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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33)화 (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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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한 해나는 방금 전의 일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을 달래던 인우의 목소리는, 첫 다툼에서 저를 비꼬았던 날 선 목소리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귀 끝이 빨개졌다.

그리고 제 눈을 바라보던 인우의 눈은 시리도록 차갑게 쳐다보던 눈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올곧고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그 눈을 떠올리니 해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너무나도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 주던 그 손가락은 또 어떠한가.

꼭 어릴 적 느꼈던 아빠의 손길 같았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하게 된 입맞춤은….

“미쳤나 봐….”

입맞춤까지 떠올리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절대 사랑할 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수없이 자신을 회초리질하고 세뇌시키며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다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

이 계약 결혼에서 패자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 패자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짐을 단번에 꺾어 버릴 만큼 커진 마음에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어떡해…. 나 저 사람 좋아하나 봐….”

***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진정시킨 해나가 병실로 들어온 것은 한참 후였다.

해나가 병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인우가 떠나고 없었다.

“인우 씨는?”

들어오자마자 인우를 찾는 해나에게 형우가 웃으며 말했다.

“일 중에 잠깐 나온 거라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전해 달라더라.”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워진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랬구나….”

그런 해나를 보며 살짝 웃은 형우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싸운 건 아니지? 주 서방, 오늘 고생 많이 했을 텐데.”

“아냐. 인우 씨가 오전에 메시지 보냈는데 내가 바빠서 확인을 못 했거든. 그래서 아빠 이미 병실 바꾼 걸 몰랐어. 놀라서 조금 화냈는데 인우 씨가 미안하대.”

“주 서방 덕분에 아빠가 분에 넘치는 대우를 다 받네. 고맙다고 꼭 전해 줘.”

“응….”

고맙다고 했어야 하는데….

화만 내고 보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딸 사랑받는 것 같아서 아빠는 좋아. 참, 저번에 상견례 끝나고 말이야. 며칠 후에 주 서방이 찾아와서 그때 죄송했다고 사과하고 갔는데, 아빠가 그것도 말 못 하고 집중 치료실로 갔네. 주 서방이 말해 줬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인우가 찾아와서 사과를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인우를 원망하고, 인우를 탓했었다.

그러곤 계약 결혼이 지친다며 계약 파기를 입에 올렸었다.

“인우 씨가… 찾아왔었어?”

전혀 몰랐던 것 같은 해나의 물음에 형우가 다 안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으이구, 주 서방이 말 안 했구먼. 우리 딸 또 아무것도 모르고 며칠은 심통 나 있었겠네. 아빠는 둘이 화해한 것 같아서, 주 서방이 말한 줄 알았지.”

이 남자는 도대체 뭘까.

계약인 이 결혼에 왜 이렇게 노력하는 걸까.

한낱 탈취제에 불과한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방금 전의 입맞춤은 무슨 뜻이었을까.

몰랐던 사실과 오늘의 일이 겹쳐 혼란스러움이 증폭됐다.

“아빠, 나 어떡하지.”

“왜, 주 서방한테 많이 화냈어?”

형우에게는 말할 수 없는 말을 삼킨 해나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

어지러운 마음과 상황 속에서도 출근은 해야 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한 해나에게 점심시간이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팀장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며칠 전 반차를 쓴 그다음 날부터 직원들은 해나와 대놓고 따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팀장님, 점심 먹고 하죠, 하고 해나를 먼저 찾던 직원들이 이제는 식사 맛있게 하라며 하나둘 짝지어 사무실을 나가는 통에, 해나는 줄곧 혼자 점심을 먹었다.

“아영 씨.”

해나만 남은 텅 빈 사무실에 불쑥 아영이 들어왔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을 기대한 해나가 살갑게 이름을 불렀다.

“혹시 점….”

“지, 지갑을 깜빡해서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점심 먹었냐고 다 묻지도 않았는데,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갑을 챙겨 나가 버린 아영이 해나에게 다시금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 왕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 달라진 직원들의 태도에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의 창문을 두드렸다.

“오 팀장님 계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해나의 눈에 보인 것은 영우였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노크하는 영우가 새삼 반가웠다.

“전무님!”

반가운 마음에 문 앞까지 쪼르르 달려가 영우를 맞이하는 해나의 모습에 영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점심 아직이면, 그때 그 낙지 어때요?”

이 우울한 기분을 씻어 내릴 건 낙지뿐이지.

기막힌 타이밍에 해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찬성했다.

“좋아요!”

그런 해나가 귀여운 영우가 마치 여왕을 에스코트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가시죠, 낙지 먹으러.”

