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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득을 취해야 하는 이 계약 결혼 안에서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 그 마음.
그 마음을 처리하고 싶었는데, 3일 만에 해나를 다시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와 처리하기엔 조금 늦은 것 같다.
“그렇게 사과 한마디만 하면 다예요? 그래서 청첩장은 언제 받으러 갈 거냐고요!”
“지금 가죠.”
“그 직원분껜 뭐라고 설명드릴 건데요? 입을 맞춰야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기죠.”
“그게 중요합니까?”
인우의 말에 해나가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사모님이 다 그분 통해서 이야기 들으실 텐데, 우리 사이가 안 좋아 보인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잘못한 아이를 다그치는 듯한 해나의 말투도 오늘따라 듣기 좋았다.
“그럼, 그냥 나는 해나 씨가 말한 걸로, 해나 씨는 내가 말한 걸로 오해해서 아무 말 없었다고 하죠. 원래 오늘 가려고 했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던 해나도 인우의 말에 수긍했다.
“하, 그래요…. 가죠. 이번엔 제발 정신 똑바로 차려요.”
단단히 당부하고 먼저 앞서 나가 걷는 해나의 뒷모습을 보던 인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신을 어떻게 차릴 수가 있겠냐고.”
***
오랜만에 인우가 운전하는 차를 탄 해나는 어색한 분위기에 줄곧 창문만 보고 있었다.
어색하긴 인우도 마찬가지였다.
운전을 하는 내내 차 안은 무거운 정적만 가득했다.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기 모드로 돌입했다.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로 직원을 찾은 해나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척 사과를 건넸다.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해요. 저는 남자친구가 연락드렸을 줄 알았는데, 남자친구는 제가 연락드린 줄 알고 연락을 안 드렸대요. 자기도 얼른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직원은 의심 없이 청첩장을 가지러 일어났다.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일까 봐 자기라고 부르긴 했는데, 연기일 뿐인데도 괜히 얼굴이 화끈화끈한 해나가 인우를 올려다봤다.
“풉.”
자신을 보고 웃는 해나가 신경 쓰인 인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뭡니까.”
“큼,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에 인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우는 모르고 해나만 아는 비밀.
인우의 귀가 꼭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만 창피했던 건 아닌가 보네.’
인우의 귀를 보며 속으로 생각한 해나는 웃음이 터지지 않게 노력했다.
저 멀리 직원의 구두 소리가 들려오자, 해나가 인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은 정신 똑바로 차리는 거예요.”
아무 뜻 없이 일부러 사이좋아 보이려 한 귓속말이었다.
그 아무 뜻 없는 행동에 인우의 귀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귀에 닿는 숨결과 목소리가 자꾸만 정신을 놓게 하는데, 어떻게 정신을 차리란 말인가.
“청첩장 드릴게요.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만족하실까요?”
더 없이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만족한 해나가 긍정의 웃음을 지었다.
“예쁘네요.”
인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직원이 흠칫 놀랐다.
놀란 건 해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나오다니.
실은 내내 해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청첩장을 핑계 삼아 뱉은 것이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두 분 웨딩 촬영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스케줄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해나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무사히 청첩장을 받아 온 두 사람이 차에 오르는 순간, 주위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직감적으로 카메라 플래시라고 확신한 인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특별히 보이는 게 없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괜한 기우였나.
서둘러 차를 출발시킨 인우가 해나를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 왔다.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화가 좀 누그러진 해나가 집으로 들어가 방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나서야 인우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
“웨딩 촬영이라.”
집에 도착한 인우가 청첩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에서 이야기해 봐도 됐을걸, 일부러 별다른 말 없이 운전만 했다.
집에 도착해 웨딩 촬영 핑계로 메시지나 하나 보내 볼 요량이었다.
[웨딩 촬영 언제가 좋습니까.]
“아! 웨딩 촬영! 어떡해!”
막 씻고 나온 해나가 인우가 보낸 메시지를 보더니 곧바로 침대로 뛰어 들어가 발버둥 쳤다.
“얼마나 어색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배우를 했지, 어휴.”
같은 차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한 인우와 찰싹 붙어 사진까지 찍을 생각에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웨딩 촬영 한 사진을 결혼식에도 놔야 하던데, 최대한 빨리 찍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하기 싫은 일은 빨리 해서 없애 버리자.
자신의 좌우명을 떠올린 해나가 최대한 빨리 찍을 것을 요청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괜찮습니까.]
“이번 주 토요일? 딱히 별일은 없지만…. 황금 같은 토요일을 또 저 미친놈이랑 보내고 싶진 않은데.”
연신 제 팔을 쓸어내린 해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인우의 달아오른 귀였다.
