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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20)화 (20/84)

@20

인우 자신도 왜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실을 해나가 알게 하긴 죽어도 싫었다.

솔직하기 싫을 때마다 방패 뒤에 숨던 인우가 또 제 방패를 꺼내 들었다.

“머리가 아파서.”

“네?”

“그쪽은 내 탈취제니까. 그게 그쪽 역할이니까.”

자존심은 인우에게 그 무엇보다 내려놓을 수 없는 방패이자 무기였다.

서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이 계약 관계에서 처음부터 지고 들어갈 순 없었다.

평생을 해나에게 구걸하며 살 바에는 차라리 이겨 먹자.

뭐 마려운 강아지가 될 바엔 그냥 천하의 개새끼가 되는 게 낫겠다고 계산을 마친 인우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겠죠. 인우 씨는 오로지 인우 씨 생각밖에 안 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찾아와서 사람 난감하게 만들고, 그리고 또…!”

잔뜩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고, 이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해나의 말을 끊은 인우가 시니컬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 앙탈은 언제까지 부릴 겁니까.”

“앙탈 같은 소리 하네.”

“뭐?”

“지금 내가 한 말 전부, 그쪽한텐 앙탈로 들렸나?”

순간 짧아진 해나의 말에 인우는 그저 벙찐 채로 해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꾸 말이 짧아지는데, 왜? 그쪽은 갑이라 그래도 되고, 나는 을이라 그러면 안 되나?”

이 와중에도 인우는 제 한마디에 전투력이 풀 충전돼 바락바락 대드는 해나가 꼭 사나운 치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 말은 다 했냐고 물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뱉고 싶은 욕도 많았다.

하지만 싸울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인우의 태도에 금세 흥분이 가라앉아 버렸다.

“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뱉는 해나가 묘하게 섹시했다.

잔뜩 흥분해서 얼굴은 빨개졌지, 땀도 좀 났고.

거친 숨소리 하며….

넓은 집에 오직 둘뿐이라 그런지 해나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려오는 지금.

천하의 개새끼가 되기로 다짐했던 인우는 발정 난 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할 말 다 했으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홀린 듯 해나에게 다가간 인우가 돌연 입을 맞춰 버렸다.

쪼옥. 잠깐 붙었다 끈적하게 떼어진 입술 소리가 큰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상황 파악이 안 돼 잠시 굳어 있던 해나가 상황 파악을 하자마자 인우를 밀쳐 냈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아, 달다.

말까지 더듬으며 화를 내는 해나를 보던 인우가 제 입술을 혀로 한번 훑었다.

“이 계약 결혼의 인장이랄까.”

“뭐라고요?”

“그쪽이 지친다 어쩐다 하니까 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굴 수가 없잖아. 이건 그쪽이 자초한 겁니다, 오해나 씨.”

당황한 해나의 등줄기로 땀 한 방울이 흘렀다.

“아무리 지친다 해도 이 계약은 깰 수 없습니다. 3억을 도로 뱉어 낸대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난 그 배가 넘는 위약금을 받아 내야겠는데, 감당할 수 있나?”

“무슨 그런…!”

“혹여나 계약을 깨려고 왔다면 꿈 깨세요. 계약금은 이미 지급됐고, 그 손으로 사인까지 했고. 이젠 무를 수 없습니다. 아, 방금 내가 인장도 찍었으니 더 확실해졌겠지?”

인우의 말에 거칠게 입술을 닦아 낸 해나가 소리쳤다.

“미친놈….”

해나의 낮은 욕지거리에 인우가 밝게 웃었다.

“미친놈 맞고, 그러니까 계약은 잘 알아보고 했어야죠.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태자면, 결혼 날짜 나왔습니다. 한 달도 안 남았더군요.”

맙소사. 

이렇게까지 미친놈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동안 연기를 해 왔던 건가?

게다가 한 달 후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미친놈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해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제 앞에 닥친 불행을 타개하려 선택한 일이었는데, 더 불행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일부터 결혼 준비 들어갈 겁니다. 불쑥불쑥 찾아가는 일도 많을 거고. 이제 일어나서 돌아가지그래요? 지금 안 나가면 안 보낼 거니까.”

그 말에 벌떡 일어난 해나가 차갑게 한마디를 뱉었다.

“절대, 절대 널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음대로. 말 놓는 것도 괜찮아요. 확실히 이쪽이 더 매력적이네.”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가방을 챙긴 해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미친 새끼.”

인우는 해나가 떠나고 홀로 남은 거실에 주저앉아 제 자신을 욕했다.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해나 입에서 계약을 깨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이성을 잃었다.

“거기서 입은 왜 맞춰서….”

태어나 처음으로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게 나왔다.

저 독한 말만 내뱉는 입을 빨리 막아 버리고 싶은데, 또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이 너무 탐스럽기도 하고.

모르겠다. 눈에 뭐가 씐 것같이 그 순간에는 해나의 입술밖에 안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가 저지른 일에 자신을 경멸스럽게 보던 해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망했네, 나 이제.”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다.

해나가 마지막으로 내뱉고 간 말이 따가웠다.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인우가 다 식어 빠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더럽게 쓰네.”

