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6)화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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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 아빠한테 인우 씨 만나고 온다고 했거든요.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걱정하실까 봐.”

“같이 올라갈까요? 저 온 것도 아시는데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시간도 늦고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아빠한텐 제가 잘 말할게요.”

해나는 정말 인우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인우는 또다시 그녀가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해나 씨도 올라가서 쉬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해나의 뒷모습을 인우는 한없이 바라만 봤다.

늘 저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가 버리는 해나의 뒷모습은 봐도 봐도 아쉬웠다.

“뭐 하냐, 나….”

비즈니스라고 못 박은 건 저였는데, 자꾸만 아쉬워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비즈니스다. 내가 지금 이러는 건 저 여자의 향 때문이야. 난 그저 내 이득만 취하면 되는 거야.”

해나 덕에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진 인우가 차 시트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보니까 좋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인우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났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온 인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도로 내려놨다.

“뭐, 어차피 내일 볼 거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도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인우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눈을 감았다.

***

아침이 밝아 왔다.

상견례를 위해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은 형우가 어색한 듯 웃었다.

“아빠, 오늘 어디 불편하면 참지 말고 꼭 말해.”

“아빠는 걱정하지 말고 상견례 잘 마칠 생각만 해.”

잔뜩 긴장한 해나가 계속해서 형우의 컨디션을 살폈다.

다행히 복수가 줄어들고 황달 수치가 좋아져 외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당장 다음 날인 오늘 상견례를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하고 형우까지 챙기느라 해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혹시라도 늦을까 부랴부랴 내려온 병원 로비에서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인우와 마주쳤다.

이제 막 두 번째 만남인데 장인어른이라 칭하는 인우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인우 씨, 와 있었어요?”

“네. 아버님 모시고 가야 하니까요.”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해나는 인우를 알아 갈수록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택시가 안 잡히면 어쩌지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내려왔는데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모습도, 아빠에게 예의 바른 모습도 소문의 개싸가지와는 정반대였다.

“왜 그렇게 봐요?”

아빠를 뒷좌석에 모시고 본인은 조수석에 앉은 해나가 너무 티가 나게 인우를 쳐다본 탓에 인우는 운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 뭐 문제라도 있나 싶어 넌지시 묻자 잔뜩 당황한 해나가 얼버무렸다.

“아, 아니에요. 인우 씨 본 거 아니고 바, 밖에 본 거예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형우가 웃으며 해나를 놀렸다.

“바깥은 그쪽 창문에서도 보일걸, 해나야?”

“아, 알거든! 그냥 저쪽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거든!”

창피함에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해나가 재빨리 변명했지만 형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 해나가 저래. 좋아서 쳐다봤으면 좋아서 쳐다봤다 말을 하면 될 것을. 쑥스러워서 그러니 자네가 이해하게.”

“네, 압니다. 이해할 게 뭐 있나요. 그냥 귀여운데….”

맙소사. 

자신이 뱉은 말에 자신이 놀란 인우가 해나를 힐끔힐끔 보던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귀엽다는 말에 덩달아 놀란 해나는 이제 완전히 차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난 지 1년째에도 그렇게 수줍음이 많나, 두 사람은.”

형우가 없었다면 어색함에 숨 막혔을 텐데, 장난스레 말을 걸어오는 형우 덕에 어색하지 않게 상견례를 할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아빠까지 함께라니 잔뜩 긴장된 해나의 어깨를 인우가 토닥였다.

“걱정 마요.”

인우의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녹아내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힘이 난 해나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예약한 룸으로 들어간 해나는 아직 인우의 가족이 도착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하… 잘할 수 있겠죠?”

“그럼요. 혹시 불편하면 손잡아요. 그러려고 옆에 앉은 거니까.”

“그래, 해나야. 아빠 손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두 남자가 긴장한 해나를 달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인우의 가족들이 들어왔다.

영호와 혜영, 그리고 뒤에 오는 저 남자는….

“어?”

“전무님?”

뒤에 오던 영우를 본 해나가 놀라 작게 외쳤다.

“소화제?”

그 소리에 해나를 본 영우도 놀라 작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사모님.”

시선을 영우에게 고정한 채로 일어나 회장 내외에게 인사를 한 해나가 다시 앉았다.

“그래요. …인우는 어찌 이쪽에 앉지 않고 그쪽에 앉아 있냐.”

인우가 제 가족 쪽에 앉지 않고 해나 옆에 앉은 모습에 영호가 심기가 불편한 티를 냈다.

“짝이 안 맞잖아요, 당신도 참.”

뭘 그런 걸 묻냐며 타박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해나의 가족이 달랑 둘인 걸 꼬집는 말이었다.

인우가 한마디 하려는 차에 영우가 그 해맑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테이블도 딱 이렇게 앉기 좋네요. 인우가 다 생각하고 앉은 거겠죠. 하하. 안녕하세요. 인우 형, 주영우입니다.”

한편, 영우의 말에 해나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전무님을 못 알아본 건 너무 심하잖아…!’

원체 타인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해나가 허벅지를 꼬집으며 자신을 책망했다.

