하, 그건 안 됩니다.”
“그럼 네가 대신 죽거라.”
쪼로록.
이안이 찻잔에 차를 따라 미아의 앞에 내밀었다.
미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카일렌.
왜 그랬어?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을 수 없겠지, 이젠.
미아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