분명 달달한 차를 준비했었는데 식어 빠져서 이렇게 쓴가.

주저 없이 찻잔을 주방으로 가져간 인우는 식어 버린 차를 모조리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화해할 생각으로 들떠 있던 마음이 쏟아 버린 차처럼 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

“미친놈….”

인우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해나가 옷소매로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처음 만난 날만 해도 소문과 달리 나이스하다고 생각했던 인우가 저렇게까지 미친놈이었다니.

허무하게 빼앗겨 버린 인생 첫 입맞춤이 아까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빠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진 해나가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

“면회 시간이 끝나서 오늘은 안 됩니다.”

하루 종일 인우와 혜영에게 시달리느라 시간 확인을 못 한 해나는 허망하게 고개를 떨궜다.

며칠 전 집중 치료실로 옮겨 하루에 두 번, 15분씩밖에 못 하는 면회 시간을 허무하게 놓쳐 버렸다.

어깨가 축 처진 해나는 터덜터덜 힘없이 병원을 나섰다.

“아빠 보고 싶은데….”

이대로 혼자 집에 가기는 싫고, 잡생각이라도 날려 버리고 싶던 해나는 회사로 향했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 일이라도 실컷 하고 싶었다.

“아름이는 뭐 하려나.”

제일 먼저 아름이 떠올랐지만, 이 기분에 아름을 만나면 울어 버릴 것 같은 해나가 한숨을 푹푹 내쉴 때였다.

“…해나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본 해나의 눈에 조금은 놀란 듯한 영우가 보였다.

“아, 전무님. 안녕하세요.”

“네…. 이 시간에 회사엔 웬일로 오셨어요?”

“그냥, 일이나 할까 하고요.”

“이렇게 늦었는데요?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

영우의 질문에 면회 시간을 놓친 게 생각난 해나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빠가 이번에 집중 치료실로 가셔서요. 하루에 두 번, 15분씩만 볼 수 있는데 제가 그 기회를 놓쳤네요, 오늘. 엄청 불효녀죠?”

“아이고, 오늘 하루 힘들었나 보다.”

제 맘을 알아주는 영우의 말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해나가 알아채기도 전에 한 방울 떨어진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어…? 어? 해나 씨! 왜 울어요!”

“네? 제가요?”

해나의 눈물에 놀란 영우가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물었다.

자신이 우는지도 몰랐던 해나가 손을 들어 볼을 쓸어 내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어, 진짜네…. 나 우네.”

그런 해나의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영우의 마음이 찌릿했다.

자기가 우는지도 모르고 울고 있는 이 여자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처연한 해나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 영우의 귀에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밥맛이 없어 점심을 건너뛰었던 해나가 저녁까지 먹지 않자 배가 재촉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여태 밥도 안 먹었어요?”

시트콤 같은 상황에 웃음을 꾹 참은 영우가 물었다.

해나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슥슥 닦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입맛이 없어서…. 창피하네요. 이제 그만 가 주세요….”

“그래요. 그 전에 밥부터 먹으러 갑시다.”

제 동생의 예비 신부의 눈물을 못 본 척 지나칠 것인가.

짧게 고민하던 영우가 능청스레 해나를 근처 ‘24시 낚지볶음집’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매운 거 먹고 스트레스 좀 풀어요.”

“감사합니다….”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한 해나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 해나가 귀여워 보이는 영우는 아빠 미소를 장착하고 밥 먹는 해나를 지켜보았다.

방금 전까지 울던 사람이 맞는지, 상당히 전투적인 식사를 하는 해나가 신기했다.

“다 먹었어요?”

영우의 물음에 식사를 끝내고 휴지로 입 주변을 야무지게 닦아 낸 해나가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원래 제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해나에 안심이 된 영우가 밝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밥은 잘 먹고 다녀요. 저도 스트레스 받을 땐 항상 여기 와서 이거 먹거든요. 그럼 열 받았던 게 땀으로 다 배출된다니까요.”

“정말 그렇네요.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에요.”

“이건 전무로서 하는 말인데, 너무 늦었으니까 집에 가서 쉬세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익숙하게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선 영우는 택시를 태워 해나를 보냈다.

휴대폰을 들어 해나가 탄 택시 번호판을 카메라로 찍은 영우가 멀어지는 택시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인우가 왜 그렇게 아끼는지 알겠네.”

영우는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회사로 돌아갔다.

한편, 고된 하루에 하마터면 택시 안에서 잠들 뻔한 해나가 창문을 열어 졸음을 환기시켰다.

집에 도착한 해나는 무거운 몸을 씻고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발랐다.

“낙지볶음이 맵긴 매웠나 보네. 입술이….”

거울로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보던 해나는 저도 모르게 인우와의 입맞춤을 떠올려 버렸다.

쪼옥, 하고 떨어지던 끈적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미친놈이 진짜….”

화장 솜을 들어 입술을 벅벅 닦아 낸 해나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를 다시 떠올리니 어깨가 다 무거운 기분이었다.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인우의 모습에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무거운 눈이 자꾸만 감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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