점심을 같이 먹어 줄 사람도 생겼고, 점심 메뉴는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인 불낙지라니.

해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고민이 잠시나마 잊히는 기분에 싱글벙글 웃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이모! 불낙 특선 2인분이요!”

벌써 세 번째 방문에 익숙하게 자리에 앉은 해나가 더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어우, 이제 원래 단골집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영우가 너스레를 떨자, 밑반찬을 집던 해나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럼요. 이제 단골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가 벌써 새 손님도 만들었는걸요.”

“그날 후로 또 왔었어요?”

“네. 인우 씨랑요.”

해나는 별일 아닌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에 영우는 물을 마시다 사레들려 한참을 콜록댔다.

그런 영우에게 재빨리 휴지 두 장을 뽑아 건넨 해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휴지를 건네받은 영우가 입가를 닦고 겨우 진정했다.

“인우랑 왔었다고요? 여기를?”

“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대답한 해나와 달리 영우는 연신 헛웃음을 쳤다.

“허…. 그래서, 그날 인우도 먹었어요?”

“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어요. 왜요?”

들려온 영우의 대답에 해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릴 만큼 놀랐다.

“인우, 매운 거 하나도 못 먹는데….”

놀라서 떨어트렸던 젓가락을 주울 생각도 못 한 해나가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날 한 그릇 다 먹었어요. 맵단 말도 안 했는데…?”

“인우 어렸을 때부터 박하사탕도 못 삼킬 만큼 매운 걸 못 먹었어요. 커서는 같이 밥 먹어 본 적 없지만, 상견례 때도 김치 한 점 안 집어 먹는 거 보고 여전하구나 생각했거든요.”

“박하사탕을요? 박하사탕도 못 먹어요?”

맙소사.

이 매운 불낙지를 한 그릇 싹싹 비운 인우의 입에 쏙 넣어 줬던 사탕이….

“맞아. 박하사탕이었어….”

“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여기서 낙지 특선을 먹이고 나가는 길에 박하사탕도 먹였어요…. 어떡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해나가 한 말에 영우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저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겠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저렇게 크게 웃는지.

순간 전무의 직함도 잊을 만큼 영우가 얄미웠던 해나가 세모눈을 뜨고 영우를 노려봤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난 미안해 죽겠는데!”

눈물이 날 만큼 웃어 손을 들어 눈물을 슥 닦은 영우가 아직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박하사탕을 준 적이 있어요, 인우한테. 그때 인우가 뭣도 모르고 입에 넣었다가 바로 뱉고는, 나랑 일주일 동안 말도 안 섞었어요. 삐쳐서.”

“저랑은 밥 먹고 나서 같이 아빠도 보러 갔었는데…?”

“그러니까요. 그게 웃기잖아요. 천하의 주인우가 해나 씨가 먹고 싶다니까 이 매운 걸 참고 같이 먹어 주고, 해나 씨가 준 박하사탕까지 뱉지도 않고 먹은 게.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세긴 했는데, 해나 씨한텐 절대 들키기 싫었나 봐요.”

“어떡해….”

영우의 말에 망연자실한 해나가 힘없이 젓가락을 주웠다.

때마침 나온 불낙 특선이 오늘은 미워 보였다.

입맛이 뚝 떨어진 해나가 젓가락을 들어 깨작대자, 영우가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요. 원래도 자존심 센 애니까 걱정 말고 먹어요.”

정말 자존심 때문일까?

혹시 나를 배려해 매운 것도 참고 먹은 거라면?

자존심이 세서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만약 자신을 배려해 매운 티도 못 낸 거라면, 이미 좋아하게 된 마음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범벅돼 하루 종일 혼란스럽던 마음이 더 크게 요동 쳤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해나가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반이나 남긴 채로 식사가 끝났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회사 앞에 도착한 해나는 영우에게 영혼 없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얼마 먹지도 않아 놓고, 뭘. 정 그렇게 인우한테 미안하면 이거 사 줘요.”

영우가 휴대폰을 들어 검색한 화면을 해나에게 보여 줬다.

“허브 티 선물 세트…?”

찻잎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선물 세트였다.

“네. 인우가 여기 차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몇몇 향 중에서도 제일 좋다고.”

“그렇구나. 감사해요.”

해나가 몸을 붙여 인우가 좋아한다는 차를 메모하고 있을 때, 영우를 부르는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우야!”

갑자기 들린 이름에 영우와 해나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뭐 하고 있는 거니, 지금?”

곧 해나의 시어머니가 될 혜영이었다.

그 옆엔 유라가 살갑게 혜영의 팔짱을 낀 채로 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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