오며 가며 마주쳐도 몇 번을 마주쳤을 텐데, 회사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날 밤 만난 남자가 제 회사의 전무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었다.

그날의 대화들을 곱씹어 보던 해나가 망연자실했다.

‘망했다, 그것도 모르고 저 집안 욕을 그렇게 해 댔는데…!“

해나의 속도 모르고 형우와 회장 내외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음식이 하나둘 들어왔다.

정갈한 한정식들이 가득했지만 해나는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래서 사돈 되실 분께선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있습니다.”

영호의 물음에 형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몸이 안 좋아요? 어디가 어떻게요?”

영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혜영이 형우에게 따져 물었다.

“제가 간이 안 좋습니다. 간경변증을 앓아서요….”

“혹시 유전이 된다거나 하는 거 아니에요? 따님도 그렇고 나중에 태어날 아기도….”

혜영의 탐문하는 듯한 태도에 이미 한번 심사가 뒤틀렸던 인우는 두 번째 말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잔뜩 얼굴을 굳힌 인우가 혜영을 제지시키려는데 이번에도 영우가 한발 빨랐다.

“어머니, 아직 있지도 않은 아기 걱정하지 마시고 이거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반찬을 직접 그릇에 놓아주며 말하는 영우에 혜영의 말문이 막혔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화가 나 뛰쳐나가고 싶은 해나의 손을 형우가 부드럽게 쓸었다. 아빠는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손짓에 해나가 차오르는 화를 꾹 참아 내었다.

다행히 영호가 대신 사과를 해 왔다.

“죄송합니다. 집사람이 실례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걱정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몸도 안 좋으신데, 결혼을 서둘러야겠군요.”

의외인 영호의 말에 사레들린 해나에게 인우가 얼른 물을 챙겨 줬다.

저렇게 쉽게 허락할 사람이 아닌데.

상견례가 끝나고 따로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한 인우가 해나의 손을 꽉 잡았다.

따뜻하고 작은 손이 인우의 큰 손에 들어와 안정감 있게 가득 찼다.

“그래 주시면 저야 좋지요.”

“예. 그럼 저희가 좋은 날을 잡아 보겠습니다.”

“예. 모쪼록 저희 해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사돈.”

영호가 형우를 사돈이라 부르고, 생각도 못 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초반 혜영의 말실수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상견례였다.

적어도 인우에게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외출 시간이 있어서요.”

“네, 사돈. 다음엔 식장에서 뵙겠습니다. 허허.”

두 가장의 인사를 끝으로 해나와 형우가 먼저 일어났다.

같이 일어나려는 인우를 앉힌 해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끼리 갈게요. 인우 씨는 식사 더 하고 일어나세요.”

“아니….”

일어나려는 인우의 어깨를 눌러 막은 해나가 회장 내외와 영우에게 인사하고 형우를 데리고 룸을 나섰다.

아빠의 손을 꽉 잡고 식당을 나선 해나가 말없이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왜 그래, 해나야. 주 서방이 데려다준대도.”

“됐어. 필요 없어.”

“아까 사돈 부인이 하신 말씀 때문에 그래? 아빠는 괜찮대도. 걱정되니 물어보실 수 있지.”

“아니, 그래. 그건 괜찮아. 근데 아빠가 거기서 그런 말이나 듣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한 게 뭐야. 적어도 자기 선에서 그런 말을 막아 줬어야 하는 거 아냐?”

폭발한 해나가 택시를 잡다 소리쳤다.

정말 괜찮았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땐 그래, 기분은 나빴지만 참을 만했다.

그런데 그의 형, 전무님이 저를 도와주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기를 들먹이며 하는 무례한 말에 한마디 쏴붙이지도 못한 제 자신과 인우에게 화가 나고, 또 실망했다.

“주 서방이 말하는 것보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말해서 다행이던데, 아빠는.”

“뭐가 다행이야! 내가 그 사람 형이랑 결혼하는 거야?”

“그렇잖아. 그 사람이 그렇게 분위기를 바꿔 줘서 아빠가 난감하지 않았는걸.”

“그래도… 너무 실망스러워. 그 사람한테도, 아무 말 못 한 나한테도.”

은근히 인우의 편을 들며 해나를 달래는 아빠의 말에도 해나의 생각은 완강했다.

허락 없이 자신을 안았을 때도, 그저 냄새 때문에 안았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아무리 팔려 가는 것과 다름없는 결혼이라도, 만약 자기였다면 그래도 말 한마디라도 얹었겠다 싶었다.

“아빠는 무슨 벌써부터 주 서방이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또, 또 할 말 없으니까 이제 아빠한테 화풀이하네. 시간 다 되겠다. 얼른 들어가자, 해나야. 화 풀고, 응?”

누구보다 해나를 잘 아는 형우는 해나를 달래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상견례도 마쳤고 이제 날만 잡으면 된다.

산 하나를 넘자 또 다른 산이 펼쳐진 듯한 느낌에 아찔한 해나가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어찌 됐든 간에 얼른 병원에 가서 혼자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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