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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안내 방송에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중 치료실을 나왔다.
“언제부터 여기로 옮기신 겁니까?”
인우가 나오자마자 해나에게 경위를 물었다.
“좀 됐어요. 간 수치가 너무 높고 복수도 차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한대요. 황달도 그렇고….”
“왜 말 안 했어요.”
“말할 거 뭐 있어요. 좋은 일도 아니고, 인우 씨도 바쁠 텐데.”
“그럼 오늘은요. 오늘은 왜 말한 건데요?”
“어제 의사 선생님이 아빠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다음 주 중이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겠다고. 아빠가 제 결혼 소식 듣고는 힘내 본다고 한 게 생각나서,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불렀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해나와 달리 인우의 속에선 열불이 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명확하게 선을 긋는 해나의 태도에 인우는 이제 서운해지기까지 했다.
“해나 씨,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고 해도 나는 이제 곧 해나 씨의 남편이 됩니다.”
“알아요.”
“그 말인즉슨, 이런 일이 생기면 염치며, 체면이며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해도 된다는 겁니다.”
시간도 없는데 왜 이런 일까지 시키냐고 생각할까 봐 종일 고민하던 해나였다.
그런데 인우의 말이 꼭 저한테 의지해도 된다고 하는 것만 같아 솔직히 감동받았다. 그뿐 아니라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
이 호의가 얼마나 갈지 두려운 해나는 또 선을 그었다.
“아니에요. 아무리 결혼을 해도 인우 씨는 인우 씨, 저는 저인걸요.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은 일까지 해 주실 필요 없어요.”
눈을 한번 지그시 감은 인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여자의 저 높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생각을 방해하는 구두 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인우가 눈을 떴다.
또각, 또각, 또각.
그리고 그 구두 소리는 제 앞에서 멈췄다.
“인우 오빠?”
인우를 불러 오는 목소리에 해나가 뒤로 돌았다.
아주 예쁘고 화려한데,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졸업한 지 10년이 됐어도 변함없는 저 얼굴.
해나는 흐릿했던 기억 속의 유라를 선명히 마주했다.
“뭐야.”
“오빠인지 긴가민가했는데. 왜 여깄어? 그리고 이 여자는….”
유라가 해나를 위아래로 스캔하자 인우가 해나의 어깨를 감싸며 차갑게 일갈했다.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그렇게 무례하게 쳐다보지 말고 가던 길 가.”
하, 결혼할 사람이라고 저렇게 싸고돌아?
얼굴이나 자세히 보자 싶었던 유라가 해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오… 해나?”
유라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이길 수 없던 그 애.
가진 것도 쥐뿔도 없으면서 어디서나 늘 당당하던 그 애.
늘 유라를 2등으로 만들던 그 애가 저를 쳐다도 보지 않던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란다.
“안녕.”
자신을 알아보는 유라에 인사를 안 하기도 뭐 했던 해나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왜 또 쟤일까. 나는 평생 쟤한테 이길 수 없는 걸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패배감에 이성을 잃은 유라가 해나에게 소리치며 다가갔다.
“너 뭐야? 네가 왜 인우 오빠랑…. 너 도대체 뭔데?”
“뭐 하는 거야.”
둘의 사연은 그도 얼핏 들었다. 유라의 행동에 인우가 재빨리 해나를 등 뒤로 숨기며 날 선 목소리로 유라를 막았다.
“하, 오빠가 결혼한다는 여자가 쟤였어? 쟤가 오빠한테 가당키나 해? 쟤네 집이 어떤 줄은 알고 이러는 거야?”
집을 운운하는 유라에 발끈한 해나가 튀어나오려는데, 이번엔 그보다 인우가 빨랐다.
“난 집이랑 결혼 안 해. 사람이랑 결혼하지. 그리고 그따위로 말한 거 당장 사과해. 장인어른 너한테 무시당할 분 아니고, 해나 씨도 마찬가지야.”
처음이었다.
인우가 저를 위해 나서 준 걸 처음 본 해나는 딱딱하게 굳어 어쩔 줄 몰랐다.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그런 개쪽을 주고 지금 이런….”
“한유라.”
계속되는 유라의 망발에 인우가 무섭게 유라의 이름을 불렀다.
해나는 처음 듣는, 시리도록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만 기어올라. 네가 회장님 구워삶아 나랑 결혼한다 어쩐다 했을 때도 다 참아 줬는데, 이런 식으로 굴면 더는 못 참아. 지금 당장 해나 씨한테 정중히 사과해. 그리고 다신 내 앞에,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그땐 이런 말로 안 끝내.”
인우의 차가운 말에 상처받은 유라는 곧 울음이 터질 듯했다.
유라의 사과를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병원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해나가 인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인우 씨. 우리가 먼저 가요.”
자신의 팔을 잡아 오며 말하는 해나를 이길 수 없었던 인우가 해나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자리를 벗어나며 다시 한번 유라에게 경고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멀어지는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을 보며 유라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왜 또 넌데, 왜 매번 내 걸 빼앗는 건데….”
