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3)화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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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가 수저를 내려놓고 영호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습니다.”

“한주 전자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마케팅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주 전자 직원이 한주 그룹 회장 아들과 결혼이라…. 모양새가 조금 웃기지 않겠나?”

노골적인 영호의 말에 인우가 급히 그를 불렀다.

“아버지.”

인우의 손을 잡아 그를 저지한 해나가 당차게 말했다.

“한주는 능력제입니다.”

“그게 결혼과 무슨 연관이 있지?”

“그룹의 자제들은 보통 다른 그룹의 자제들과 결혼을 하지요. 서로 다른 그룹들이 연을 맺는 데에 결혼은 충분히 좋은 명분을 주니까요.”

“그렇지.”

“제가 요즘 진행하는 한주 전자의 마케팅의 콘셉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나는 이제 영호에게 질문까지 하며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차별화, 아닌가.”

“네, 맞습니다. 소비자가 한주 전자에 열광하는 데에 큰 이유가 되죠. 차별화는 비단 스마트폰 시장의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아무 연줄 없고 여자인 제가 7년 만에 마케팅팀 팀장으로 승진했을 때, 언론사들이 앞다퉈 제 이야기를 다루고, 그해 신입 사원 지원율이 대폭 상승했죠.”

“그래서?”

“한주 그룹은 평범한 시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그룹이라 불리죠. 그룹의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은 운영에 큰 기여를 하고요.”

“인우와 해나 씨의 결혼이 한주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 보는가?”

이야기를 할수록 해나는 마치 입사 3차 시험에서 압박 면접을 보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해나는 자신 있었다.

그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것도 해나였기에.

“네. 제가 감히 말씀을 드려도 된다면, 그렇습니다.”

해나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영호는 다음 말이 더 기대됐다.

“어떻게 장담하지?”

“마케팅팀 팀장으로서, 이 결혼을 마케팅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얼마 전 한주 바이오 대표님이 불미스러운 일로 검찰에 출두하신 후로 한주 그룹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한주의 그늘을 벗어나 사업을 멋지게 성공한 한주의 아들과, 여자의 몸으로 7년 만에 팀장까지 단 평범한 서민의 결혼이 여론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하니까요.”

해나의 말이 끝나자 인우도 영호도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을 직접 꺼내는 당참과 그새 여론을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을 끝낸 두뇌 회전. 본인을 낮추고 인우를 올려세우면서도 제 가치를 뽐내는 화려한 언변까지.

알면 알수록 생각보다 더 대단한 여자였다.

“확실히 흥미롭긴 하구먼.”

“감사합니다.”

“그럼 인우는 그렇다 치고, 해나 씨는 왜 이 결혼이 하고 싶은 거지?”

“전 이미 한주의 사람이고, 제 야망은 높습니다. 일개 한주의 직원에서 한주의 가족이 된다면 제 꿈을 이룰 수 있을 테죠.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이유인데, 더 중요한 건 인우 씨입니다. 인우 씨라면 제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놈의 어떤 점이 맘에 들었는지….”

말을 뱉다가 혀를 한번 찬 영호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을 캐치한 해나도 본인의 수저를 잡았다.

“그래, 이만하면 된 것 같네. 식사 중에 미안했네.”

“아닙니다, 회장님.”

영호가 식사를 마저 이어 가자, 해나도 뒤따라 수저를 들었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식사를 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

“식사 다 했으면 차나 한잔하지.”

“네. 좋습니다.”

인우가 끼어들 틈은 도무지 없어 보였다.

영호가 선을 넘게 되면 꼭 해나를 보호하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럴 필요조차 없이 해나가 너무나 잘 해내었다.

영호와 혜영의 안내에 따라 거실에 앉은 해나가 찻잔을 들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해나의 모든 행동이 예의 바르고 기품 있었다.

벌써 수십 년간 사업을 하면서 사람 보는 눈을 갖춘 영호에게도 해나는 합격이었다.

“날 잡아서 다시 한번 식사하지. 오늘은 영우도 없었고.”

영호의 말에 인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니까.

“한 번 더 초대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해나의 대답에 처음으로 영호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현재 인우의 신붓감으로 낙점해 둔 한유라도 5년은 치대고 나서야 볼 수 있던 웃음이었다.

식사 자리 한 번에 영호의 웃음을 이끌어 내다니.

오랜만에 느끼는 위기감에 혜영은 해나를 묘한 눈으로 지켜보며 생각했다.

‘여우가 하나 들어왔네.’

웃음기를 되찾은 영호와의 첫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회장님, 사모님.”

마지막까지 살갑고 씩씩하게 인사한 해나가 인우와 집을 나섰다.

“휴… 죽는 줄 알았네.”

