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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34)화 (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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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휴대폰을 집어넣은 해나가 혜영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혜영에게 다가간 영우가 애교스럽게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유라랑 쇼핑하고 점심 식사라도 같이하려고 왔더니, 김 비서가 네가 이미 나갔다고 하더구나.”

“어쩌죠? 저 이미 점심 먹고 왔는데.”

“너 설마, 쟤랑 단둘이 먹은 건 아니지?”

잔뜩 떫은 표정의 혜영이 눈짓으로 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점심 먹으려는데 해나 씨도 혼자 먹는다길래 같이 먹었죠.”

영우의 대답에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혜영이 유라의 팔짱을 풀고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해나에게 다가갔다.

“얘, 아무리 영우가 애가 착해서 같이 밥 한번 먹어 주려 했다지만 생각이 있으면 네가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갑자기 자신에게 돌려진 화살에 해나는 큰 눈을 끔뻑이며 열심히 할 말을 골랐다.

“곧 결혼할 애가, 저 아주버님 될 남자랑 단둘이 밥이나 먹고 다닌다고 소문나면 우리 영우 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냔 말이야.”

“사모님.”

말도 안 되는 시비에 참고 있을 수만은 없던 해나가 혜영을 불렀을 때였다.

“어머! 어머님 참으세요!”

어머님? 

해나도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유라는 놀란 척 혜영에게 다가와 과장된 목소리로 혜영을 말렸다. 아니, 말리는 척만 했다.

“해나가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어요….”

친근하게 성까지 떼 가며 해나를 도와주는 척하지만, 실은 성실히 혜영의 화를 돋우는 중이었다.

“해나? 둘이 아는 사이니?”

“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서요.”

“그 명문고를? 얘가 어떻게?”

자꾸만 자신을 깎아내리며 얘, 쟤 하는 태도에 멍하니 유라와 혜영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해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엄마, 말 좀 가려서 해요.”

때마침 영우가 제 엄마를 저지했지만, 혜영의 한번 뚫린 입은 멈추지 않고 독설을 뱉어 냈다.

“어떻게 그 명문고를 들어갔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유라는 그 명문고에서도 수석 입학한 인재 중의 인재인데. 인우 걔는 눈이 발에 달렸는지, 원.”

그 말에 유라가 힐끔힐끔 해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은 영우가 혜영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엄마, 좀. 차라도 마시러 가요.”

그러면서 해나에게 눈짓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신호를 주는데, 해나는 도무지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머님.”

처음이었다.

늘 사모님이라 부르던 해나가 처음으로 혜영을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입학은 한유라가 수석으로 했지만, 졸업은 제가 수석으로 했습니다.”

그런 해나의 말에 혜영도 영우도 꽤나 놀란 듯했다.

“수재를 찾으신다면, 저를 찾으시는 게 맞을 것 같죠?”

당당한 해나의 표정에 영우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번졌고, 유라는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했다.

“너 나랑 지금 말장난하니?”

“그럴 리가요. 그리고 염려하시는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전무님도, 저도, 저희 회사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까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늘 해나와 언쟁을 하면 지는 듯한 기분인 혜영의 얼굴에 심술이 가득 차올랐다.

“전무님, 점심 감사히 먹었습니다.”

유라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영우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해나는 혼자서 당당하게 회사로 들어갔다.

“맘에 안 들어 죽겠어.”

오늘도 해나에게 한 방 먹은 혜영이 영우에게 하소연할 시동을 걸었다.

“해나 씨가 한 말 중에 틀린 것 없어요. 오늘 엄마가 실수한 거 맞아요. 사람 앞에다 두고 할 말, 안 할 말 가리실 수 있잖아요, 엄마.”

“넌 엄마 편은 못 들 망정….”

너무도 이성적인 영우의 말에 혜영이 울상을 지었다.

그 틈을 파고든 유라가 혜영의 팔짱을 껴 오며 애교를 부렸다.

“제가 있잖아요, 어머님. 기분 푸세요.”

마치 모녀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유라에게 영우가 처음 보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유라 너도.”

늘 웃는 얼굴로 유라야 하고 부르던 다정했던 영우는 어디 가고, 인우만큼 차갑게 변한 영우의 눈빛에 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랑 해나 씨가 점심 좀 같이 먹은 거 신경 쓰시기 전에, 한유라가 엄마 부르는 호칭부터 좀 신경 쓰세요. 누가 보면 인우가 두 집 살림 하는 줄 알겠어요.”

