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23)화 (23/84)

@23

첫 번째 드레스는 그저 예고편에 불과했다.

“예비 신랑님,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직원이 커튼을 열자, 아까보다 더 예쁜 해나가 등장했다.

방금 전엔 시원하게 파인 뒷모습이 인우를 숨 막히게 했다면, 지금 입고 나온 드레스는 몸에 딱 달라붙어 해나의 신체 굴곡을 노골적으로 뽐냈다.

“큼….”

대답은 하지 않고 목이나 가다듬는 모습이 얄미운 해나가 몰래 인우를 노려보았다.

‘저럴 거면 왜 따라온다고 한 거야?’

해나는 인우를 노려보며 속으로나마 불만을 토로했다.

“나쁘진 않은데, 다음 거 보죠.”

나쁘지 않다는 것뿐만인가.

회사에서는 정장, 병원에서는 트레이닝복, 상견례 때는 격식을 차려 단정한 옷을 입던 해나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해나의 굴곡 있는 몸매가 가감 없이 드러난 걸 처음 본 인우는 가까스로 탄성을 참아 내기 바빴다.

해나와 직원이 다시 들어가자 내내 참았던 말을 뱉었다.

“드레스가 이렇게 섹시한 옷이었나?”

그런 인우를 꿈에도 모르는 해나가 환복을 도와주던 직원에게 물었다.

“그렇게 별로예요?”

“그럴 리가요. 제가 본 그 어떤 신부보다 아름다우세요.”

내내 심드렁한 인우의 반응이 내심 신경 쓰였던 해나가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위안이 되네요.”

해나의 말에 직원이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콘셉트를 바꿔 볼까요?”

해나를 의자에 앉힌 직원이 빛의 속도로 헤어 스타일링을 다르게 만져 주었다.

자연스럽게 탄 가르마대로 머리를 올려 묶더니, 면사포가 달린 티아라를 올린 머리에 꽂아 주었다.

“완벽해요, 신부님. 나가 볼까요?”

한편, 이번엔 꽤 오래 걸리는 시간에 인내심이 바닥난 인우가 소파에서 일어나려는데, 돌연 커튼이 걷혔다.

“…본식 드레스는 이걸로 하죠.”

방금 전까진 열 벌을 다 입어봐야 한다더니, 아직 세 번째밖에 안 됐는데 이 드레스로 결정하다니.

해나만큼 놀란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아직 일곱 벌이나 더 남았는데요.”

더 이상 보다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가슴부터 시작해 잘록한 허리 라인과 골반을 뽐내 주던 드레스가 허벅지부터 우아하게 펼쳐져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올림머리 덕에 보이는 어깨선이 청순하면서도 섹시했다.

티아라를 씌워 놓으니 저기 저 백설 공주, 신데렐라쯤은 가볍게 이기고 들어가는 공주 같았다.

티아라 밑으로 넘실대는 면사포가 신비로움까지 자아냈다.

이 이상 보면 정말 사랑에라도 빠질 것 같아 이쯤에서 한발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신부님은 어떠세요? 더 입어 보시겠어요?”

인형처럼 서서 인우에게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던 해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저도 이 드레스가 가장 맘에 들어요. 제 남편도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 본식 드레스는 이게 좋겠어요. 바로 피로연 한복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요.”

“그럼, 피로연 한복 피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인우가 관심 없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이렇지도 않을 텐데, 해나는 자꾸만 인우의 반응을 신경 쓰게 되는 이 상황이 불편하고 싫었다.

쀼루퉁해진 해나가 커튼 속으로 들어가고 나자 인우는 그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운 숨을 몰아쉬던 인우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도 한복은 괜찮겠지.”

드레스처럼 몸매가 드러날 일은 없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신부님 나가실게요!”

직원의 발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커튼이 열리고 한복을 차려입은 해나가 등장했다.

“미쳤네.”

인우가 내내 참았던 과격한 말을 내뱉었다.

한복은 괜찮겠지, 하고 안심했던 건 제 실수이자 착각이었다.

“이 컬러가 잘 받으시죠?”

직원이 이번엔 제발 대답을 잘하라는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물었다.

“네.”

홀린 듯 보던 인우가 처음으로 긍정의 대답을 했다.

드디어 긍정의 대답을 뱉는 인우에 해나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서렸다.

“그럼 두 번째 한복 피팅 가겠습니다!”

직원도 해나도 처음으로 기분 좋게 커튼을 쳤다.

지금 인우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드레스는 천사 같더니 한복은 또 선녀 같네.”

졌다.

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인우는 해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인우 씨 타입은 아니고요?’ 하며 웃던 해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 받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딱 인우의 타입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가야겠어.”

