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21)화 (21/84)

@21

***

띠리리링.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일어난 해나가 눈도 뜨지 못한 채로 휴대폰을 들었다.

알람을 끄려 더듬더듬 화면을 밀었는데….

-여보세요?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인우의 목소리가 제 환청일 거라고 생각한 해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왜 아침부터 미친놈 목소리가 들리고 난리야.”

-아침부터 미친놈 목소리가 들려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낸 혼잣말에 대답이 들려오자 해나의 무겁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비비고 휴대폰을 보니 통화 중인 화면이 보였다.

망했다, 알람이 아니라 전화 소리였구나. 

착잡하게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해나가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뭐, 뭐예요. 아침부터.”

-오늘 몇 시에 퇴근합니까.

마치 어제 일이 없던 것처럼 구는 인우의 태도에 해나도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왜요?”

-퇴근하고 H호텔로 오세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래?

제 귀를 의심한 해나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텔? 호텔요? 어제 입 좀 맞췄다고 이제 호텔로까지 불러내는 거예요?”

호텔이라는 단어에 이성을 잃어버린 해나가 어제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내 버렸다.

모른 척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 생각보다 빠르게 나갔다.

-하…. 이보세요, 오해나 씨.

“맞잖아요. 이제 그냥 본색을 드러내기로 한 거예요? 어제 입 한번 맞춘 걸로 제가 뭐 그렇게 쉬워 보여요?”

-뭘 생각하는 거야, 이 여자가 아침부터. 식장 예약해야 해서 그럽니다, 식장 예약.

줄기차게 쏘아 대던 해나가 인우의 말에 그만 휴대폰을 놓쳐 버렸다.

“아…. 미쳤다, 나.”

해나가 떨어트린 휴대폰을 줍지도 못한 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

“오해나 씨?”

뭔가 투둑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로 인우가 몇 번이나 해나를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가 끊긴 것도 아니었다.

심각하게 휴대폰을 쳐다보던 인우에게 해나의 기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20시 30분까지 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영상 통화도 아닌데 해나의 모습이 뻔히 보였다.

잔뜩 당황해서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줍지도 못하고 있다가 겨우 다시 주워 말했을 게 분명했다.

“자꾸 귀엽게 구네.”

어제 절대 자신을 사랑할 일 없을 거라 차갑게 말하던 해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가, 꼭지 돌게 했다가. 

이제는 또 귀엽게 구는 해나에 인우는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네.”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인우가 피식 한번 웃음 짓고 욕실로 향했다.

***

“고생하셨어요!”

늘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이 오늘은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마지막 남은 팀원이 해맑게 인사하고 퇴근해 버리자 해나도 퇴근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꼭 먼저 아빠부터 보고 가야지.”

형우를 보고 가기 위해 도착 시간을 넉넉히 불러 둔 해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 나 왔어.”

힘없이 누워 있지만 안색이 조금 좋아진 듯한 형우를 보며 해나가 밝게 웃었다.

아빠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니, 아빠를 보고 힘을 내야만 했다.

“오늘 식장 예약하기로 했어, 아빠. 얼른 일어나서 결혼식 때 내 손 잡아 줘야지.”

희미하게 웃는 것 같은 형우의 얼굴에 정신을 다잡은 해나가 그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 놓았다.

“내일 또 올게. 사랑해, 아빠.”

형우에게 인사를 마치고 씩씩하게 병원을 나선 해나가 H호텔로 향했다.

비싸 보이는 차들만 들어서는 호텔 입구에 주황색 택시가 도착하자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머쓱해져 문 열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택시의 문이 벌컥 열렸다.

“왔으면 내리지, 안 내리고 뭐 합니까.”

인우였다.

도저히 인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 해나는 의아하게 쳐다보는 인우를 부러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차가운 해나의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인우가 해나를 앞서가며 말했다.

“우리 때문에 퇴근도 못 하고 있을 사람들이니까 빨리 가죠.”

“아, 네.”

원래라면 6시에 퇴근했을 직원들이 제 스케줄에 맞춰 퇴근도 못 하고 기다린다는 소식에 해나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예식홀은 넓다 못해 광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셨습니까. 홀은 좀 둘러보셨나요?”

갑작스레 말을 걸어오는 직원에 놀라 휘청인 해나의 어깨를 인우가 부드럽게 잡았다.

순간적으로 인우의 손을 탁 쳐 낸 해나 탓에 넓은 홀에 정적이 흘렀다. 인우와 해나 둘 다 해나의 반응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직원이 나서 정적을 깼다.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일단 미팅 룸으로 가서 이야기 나눠 볼까요?”