해나가 나지막이 뱉은 한마디에 인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것치곤 좀 대단하시던데.”

인우의 말에 해나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완전 압박 면접 하는 줄.”

“진짜 잘했어요. 원래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잘해 냈어요.”

“믿고 있었다고요?”

저의 어디를 믿는냐는 듯한 해나의 의아한 얼굴에 인우가 한마디 덧붙였다.

“회장님이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해나 씨는 딱 회장님 타입이에요.”

“인우 씨 타입은 아니고요?”

그저 장난으로 웃으며 던진 말에 인우는 대답도 못 하고 얼어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인우를 보며 해나는 생각 없이 한 말을 후회했다.

‘장난치지 말걸…. 엄청 싫어하네. 민망하게.’

왠지 정곡을 찔린 것 같아 얼어 버렸던 인우가 목을 가다듬으며 차 문을 열었다.

“큼… 타세요. 데려다드릴게요.”

식사 자리에서 한 압박 면접을 방불케 하는 대화에, 살짝 친 장난에 정색하는 인우까지.

먹은 밥이 체한 듯한 느낌에 해나가 명치를 문지르며 인우에게 말했다.

“저 앞 편의점에서 내려 주세요.”

“왜요?”

“이 근처… 에서 볼일이 있거든요. 그 전에 편의점에서 살 게 있어서요.”

해나가 대충 둘러댄 말에 인우는 더 묻지 않고 차를 편의점 앞에 세웠다.

“이제 가세요. 저는 볼일을 좀 봐야 해서.”

해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오늘 충분히 불편했을 텐데 더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긴 인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해나가 한숨을 쉬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의약품 코너에 하나 남은 소화제 박스를 집으려는데, 큰 손이 들어와 그걸 낚아챘다.

“지금 뭐 하시는…?”

해나의 황당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큰 손의 주인이 대답했다.

“죄송한데 제가 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소화제가 좀 급해서요.”

평소라면 양보했을 텐데 지금은 해나 본인도 소화제가 너무 필요했다.

“저도 죄송한데, 저도 좀 급해서요.”

말을 하며 손의 주인을 올려다본 해나가 새삼 놀랐다.

‘잘생겼다.’

인우도 두말하면 입 아플 외모지만 이 남자도 어마어마했다.

인우가 차가운 냉미남이라면 이 남자는 온미남 과였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저렇게 잘생긴 얼굴은 분명 흔하지 않은데,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잘생긴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멍하니 보던 해나는 소화제를 낚아챌 기회를 놓쳤다.

“감사합니다.”

그 틈을 타 감사 인사까지 마쳐 버린 남자에게 소화제를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자업자득이지 뭐. 얼굴에 홀려서는.

속으로 자신을 원망하며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던 해나의 눈앞에 큰 손이 다시 들어왔다.

“여기요.”

불쑥 들어온 그 손은 소화제의 반을 내밀었다.

“네?”

갑자기 약을 나눔 하는 상황에 해나는 남자의 손 한 번, 얼굴 한 번을 번갈아 봤다.

“제가 나타나서 가로챘으니까요. 반 드릴게요. 급하다면서요.”

남자의 호의에 해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쪽이 사셨는데요, 뭘.”

해나의 만류에도 남자는 굳이 해나의 손 위에 캡슐을 올려 주며 말했다.

“일단 저쪽에서 소화나 좀 시키죠.”

한사코 거절하던 해나도 이제는 점점 머리까지 지끈대는 바람에 결국 약을 받아 들었다.

소화제와 물을 들고 나란히 시식대에 선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약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해나가 의문의 사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뭘요. 따지고 보면 제가 낚아챈 건데.”

“그래도요. 그쪽이 계산까지 하셨는데. 진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좀 괜찮아지겠죠.”

“단단히 체하셨나 봐요?”

남자의 물음에 해나가 설움을 토해 냈다.

“네. 완전요.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거든요.”

“왜요?”

“아니, 결혼할 사람 집에 갔는데 분위기가 완전… 압박 면접 뺨 쳤어요.”

해나의 말에 크게 한 번 웃은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요즘도 그런 집이 있나 봐요. 이 동네서 봤으면… 뭐, 부잣집이었겠네요.”

남자의 맞장구에 해나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놨다.

“네. 살면서 그렇게 큰 집은 또 처음 봤어요. 제가 조건이 한참 기울어서 더 위축되는 것도 있었고요.”

남자는 곱상한 얼굴과 걸친 명품이 무색하게 해나에게 완전히 공감했다.

“그렇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어마어마하죠. 저도 매번 버텨 내기 힘들다니까요.”

남자의 공감에 해나가 의아한 듯 질문했다.

“그런데 그러시는 그쪽도… 이 동네 사시는 것 하며, 걸치신 명품 하며. 어마어마해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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