아직 한복이 네 벌이나 남았지만, 인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감정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벅차 그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해나가 나오기 전에 먼저 이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인우가 피팅 룸을 나섰다.

“신부님 나오실게요!”

처음 듣는 예비 신랑의 긍정의 대답에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직원이 커튼을 열었다.

“뭐야?”

인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황당한 상황에 직원도 해나도 그저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랑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봐요. 기다릴까요?”

“제가 전화해 볼게요.”

내내 뚱하게 있더니만. 

휴대폰을 들고 피팅 룸을 나선 해나가 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벽에 기대 손톱을 잘근잘근 뜯으며 전화하는 모습이 제가 봐도 가관이었다.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나왔습니다.

어디냐고 묻기도 전에 사과를 해 오는 인우 탓에 황당하지만 더 따질 수도 없었다.

“네. 그러세요….”

허탈하게 전화를 끊은 해나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꼭 첫날밤에 소박맞은 기분이 들지? 한복을 입어서 그런가. 하, 진짜 어이가 없네.”

헛웃음을 짓던 해나가 소득 없이 피팅 룸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듯한 직원의 표정에 해나가 능청스레 거짓말을 뱉었다.

“아, 나가 봤는데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봐야겠다고, 천천히 하고 오래요.”

“아, 그러셨구나. 그럼 한복은 신부님이 직접 정하는 걸로 할까요?”

“네. 항상 제 의견을 존중해 주니까요. 하하.”

거짓말을 하려니 웃음소리가 꼭 기계같이 나왔다.

꾸역꾸역 혼자서도 다섯 벌을 다 입어 보고 나니 온몸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걸로 할게요.”

“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청첩장도 바로 준비해 드리려 하는데, 언제 받으러 오실까요?”

드디어 옷까지 다 골랐는데, 넘어야 하는 산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인우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무겁게 해나를 압박했다.

“내일 중으로 연락드릴게요.”

더 이상 아무 생각을 하기 싫은 해나가 대충 내일까지 말해 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

[신부님, 청첩장 나왔는데 연락이 없으셔서요. 편하신 시간에 연락 주세요.]

드레스를 고르고 온 지 3일째.

직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던 해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인우가 사라졌다. 그래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전화도 안 받고, 연락 주라는 메시지를 남겨도 묵묵부답이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뭐가 이렇게 제 맘대로야. 내일 청첩장 이야기하면서 이것도 확실히 이야기해야겠어.”

직원은 매일 연락을 해 오는데, 돌연 잠수를 타 버린 인우 때문에 해나는 미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나한테 그렇게 뭐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저가 잠수를 타?”

흥분해 씩씩대던 해나는 퇴근하자마자 급하게 택시부터 잡았다.

“청담 사거리로 가 주세요.”

처음으로 와 본 인우의 회사는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움츠러든 것도 잠시, 해나는 곧 숨을 가다듬고 정문으로 향했다.

“저가 숨는다고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비장하게 정문을 통과한 해나가 가드에게 막혔다.

“무슨 일이시죠?”

“음… 이 회사 대표를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시죠? 미리 연락하고 오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우물쭈물하던 해나의 눈에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주인우 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휘적휘적 정문으로 나오려던 인우가 해나의 눈에 딱 걸렸다.

걷던 걸음까지 멈춘 인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해나를 바라봤지만, 거리가 좀 있는 탓에 못 알아보는 듯했다.

“오해나요!”

해나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자 인우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던 인우가 곧장 걸어오더니 해나의 손목을 잡고 대표실로 향했다.

큰 문이 닫히자마자 잡힌 손목을 거세게 뿌리친 해나가 앙칼지게 따져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해나의 날 선 물음에도 인우는 그저 묵묵히 해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잠수 탔던 거 복수라도 하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청첩장 받으러 가야 한다고 여러 번 메시지 보냈잖아요. 총괄 실장이라는 분은 자꾸 언제 오냐고 연락하지, 인우 씨는 연락 한 통 없지. 제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아세요?”

인우는 다다다 쏘아 대는 해나를 계속해서 뚫어지게 바라봤다.

눈을 감으면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머리카락을 꼬던 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서둘러 눈을 뜨면 절대 자신을 사랑할 일 없을 거라 외치던 해나가 떠올랐다.

3일째 지독하게도 따라다니던 얼굴이 바로 제 앞에 있는 게 새삼 신기했다.

오랜만에 해나를 만나 두통이 멎은 것보다 그냥 해나의 얼굴을 봐서 더 좋았다.

잔뜩 화가 나 따지는 모습도 귀여워 보였다.

“저기요, 주인우 씨.”

잔뜩 흥분한 해나가 인우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튕기며 인우를 불렀다.

“아, 미안합니다. 처리해야 할 게 생겨서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

처리해야 할 건 인우 자신의 마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