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9)화 (19/84)

@19

“아, 곧 오실 겁니다. 앉아서 기다리시죠.”

“아니에요. 나가서 기다리지 뭐, 고마워요.”

혜영이 웃으며 나가자 직원들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다.

“오늘 도대체 왜 이렇게 팀장님을 찾는 사람이 많아?”

“그러니까요. 게다가 회장님 사모님까지. 팀장님 뭐, 승진하시려나?”

“우리 팀장님 능력이 좀 좋아? 줄 잘 타야지, 우리도.”

뒤로 들리는 직원들의 웅성거림에 혜영이 조소했다.

“줄을 타려면 영우 줄을 잡아야지, 무슨.”

로비에 앉아 해나를 기다리던 혜영의 뒤로 놀란 듯한 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어쩐 일이세요. 저를 찾으셨다고….”

혜영이 해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우아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 자리 좀 옮기지.”

혜영을 데리고 빈 회의실로 들어간 해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사모님, 저를 찾으신 연유가 있으신지….”

“너 몇 살이니?”

조심스레 물은 말에 돌아온 대답이 ‘너 몇 살이니’라…. 

해나는 도무지 혜영의 의중을 알아챌 수 없었다.

“네?”

“너 몇 살이냐고. 너 성인 아니니?”

날카로운 말투와 표정에 기분이 상한 해나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서른 살입니다만, 이러시는 연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그날, 기분 나빴다며.”

아뿔싸. 혜영의 말에 해나의 뒷골이 당겨 왔다.

그새 집에 가서 어떻게 얘기를 했길래 저렇게 화가 나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기분이 나빴으면 네가 따로 얘기를 하든지.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 가며 여기까지 오게 만드니? 여우가 들어왔다 싶었지만 뒤에서 이런 식으로 인우 조종해서 나 엿 먹이니까 기분이 좀 낫니? 어디서 이런 게 들어와서는….”

혜영이 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해나를 아프게 찔렀다.

동시에 어질했던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지금의 해나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모님, 화가 나시는 건 충분히 이해됩니다만, 저는 더 이상 그런 식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뭐?”

“화를 내시기 전에 사실 관계 파악부터 해 주세요. 전 사모님께 화가 난 게 아니고, 인우 씨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모님께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요.”

“너 지금 나 가르치려 드니?”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사모님을 가르칠 수가 있을까요. 다만, 저로서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너 지금 또박또박 말대꾸하니?”

해나는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한 번 내쉰 해나는 차분하고도 진지하게 제 입장을 밝혔다.

“사모님, 인우 씨가 어떻게 말씀드렸는진 모르겠지만, 저는 인우 씨와 사모님의 사이에서 이간질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거 예의 없는 행동인 거 압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흥분한 자신과 상반되는 차분한 해나가 뱉어 낸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해나가 제 언변에 말을 잃은 혜영에게 마지막 어퍼컷을 날렸다.

“사모님은 저보다 훌륭한 어른이시니까요.”

“하,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구나!”

할 말이 없자 대뜸 화를 내고 가방을 챙겨 나가 버린 혜영 탓에 해나가 빈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 진짜. 이놈의 집안사람들은 도대체가….”

인우가 찾아와 해나의 속을 뒤집어 놓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해나에게 기름을 부어 버린 혜영 탓에 해나는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못 참겠어. 사채를 써서 돈을 뱉어 내는 한이 있어도 이런 취급은….”

화가 나 이성을 잃은 해나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찬물을 들이부어도 가라앉지 않는 화에 연신 한숨만 내쉬던 해나는 겨우 사무실로 복귀했다.

일을 하면서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빠 일도 그렇고, 확실히 말해야겠어.”

팀원들이 하나둘 떠나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해나가 끝내 휴대폰을 들어 인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으며 하염없이 신호음을 듣고 있을 때였다.

-해나 씨.

전화를 받자마자 제 이름을 부르는 인우의 목소리에 저절로 침이 바짝 말라 왔다.

마음을 굳게 먹은 해나가 입을 열었다.

“주인우 씨, 얘기 좀 해요.”

일주일간 모든 연락을 무시해 찾아간 회사에서도 그렇게 화를 내더니, 오랜만에 전화를 해 얘기 좀 하자는 말에 인우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어딘지 모르게 결연한 해나의 목소리가 인우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디로 갈까요.”

-아뇨. 제가 댁으로 갈게요. 주소 보내 주세요.

늘 찾아가는 건 제 쪽이었는데, 오늘은 해나가 온단다.

무려 제 집으로.

저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지고, 말아 쥐었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집으로 온다는 해나의 말에 당황한 인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혼자 사신다면서요.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일까.

