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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22)화 (22/84)

@22

늘 여자들이 먼저 매달리는 인우였다. 매달리는 여자들을 거부하는 것도 항상 인우 쪽이었다.

인우에겐 해나 같은 여자가 처음이었다.

자신을 거부하고, 자꾸만 자신을 갈증 나게 하는 여자.

꼭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됐다. 이제 그만하자.”

다시는 저 여자에게 설레지 않을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거고, 실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저 여자 때문에 고민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다짐을 한 인우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건 뭐야.”

지칠 대로 지친 인우가 샤워를 하고 나와 휴대폰을 들었는데, 식장을 예약했던 직원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결혼식을 담당하게 된 총괄 실장입니다. 사모님께 연락받으셨나요? 내일 오후 드레스 피팅 일정이 잡혀 급하게 연락드립니다. 저희는 언제든 괜찮으니, 퇴근하고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진짜 가지가지 하시네.”

아까 본 직원이 결혼식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아마도 혜영이 심어 놓은 직원이겠지.

“부딪치기 싫다는데 뭐. 될 대로 되라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인우가 메시지를 무시한 채 침대에 누웠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했던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생각나는 해나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사람은 비단 인우뿐만은 아니었다.

***

“신경 쓰이게 뭘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느냐고.”

마지막 그 모습이 맘에 걸려 자꾸만 인우가 생각나 휴대폰을 든 해나에게도 같은 문자가 와 있었다.

“드레스? 식장을 예약하자마자 드레스를 본다고?”

결혼 준비를 원래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는 건가?

사모님께 연락받았냐고 묻는 걸 보면 혜영이 예약을 한 것 같았다.

인우에게 메시지를 보내 볼까 고민하던 해나가 침대로 뛰어들었다.

“몰라. 문자 봤으면 알아서 하겠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이 밝았는데도 연락 한 통 없었다.

먼저 연락하기엔 왠지 꺼림칙한 기분에 인우에게 연락 올 때까지 버텨 볼 요량으로 먼저 출근을 했지만, 퇴근 시간까지도 연락은 없었다.

“뭐야, 왜 연락이 없어? 드레스는 원래 신랑이랑 같이 보는 거 아닌가?”

혜영이 예약을 한 자리에 아무 말도 없이 가지 않는다는 건 해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운 해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이 평소보다 길다.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초조한 해나의 귀에 낮고 차가운 인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흔한 ‘여보세요’, 아니면 ‘주인우입니다.’ 혹은 ‘오해나 씨?’ 하던 목소리와 너무 달라 하마터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뻔했다.

“아, 저기, 식장에서 메시지를 받아서요. 오늘 드레스 피팅 예약이 잡혀서 가야 할 것 같은데, 주인우 씨도 문자 받았나 해서요.”

-네. 받았습니다.

받았구나.

혹시 저만 연락받은 게 아닐까 싶었던 해나의 예상이 깨졌다.

“아, 받으셨구나.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하….

해나도 딱히 같이 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인우 역시 메시지를 받았으니 같이 가야겠구나 싶어 물어본 것뿐이었다.

제 물음에 들려오는 질린다는 듯한 한숨에 살짝 빈정이 상한 해나가 입을 삐쭉거렸다.

-8시 30분까지 어제 그 호텔로 가세요. 드레스도 거기서 볼 것 같으니.

대답도 아직 못 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겨 버렸다.

“그 호텔로 가세요? 자기는 안 가겠단 말인가? 자기는 그렇게 마음대로 굴어 놓고 상처 조금 받았다고 바로 이러는 거야?”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해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

아주 희미한 웃음이지만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웃음이었다.

작게 웃어 주는 형우를 본 해나는 기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빠, 결혼 날짜 나왔어. 그리고 나 오늘 드레스 보러 갈 거야. 그러니까 아빠 얼른 나아서 일어나야 해? 알았지?”

형우가 해나의 말에 눈짓으로 고개 끄덕임을 대신했다.

아까까진 기분이 안 좋다 못해 땅굴을 팠는데, 아빠의 웃음을 보자 아이처럼 신이 난 해나였다. 

인사를 하고 나와선 힘차게 택시를 잡았다.

“그래. 내가 힘내야지! 아빠가 일어났는데!”

해나가 밝은 목소리로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H호텔로 가 주세요.”

