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남편이 죽었다, 아니 죽어 마땅했다
미아의 남편은 죽었다.
아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싸늘한 한기가 미아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 몸이 떨리는 이유가 분노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황태자비 전하, 이 근방을 수색했으나 발견된 시신은 없습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포기?
미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큼지막한 눈송이가 미아의 마음도 모르는 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황국 안에서도 가장 따뜻한 지역에서 지낸 미아는 태어나서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손과 발이 얼어붙는 느낌인데도 그녀의 심장은 뜨겁기만 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생생한 카일렌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 아이로 하겠습니다.’
열여덟, 카일렌의 목소리가 미아의 귓전에 울렸다.
황태자비를 간택하는 자리에서, 카일렌은 조금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게 미아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아주 쉽게.
다른 사람은 고려도 안 했으면서, 그렇게 거침이 없었으면서.
그런 카일렌을 보고 미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황태자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황태자비 전하!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붑니다. 이제라도 돌아가야 해요!”
휘이잉.
거센 바람에 미아의 붉은 머리칼이 나부꼈다.
미아는 눈을 뜰 수 없어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렸다.
순식간에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이 바람에 나부껴 날아갔다.
그녀는 날아가는 숄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 숄과 같다.
버림받은 것이.
아무도 잡아주지 않고 저렇게 날아가다 땅바닥에 처박혀버릴, 저것이.
꼭 자신 같았다.
어떻게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남편이자, 황국의 황태자인 카일렌이 적국의 황후와 밀애를 나누고 있다고.
전쟁 중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고.
돌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들어가, 카일렌을 데리고 돌아왔어야 했을까?
미아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신음하는 황후를 끌어안은 카일렌의 얼굴에, 전에 본 적 없던 열의와 뜨거움이 서려있다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미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호위병이 ‘예?’ 하고 되묻는 사이,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미아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눈덩이들이 떨어져 굴러오고 있었다.
“눈사태다! 눈사태가 일어났다!”
“다들 황태자비 전하를 모셔라!”
모두가 미아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미아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쩐지 두 발이 땅에 묶인 것만 같이 꼼짝할 수 없었다.
그사이 점점 불어난 눈덩이들이 호위병을 하나씩 덮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아 역시, 눈바람에 몸이 휘청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아아.”
얼마나 굴렀을까.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여전히 하염없이 내리는 눈과 미아를 둘러싼 설원뿐이었다.
여기서 죽겠구나.
숨을 내뱉자, 입김이 새어 나왔다.
허공에서 사라지는 입김을 보며 미아는 제 망토 속 주머니를 뒤졌다.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내지를 너무 자주 갈아 끼운 탓에, 너덜너덜하게 해어진 가죽 덮개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면, 너와 함께 가야지.
미아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었다.
‘유서’
두 글자를 적어 넣었더니, 거짓말처럼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두 분의 딸로 태어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어요.
아버지는 제게 넓은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주셨고,
어머니는 제 마음을 늘 사랑으로 데워주셨죠.
덕분에 제 일상은 자기 전 먹는 따뜻한 우유처럼, 늘 포근하고 보드라웠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나였지만.
그래도 오라버니 덕분에 황태자비가 되어’
되어서…….
기뻤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아는 그래도 자신이 행복하다 믿었다.
비록 카일렌이 저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았어도.
간택식에서 카일렌이 미아를 골랐다는 이유만으로, 미아가 살던 세계를 모두 포기했어야 했대도.
미아는 행복했다.
황궁 안에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행사에 드레스로 몸을 조이고, 다른 사람의 흉을 하는 귀족 부인들의 말을 계속 들어주어야 했음에도.
사냥을 나가는 카일렌의 승마복을 매일 손수 다리고 입혀주며, 그것이 행복이라 믿었다.
실제로 행복하기도 했다.
미아는 카일렌을 사랑했으니까.
‘수고했습니다.’
카일렌이 매번 그렇게 말해주었으니까.
오랜 정무 회의에 지쳐 돌아와서도 미아에게는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적국 황후와 함께 있던 카일렌의 얼굴은 미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열의와 흥분에 찬 그 얼굴이, 그녀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미아와 밤을 보낼 때에도, 카일렌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었다.
카일렌에게 그런 얼굴이 있을 줄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결론은 하나였다.
애써 미아가 부정했던 진실이 눈앞에 펼쳐졌을 뿐, 그뿐이다.
미아는 이어 손을 움직였다.
동상에 걸린 것인지 손끝이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누리지 못할 것들을 누렸어요. 고마워요.
비록 이렇게 지금 제 삶은 끝나지만, 부디 행복하세요.저는 사랑하는…….’
투둑,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정말로 카일렌이 죽었더라면.
그의 곁으로 간다고 적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끔찍해서 미아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었다고 하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카일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카일렌이 어째서 황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써둔다면 나중에 미아의 시신과 함께 발견된 유서를 보고 더 이상 황국에서도 카일렌을 찾지 않을 것이다.