명백히 유라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늘 어르고 달래며 혜영을 다루던 영우가 처음으로 차갑게 일갈하자, 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들어갑니다. 쇼핑 마저 하시든지, 두 분이 점심을 하시든지 하세요.”

한마디를 툭 던지고 예의 그 다정한 인사 없이 들어가 버린 영우의 뒷모습이 꼭 인우 같았다.

***

대환장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온 해나는 누가 봐도 저기압이었다.

처음 보는 해나의 잔뜩 가라앉은 모습에 아영조차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우물쭈물 다가온 아영의 인사에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그제야 하루 종일 모니터만 들여다보느라 굳어 있던 목이 저려 왔다.

“아영 씨도 수고했어요.”

기지개를 한번 켠 해나가 가방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하, 오늘은 인우 씨를 어떻게 보지….”

이런 기분으로 인우를 마주치기가 영 껄끄러웠다.

해나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입을 맞추던 날과 혼자 병원에 찾아갔을 인우, 그리고 저를 위해 먹지도 못하는 매운 음식을 먹어 준 그 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혼란스러움만 커졌다.

“해나 씨.”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로 힘없이 걷던 해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인우 씨? 왜 여기에….”

인도의 바깥쪽으로 걷던 해나의 바로 옆에 여전히 눈부시게 하얀 인우의 차가 서 있었다.

“일찍 끝나서요. 어차피 병원 가야 하니까 가는 길에 태워 가려고 왔습니다. 할 말도 있고요….”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잘못한 아이처럼 이도 저도 못 하고 서 있던 해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저번의 제 행동에 대한 사과부터 하려고 했는데,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해나의 모습에 걱정 어린 말이 먼저 나왔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얼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쓰여 있건만.

눈치가 빠른 인우는 또 아무 일 없다고 잡아떼는 해나를 봐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요?”

“네….”

말끝을 늘이는 게 몇 번 더 찔러 보면 말을 할 것 같은데.

혹시 그날의 입맞춤 때문에 불편한 걸까?

우선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던 인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해나 씨, 그날은….”

“네?”

“그날은 제가 미안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머, 머리가 얼마나 아팠으면 그랬을까 이해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그날 이야기는 그냥….”

인우는 해나가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저를 불편해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냥 덮어 두자고요?”

어쩐지 화나 보이는 인우의 얼굴에 해나가 급히 말을 돌렸다.

“초, 초록불이에요!”

“하….”

덮어 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저렇게까지 피하고 싶어 하는데 계속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또 혼자 저 멀리 도망갈 게 뻔했다.

눈에 띄게 시선을 피하는 해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본 인우는 결국 입을 닫았다.

“저 먼저 올라갈게요!”

언제는 같이 올라가자더니, 오늘은 주차장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려 버린 해나를 보던 인우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잘 되고 있던 일을 제 손으로 망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점점 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

“아빠….”

“우리 딸 얼굴이 왜 그래?”

아빠는 역시 아빠였다.

해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형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 얼굴이 어때서!”

“걱정거리 잔뜩 있는 사람 같아 보이니까 그렇지.”

때마침 들어온 인우가 고개 숙여 인사하며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형우가 그런 인우에게 눈짓으로 해나에게 무슨 일 있냐는 신호를 보냈지만, 인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오늘 일이 많아서, 힘들어서 그래.”

“곧 식도 올려야 하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셔.”

형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한 말에 해나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참, 해나야. 아빠가 할 말이 있는데. 주 서방도 들었으면 좋겠고.”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인우가 잔뜩 긴장한 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해나 역시 원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형우를 바라봤다.

“오늘 주치의 선생님이랑 상의해 봤어. 생체 간 이식을 추천하시던데,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아빠는 절대 네 간을 받을 수 없어.”

“아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일단 색전술 먼저 해서 암부터 없애 보고, 뇌사자 장기 이식을 기다려 볼까 해.”

“색전술을 하면 간 기능이 더 떨어질 수도 있대. 그냥, 그냥 내 간 받아 주면 안 돼?”

“아빠는…. 너무 무서워.”

덤덤하게 말을 하던 형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고백하자 해나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픈 게 백번 낫지, 나 때문에 우리 딸이 아프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 아빠 색전술 하고 나면 3년은 이식 기다릴 수 있을 거래. 그렇게 하게 해 줘.”

“아빠….”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오열하는 딸의 어깨를 토닥인 형우가 인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 서방,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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