기분 좋게 호텔에 도착해 보니, 인우가 먼저 와 있었다.

“오셨네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뼈가 있는 말에 인우도 한껏 뼈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둘 중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이 있을까요.”

드레스 피팅을 하러 온 건지, 싸우러 온 건지.

해나의 드레스 피팅을 도와주러 온 직원의 눈에도 둘 사이에 파지직 튀기는 스파크가 보이는 듯했다.

“시, 신부님. 피팅 하러 가실게요….”

당황한 직원의 부름에 해나가 고개를 홱 돌리고 직원을 따라나섰다.

벌써 지친 기분에 한숨을 한번 내쉰 인우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자신의 턱시도는 알아서 맞춤 제작할 예정이라 오늘 함께 오지 않았어도 되었다.

솔직히 오기 싫었다. 저를 벌레 보듯 하는 해나의 눈빛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이 자리에 와 있는 이유는 그저….

“결혼 전까지 머리 아플 순 없으니까. 탈취제가 필요해서 여기 와 있는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자신에게 세뇌를 시키고 있는 인우에게 직원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부님, 나오실게요.”

촤르륵.

커튼이 열리는 데 걸리는 시간 3초.

그 시간이 꼭 슬로모션을 걸어 둔 듯 느리게 흘렀다.

“아….”

커튼이 완전히 열리자 모습을 보인 해나가 민망한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평소 늘 하나로 단정히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자 웨이브 진 긴 머리가 풍성하게 드러났다.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쇄골이 아찔했다.

흰 드레스만큼 흰 피부가 빛이 나는 듯 반짝였다.

“첫 번째 드레스입니다. 신랑님, 어떠세요?”

첫 번째 드레스부터 이러면 반칙 아닌가.

“수수하고 우아한 디자인이 신부님과 너무 잘 어울리죠? 너무 답답해 보이지 않게 뒷부분에 포인트를 주었는데, 신부님, 뒤 한번 돌아 보실게요.”

직원의 요청에 뒤로 돌아선 해나의 뒤태에 인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뒤가 시원하게 파인 드레스 덕에 처음 보는 해나의 등이 어찌나 가녀린지, 튀어나온 날개뼈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게다가 인우의 한 팔로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허리까지.

“그, 앞으로 몇 벌을 더 봐야 하죠.”

인우가 눈은 해나에게 고정한 채 직원에게 물었다.

“본식 드레스는 지금 입은 드레스를 포함해 10벌, 피로연 때 입으실 한복은 5벌 준비되어 있습니다. 15벌 모두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한정판으로, 회장님 지시로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드레스 10벌 중에 본식에서 입으실 드레스를 골라 주시면, 다른 드레스는 웨딩 촬영용으로 빼놓겠습니다.”

맙소사.

첫 번째 드레스부터 이렇게 예쁘다 못해 아름다운데, 그 많은 드레스들을 하나씩 다 입어 본다면 오늘 제 심장이 남아나긴 할까.

“뭐… 나쁘진 않네요.”

인우가 애써 침착함을 연기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고 있는 인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해나는 그 말에 또 빈정이 상했다.

‘좋네요. 예쁘네요. 하고 많은 말 중에 나쁘진 않네요, 라니. 그렇게 별론가.’

태어나 처음으로 평생 입어 볼 일 없을 것 같던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 두근댔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돌아온 인우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기분이 상한 해나가 직원에게 물었다.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냥 제가 먼저 훑어보고 맘에 드는 것만 입어 보는 걸로 할 수 있을까요?”

해나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직원이 아닌 인우였다.

“안 됩니다.”

갑자기 끼어들어 안 된다고 대답하는 인우 탓에 해나의 얼굴에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네? 입는 건 전데 인우 씨가 왜….”

해나는 황당했고, 인우는 당황했다.

이 진귀한 광경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급한 맘에 질러 버리긴 했지만 당황한 인우가 황급히 변명거리를 찾았다.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입어야죠. 게다가 회장님이 특별히 준비하셨는데요.”

“아, 네….”

떨떠름한 표정의 해나가 커튼 뒤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인우가 작게 자신을 힐난했다.

“미친놈.”

해나 눈에도 이상해 보였을 테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외친 말을 주워 담아야 하는데, 굳어 버린 뇌가 뱉어 낸 최선의 말이었다.

“천사인 줄 알았네….”

심장을 부여잡은 인우가 더운 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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