병원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오는 길 내내 인우는 해나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 하는 진짜 연인 같은 스킨십에 해나는 심장이 콩닥콩닥 떨리는데, 화가 잔뜩 난 인우는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인우 씨, 어깨에 손 좀….”
이대로 가다간 얼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해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해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인우가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미안합니다. 한유라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의식하기 전엔 아무 느낌 없었는데, 한번 의식해 버리니 발끝부터 열감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손을 떼어 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온기에 이도 저도 못 하던 인우가 제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해나가 살포시 웃었다.
“아니에요. 도와주려고 그런 거 알아요.”
키가 큰 탓일까, 단단한 몸 때문일까.
정말이지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은 해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꽤 좋았다.
내가 바라던 인우의 모습이 이런 거였나 싶을 정도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앙금까지 단박에 풀려 버렸다.
“불쾌했다면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인우의 거듭된 사과에 해나가 짓궂게 말했다.
“멋대로 입술을 부딪칠 땐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번엔 어깨 한번 감싼 걸로 이렇게 미안해하네요.”
해나가 놀리려 한 말에 인우는 돌처럼 굳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인우를 본 해나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그땐 더 미안했습니다. 너무 오래 해나 씨를 보지 못한 상태라 날카로웠고, 또 이 계약을 깨고 싶은 것 같아 이성을 잃기도 했고, 또….”
“됐어요. 오늘 저 지켜 준 걸로 퉁 칠게요. 그땐 나도 잘한 거 없으니까요.”
생각보다 쿨한 해나의 대답에 구구절절 사과하던 인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절대 날 사랑할 일 없을 거란 말은 진심이었습니까?
인우는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서둘러 운전석 문을 열었다.
“가죠. 데려다줄게요.”
“네.”
늘 인우의 에스코트를 거부하던 해나가 처음으로 웃으며 수락했다.
차에 올라탄 해나가 스피커를 만지작거렸다.
“스피커는 좋은데 왜 음악을 한 번도 안 틀어요?”
해나의 순수한 질문에 인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두통이 있을 때 음악처럼 성가신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잘 안 듣습니다.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덤덤하게 말해 오는 인우를 보는 해나의 마음이 따끔했다.
자신은 늘 당연하게 듣던 음악도 인우에겐 머리를 아프게 하는 요인이었다.
음악 한 곡의 여유도 느껴 보지 못했을 인우가 안쓰러운 해나가 애써 밝게 물었다.
“지금은요? 지금도 머리 아파요?”
“아니요. 하나도요.”
대답하는 인우의 목소리가 편안했다.
정지 신호에 운전석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했다.
스쳐 지나듯 짧게 머물다 간 미소지만 해나는 분명히 봤다.
“그럼 지금 들어 볼래요? 스피커 성능도 확인할 겸.”
“좋을 대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한 대답에 김이 살짝 샐 뻔했지만, 아무래도 좋은 해나는 제 휴대폰을 들어 블루투스를 연결했다.
그런 해나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인우가 몰래 웃었다.
“됐다.”
블루투스 연결을 마친 해나가 뿌듯하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너는 웃었고
널 보는 내 얼굴도 웃었지
그런 거야 사랑은 함께 웃는 것
네가 웃으면 나도 웃게 되는 것
조용한 차 안이 해나가 틀어 놓은 음악으로 가득 찼다.
생각해 보면 인우는 늘 혼자였다.
웃어 본 게 언제 적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노래의 가사를 곱씹고 있었다.
인우는 핸들을 잡은 손의 검지로 기분 좋게 핸들을 톡톡 쳤다.
“노래 괜찮죠? 제가 좋아하는 가수 신곡이에요.”
그런 인우를 본 해나가 넌지시 말했다.
“좋네요.”
늘 맹숭맹숭 ‘나쁘지 않네요’란 대답을 입에 달고 살던 인우가 두 번째로 뱉은 긍정의 대답이었다.
그 목소리가 나른하고 따뜻해 듣기 좋았다.
이 상태라면 결혼 생활이 썩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다행이네요.”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노래를 몇 곡 들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집에 도착했다니.
아쉬운 마음을 감춘 해나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들어갈게요.”
“들어가요.”
해나의 방에 불이 켜지자 인우의 차도 조용히 골목을 벗어났다.
“아, 좋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마친 해나가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오늘은 꽤나 괜찮은 날이었다.
아름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아름이의 응원도 받았다.
아빠의 몸 상태도 좋아져 곧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고 하고.
달갑지 않은 한유라와의 만남에서 자신을 지켜 주던 인우와 차 안에서 노래를 함께 듣던 시간까지.
꽤 괜찮은 하루라는 생각이 든 해나가 기분 좋게 잠들려는 때였다.
띠리리링.
집에 도착했냐는 인우의 전화일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아빠가 입원하게 된 후로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도 빠짐없이 받게 된 해나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들려온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한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