직원의 일장 연설이 30분간 이어졌다.

결혼식에 대해 알 리가 없는 두 사람은 그저 길가의 비둘기처럼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는 추가 옵션 있으세요?”

직원의 질문에도 정적은 깨지지 않았다.

카탈로그를 한참 보던 인우가 그 정적을 깼다.

“제일 비싼 걸로 다 넣어 주세요.”

인우의 말에 직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부님, 특별히 원하시는 꽃 있으세요?”

직원이 옆에서 병풍처럼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해나에게 물었다.

딱히 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해나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카네이션…?”

아빠에게 보여 줄 만한 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무심코 나온 말에 직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카네이션보다 화려한 꽃들도 많은데요.”

직원이 다시 한번 카탈로그를 펴 건넸지만, 인우는 그걸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카네이션 좋죠. 카네이션이 제일 눈에 띄게 해 주세요.”

해나가 아빠를 생각하고 고른 꽃이라는 걸 아는 걸까?

해나 대신 카네이션을 넣어 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한 인우가 해나쪽으로 건네진 카탈로그를 물리고 일어섰다.

“그럼, 대충 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는 걸로 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직원에게 고개를 한번 꾸벅인 해나가 인우의 옆에 붙어 섰다.

호텔을 나가는 동안 사이좋은 커플인 것처럼 연기하느라 진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호텔을 나온 인우가 곧장 저쪽에 서 있는 택시를 잡으러 나가려는 해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데려다줄게요.”

“아뇨, 괜찮아요.”

인우의 호의를 단박에 거절한 해나가 잡힌 손목을 빼냈다.

“내가 안 괜찮습니다.”

돌아서 가려는 해나를 인우가 한 번 더 잡았다.

늘 불편할까 봐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을 참았는데, 영우와 편의점에서 만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내내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지금 인우 씨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해요.”

참다못한 해나가 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제 일도 그렇고, 오늘 아침 일도 그렇고. 인우 씨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해서 그냥 혼자 가고 싶어요.”

“결혼 날짜도 잡혔고, 식장 예약까지 했습니다. 불편해도 어쩔 수 없어요. 결혼식 후엔 같이 한집에 살아야 하는데, 그때도 이렇게 피할 겁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진 최대한 안 부딪치고 싶어서 그래요.”

인우는 그 말에 솔직히 상처받았다.

자신과 최대한 안 부딪치고 싶다는 예비 신부의 말에 상처받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늘 타인을 거절만 했지, 거절당해 본 적 없던 인우에겐 아주 큰 충격이었다.

너무나도 솔직하고 뾰족한 말에 상처받은 인우가 거절당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세요, 그럼…….”

고개를 떨군 인우가 더 이상 잡지 않자 해나는 서둘러 줄 서 있던 택시를 잡았다. 바로 택시에 탄 해나가 뒤 유리창으로 호텔 쪽을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채로 떠나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인우를 발견한 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너무 심했나….”

처음 보는 인우의 처량한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 뜻대로 결혼식장에 카네이션도 넣어 달라고 한 사람한테,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나.”

해나의 혼잣말에 운전하던 택시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친구랑 싸우고 택시 타셨나 봐요?”

순간 말을 걸어 온 택시 기사에 놀란 해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네….”

“왜 비 맞은 똥강아지처럼 저러고 서 있대. 아가씨 신경 쓰이게.”

택시 기사가 한 말이 딱 맞았다.

비 맞은 똥강아지.

얼핏 보았던 인우와 백 퍼센트 일치하는 말이었다.

“그러게요.”

짤막하게 대답한 해나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제 눈에만 불쌍하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불쌍해 보인다니.

조금은 미안할 뻔하던 와중에 불현듯이 어제의 인우가 떠올랐다.

“그렇게 맘대로 굴어 놓고 이제 와서 왜 저런대……. 사람 죄책감 느끼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아, 됐어. 알 게 뭐야. 난 나만 생각하면 돼.”

작게 구시렁거린 해나가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

해나가 탄 택시가 이미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보였다.

인우는 처음 받아 보는 충격에 아직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 처지를 조소하듯 쓴웃음을 흘린 인우가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이젠 그냥 나를 벌레 보듯 하네.”

결혼하면 매일 봐야 할 테니 그전까진 최대한 부딪치고 싶지 않다니.

배려를 하면 오해를 사니 배려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배려를 안 하니 벌레 보듯 하는 해나에 인우는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뭐가 저렇게 어려워, 저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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