카일렌이라도 행복하길, 미아는 거짓말처럼 빌었다.
‘남편의 곁으로 갑니다.’
미아.
이름까지 적어넣자,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바람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황폐한 땅 위에서, 이 설원 위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겠지.
미아의 몸이 기울었다.
눈 위에 닿은 뺨이 시렸다.
마지막 입김일까, 이것이.
하아, 하고 길게 새어나가는 입김과 함께 그녀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땅이 울렸다.
이번에는 눈사태가 아니라, 말발굽 소리였다.
“……죽었나.”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마른 나뭇가지와 같구나.
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들지 못했다.
눈물이 얼어붙어, 눈꺼풀 사이사이를 이어붙였다.
저벅저벅, 눈 위를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미아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구나.”
나를 알아……?
거기서부터, 미아의 기억은 끊겼다.
❀ ❀ ❀
‘미아, 황태자비가 되려면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해. 항상.’
‘난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은걸.’
‘미아, 네가 황태자비가 되어야 우리의 가문이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미아의 오라버니 늘 그렇게 말했다.
미아는 호된 오라버니의 교육 아래에서 자랐다.
밥을 먹는 것도, 걸음을 걷는 것도.
모두 예의와 법도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 오라버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오라버니가 밉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을 아끼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아, 드디어 기회가 왔어!’
황태자의 사교 데뷔 파티는 황태자비를 찾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열흘간 진행된 파티에서 미아는 그동안 익혀왔던 것을 실수 없이 뽐내었다.
누군가의 드레스가 찢어졌을 때 얌전히 그것을 꿰매주었고, 정원에 시든 화초를 살려내었다.
어쩌다 마주친 황후 폐하에게 ‘놀랄 만큼 아름답다’라는 찬사를 무심코 할 만큼, 그녀는 수수하고 완벽했다.
그런 미아를 부인으로 삼았다, 카일렌은.
‘앞으로 평생 카일렌 님을 사랑하고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혼인하는 날, 미아는 카일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맹세했다.
카일렌도 같은 날, 같은 맹세를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맹세는 깨어져 버렸을까?
‘너무 수수하지 않아? 황후 폐하는 저렇게 아름다우신데.’
‘황태자 전하가 그렇지, 뭐. 황태자 전하 말고 둘째 황자님이 황태자가 되셔야 했는데.’
그런 말을 들은 날에도, 미아는 아무렇지 않게 시녀들에게 웃어 보였다.
카일렌이 평소에 얼마나 아버지인 노아 황제와 형제들에게 시달리는 줄 빤히 알았기 때문이다.
미아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어주어야 했다.
카일렌은 그런 미아에게 늘 ‘고맙다’라고 말했다.
고맙다.
수고했다.
그 말이면 되었다.
그 말이면 다 되었는데.
“정말이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미아가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힘없이 시선을 돌리자, 달빛이 들어오는 큰 창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머리칼이 차분히 내려앉고, 쌍꺼풀 없는 눈은 서늘하게 뻗어있다.
내리깐 눈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난다.
마치 누군가 깎아놓은 듯 날렵한 턱선과 반듯한 콧날.
그리고 알맞은 두께의 자줏빛 입술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누구지?
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미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휘청였다.
그제야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말이냐 물었다.”
무엇이 정말이냐는 거지?
꿈결 같은 낮은 목소리가 미아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미아는 그제야, 옷을 걸치지 않았음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실크로 이루어진 얇은 가운은 불빛이 닿으면 안이 비쳤다.
“여인의 옷이, 그것밖에 없다고 하더구나.”
“……누구시죠.”
“내 질문이 먼저다.”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마루를 울리더니, 남자가 미아의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미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을 한참이나 구석구석 훑는 그 눈길이 그녀는 거북하고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사랑하는 남편의 곁으로 갑니다.”
헉, 그 말은.
미아가 당황해 고개를 들자, 남자의 손에 들린 가죽 다이어리가 보였다.
안 돼!
다급히 손을 뻗자, 남자가 몸을 틀었다.
중심을 잃은 미아의 몸이 고꾸라지려는 사이 남자가 그녀에게 붙어섰다.
미아의 뺨이 남자의 가슴팍에 닿고 남자는 다이어리를 그대로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화르륵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일었다.
“안 돼!”
미아가 외쳤다.
남자는 그런 미아의 턱을 쥐어 올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미아가 고개를 틀었지만 남자는 놓지 않았다.
“너는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 미아 비잘린.”
“……나를 알아요?”
“네가 나를 모른다는 것이 더 우습지.”
다이어리를 태우며 더욱 거세진 불길이 남자의 얼굴을 밝혔다.
그제야 제대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미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적국인 바트르 황국의 폐위된 황제, 제위 기간 동안 수백 명을 처형한 극악무도한 폭군.
이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