갑자기 먼저 저를 찾은 건 둘째치고 혼자 사니까 집으로 오겠다니.

이 여자가 미쳤나?

오만 가지 생각에 말이 없는 인우가 답답한지 해나가 인우를 채근했다.

-주소 보내 주세요. 끊을게요.

끊긴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인우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주소부터 보냈다.

[20분 정도 걸려요. 집 앞에서 전화할게요.]

해나의 문자에 가뜩이나 엉망이던 머릿속이 이젠 엉망진창이 되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오늘 그렇게 화를 내놓고.”

일단 소파에 앉은 인우가 차분히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회사에 찾아갔지. 가서, 해나 씨가 화를 내고. 그게 끝인데.”

톡, 톡. 검지로 소파의 팔 받침대를 두드리던 인우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아, 내가 그 여자한테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했지…… 설마.”

화가 난 상태로 혜영에게 찾아갔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인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할 땐 팽팽 잘만 돌아가는 머리가 해나랑만 엮이면 돌처럼 굳어 버리는 인우가 추론해 낸 답은 안타깝게도 명백한 오답이었다.

“이거다. 그 여자가 결국 찾아가서 사과를 했구나. 고맙다고 말하려고 온다는 건가? 여기까지? 이 여자가 겁도 없이.”

아무리 고마워도 그렇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급기야 테이블 주위를 빙빙 돌던 인우가 시계를 쳐다봤다.

“곧 오겠네. 티라도 준비를 해야겠다.”

화해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주방을 찾은 인우가 이젠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달달한 게 좋겠지.”

난생처음 손님이 온다는 사실에 들뜬 인우가 차를 준비하고 있을 때, 반가운 초인종이 울렸다.

“왔다.”

화해할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만면에 웃음꽃이 핀 인우는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었다.

“집 앞에서 전화한다더니.”

웃음꽃이 핀 인우의 얼굴과는 다르게 해나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차가운 해나의 목소리에 당황한 인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거실로 안내했다.

준비해 둔 티를 가져온 인우가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해나에게 눈짓으로 앉기를 청했다.

“할 말이 뭐길래 여기까지 왔습니까.”

인우가 애써 준비해 놓은 티에는 손도 대지 않은 해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해나가 뱉은 말은 인우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말문이 턱 막힌 인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겨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

비웃듯 웃은 해나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말을 이었다.

“제가 언제 사모님께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나요? 저 대신 가서 따지라고 그 쪽에게 시켰나요? 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절 화나게 한 건 사모님이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인우 씨가 미웠다는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인우에게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해나는 결국 최악의 말을 뱉었다.

“그냥… 그냥 좀 지쳐서요.”

그 한마디는 인우의 꼭지를 돌게 하기 충분했다.

“뭐가 지칩니까.”

“전부요. 이 계약 결혼의 모든 게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 정도에 지칠 사람이었습니까?”

“네. 안타깝게도 제가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되나 봐요.”

저항 없이 제 그릇의 크기를 운운하는 해나의 모습에 이상하게 화가 솟구친 인우가 해나를 도발했다.

“도대체 뭐가 지친다는 겁니까? 계약이고 뭐고 아직 결혼 전이라는 핑계로 일주일이나 도망 다니더니. 도망 다니느라 지친다는 겁니까?”

‘도망’이라는 단어에 고개 숙였던 해나의 자존심이 꿈틀했다.

“도망… 까진 아니죠. 전 그냥 제 생활을 살았을 뿐인데요?”

하, 그래. 그랬지. 내 생활을 망쳐 놓고 혼자 그렇게 웃으면서 제 생활을 살았었지.

회사에서 본 해나의 웃던 모습이 떠오른 인우가 해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니까요. 혼자 제 생활을 잘도 살았던 해나 씨가 뭐가 그렇게 지치냐는 겁니다. 지치는 쪽은 해나 씨가 아니고 나 아니겠어요? 지난 일주일간 전화를 몇 통을 한 줄 압니까? 모르겠죠, 해나 씨는 그저 거절 버튼이나 띡 누르고 제 생활을 살았을 테니까요.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사생활 침해가 아니냐? 내가 내 발로 스스로 한주 전자까지 간 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고 그런 말을 한 겁니까?”

몰아붙이는 인우에 살짝 주춤한 해나가 반문했다.

“누가, 누가 그러래요?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하는데요? 그냥 결혼 날짜 정해지면 연락 주고. 결혼 준비하고 결혼하고. 그냥 그렇게 맡은 역할만 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전화하고 찾아오고 하는데요.”

솔직하지 못했던 해나처럼, 인우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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