“은근 숙맥인가 보네.”
꼴도 보기 싫을 때가 더 많지만, 그 귀를 떠올리면 화가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냥, 좀 귀여운 구석은 있는 것 같… 뭐야! 내가 뭐래!”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던 해나가 뒤늦게 자신이 뱉은 말을 깨닫고 입술을 찰싹찰싹 때렸다.
“말려들지 말자, 오해나. 상대는 미친놈이야.”
해나가 제 입술을 때리며 원맨쇼를 하고 있을 때, 인우는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휴대폰을 내려놓은 인우에게 별안간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게 휴대폰을 들었지만, 아쉽게도 해나가 아닌 영우였다.
“어, 형.”
-너 이거 뭐야, 주인우. 사진 찍힌 거 알고 있었어?
“무슨 사진.”
-너랑 해나 씨. 방금 호텔에서 나온 거 사진 찍혔다고.
“뭐?!”
황당한 소식에 전화를 끊은 인우가 포털 사이트에 제 이름을 검색했다.
[*특종* 한주 그룹의 베일에 싸인 둘째 아들 주인우, 결혼 임박]
이름을 검색하자마자 뜬 기사 제목에 인우가 헛웃음을 쳤다.
“하, 이게 무슨.”
기사를 클릭하자, 호텔에서 청첩장을 가지고 나오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제 얼굴은 물론 해나의 얼굴도 노출이 돼 있어 머리가 다 아찔해 왔다.
“두 사람은 H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인우가 기사의 마지막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차에 올라탈 때 봤던 반짝임이 이거였구나.
“하… 하다 하다 이제 뭔.”
한주 그룹 둘째 아들이란 타이틀에 원하지 않아도 기사에 오르내려야 하는 건 제게도 스트레스였다.
매번 겪어도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는데, 해나의 얼굴까지 노출돼 버리다니.
해나가 걱정된 인우가 급하게 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기사 봤습니까?”
-무슨 기사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해나의 모습에 인우는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기사냐니까….”
인우가 한참을 말이 없자 답답해진 해나가 직접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가 주인우, 2위가 한주 그룹이었다.
이게 뭔 일이래.
기사를 클릭한 해나가 대문짝만 하게 실린 자신과 인우의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라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들려오는 인우의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미안합니다. 차에 탈 때 플래시가 터진 걸 본 것 같았는데,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어 괜한 기우인 줄 알았어요. 지금 비서실과 통화해 기사 내리겠습니다.
미안함이 한껏 느껴지는 목소리에 해나의 놀란 마음이 진정되었다.
‘기사가 결혼보다 먼저 터졌으니까….’
진정이 된 해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기사 내리지 말고 인정해요.”
해나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침착했다.
뜻밖의 반응에 되레 인우가 놀랐다.
-네? 괜찮겠습니까?
되물어 오는 인우에 해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안 괜찮을 건 뭐 있나요. 어차피 결혼하면 밝혀질 거고, 우리 결혼을 마케팅에 이용할 참이었는데. 기사도 그렇고 사람들 반응도 그렇고, 따로 수고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럼 토요일 웨딩 촬영 때 봐요.”
해나가 전화를 끊자, 인우는 기사를 보고 놀랐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해나의 담력과 빠른 계산에 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사람이 이래.”
어제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던 여자가 인터넷에 제 얼굴이 퍼졌는데 괜찮단다.
따로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되니 잘됐단다.
해나가 그렇게 빠른 시간에 팀장까지 승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뼛속까지 비즈니스네.”
한탄하듯 말을 뱉은 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비즈니스를 위해 하게 된 결혼이기에 기사가 난 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비즈니스로 생각하지 않았던 건 자신뿐이었다.
기사를 보자마자 놀랐을 해나가 진심으로 걱정돼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한심하군.”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말한 인우가 터벅터벅 욕실로 향했다.
그 시각, 해나는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기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얼굴이 잘 안 나와서.”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했다, 축소했다 하며 꼼꼼히 제 얼굴을 확인한 해나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그래. 잘된 일이지. 근데… 하.”
해나도 머리로는 안다. 잘된 일인 걸.
그런데 이렇게 찝찝한 이유는 뭘까.
예비 남편이 너무 유명해 기사에까지 올랐는데, 정식으로 남편이 돼 버리면 나까지 기사에 오르락내리락하진 않을까.
전 국민이 내 결혼과 남편이 누군지까지 알아 버렸구나.
혹시라도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되면 어쩌지? 그것도 전 국민이 알 텐데.
이런저런 걱정에 한숨을 푹푹 내쉬던 해나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머리 싸매고 걱정해 봤자 이미 벌어진 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접은 해나가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일반인인 해나는 잠드는 순간까지도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