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2)화 (12/84)

@12

[오늘 6시입니다.]

메시지를 읽은 해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뭐야. 결투 신청도 아니고.”

해나는 분노에 찬 손짓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알아요. 어제 얘기했잖아요.]

메시지를 읽은 인우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화가 났나…?”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인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정면 돌파를 해야겠다.

[해나 씨, 혹시 화났습니까?]

역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해나가 메시지를 읽으며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그건 해나가 당황했다는 뜻이고, 그녀는 지금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였다.

“티 났나? 아, 창피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뭐 하는 거야, 나….”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까.

해나는 인우에게 절대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게 이 계약 결혼의 패배자 같았기 때문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휴대폰을 든 해나가 완벽한 연기를 해냈다.

[아뇨. 그냥 좀, 긴장이 돼서요.]

해나의 메시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인우가 안심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라는 거군.‘

메시지를 입력하는 손가락이 어딘지 모르게 경쾌해졌다.

[걱정 마세요.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해나 씨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이니까요.]

“뭐야!”

한편, 인우의 메시지를 읽은 해나는 휴대폰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 뭐야! 무슨 이런 말을 해?”

표현에 닭살 돋아 하면서도 한결 기분이 나아진 해나가 빨개진 얼굴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고마워요. 그럼 인우 씨만 믿을게요.]

그 둘의 바깥세상으로는, 노크를 해도 인우가 무시하는 탓에 들어가지 못했던 직원들이 결국 비서실장에게 총대를 쥐여 줬다. 

그 역시 정말 들어가기 싫지만 스케줄 보고를 해야 하는 탓에 다시 노크를 하려는데, 대표실의 문이 먼저 열렸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생겨서 노크 소리를 못 들었네요.”

인우가 나와 정중히 사과하자 직원들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휴, 한시름 놨다.’

‘그러게. 기분 좋아 보이셔.’

직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인우가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내 기분이 지금 좋아 보입니까?”

비서실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하하… 네.”

“그렇군요. 들어오세요.”

비서실장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분 좋게 문을 열어 주는 인우였다.

스케줄 보고를 들으면서도 인우는 해나의 메시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인우 씨만 믿을게요.]

해나의 한마디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 인우가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엔 개인적으로 일이 있으니 모든 스케줄은 오후 4시까지 끝내는 걸로 하죠.”

“그렇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스케줄들이 꽤나 빡빡한데요.”

“실장님, 저 못 믿습니까?”

비서실장은 이제 완전히 사색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저 싸가지 없는 대표가 오늘은 무슨 일로 저러는지.

평소와 너무나도 다른 인우의 모습에 비서실장이 거의 우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비서실장의 대답에 인우가 돌연 미간을 좁혔다.

인우의 표정을 본 비서실장이 급히 자료를 챙기며 말했다.

“저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비서실장이 나가고 인우는 해나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보았다.

“느낌이 다르네.”

해나가 말한 믿어요, 와 비서실장이 말한 믿어요, 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같은 말인데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액정만 들여다보던 인우가 간신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그래. 느낌이 어떻든 간에 일단 날 믿는다니까. 믿음에 보답은 해야지.”

***

인우가 4시 안에 모든 일을 끝내려 고군분투하는 동안 해나도 해나의 자리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빠, 다녀올게!”

해나는 어젯밤, 목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한 간병인을 3일 일찍 불렀다. 간병인에게 하루 일당을 지불한 해나가 먼저 들른 곳은 집이었다.

“그 옷이 어딨더라?”

해나가 찾은 건 팀원이 결혼하는 날, 아름이 입고 가라며 사 준 투피스였다. 인우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서 얕잡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것만 골라 입고, 메었다.

그다음으로 해나가 간 곳은 헤어숍이었다.

“오늘 3시에 예약했는데요.”

“오해나 님 맞으시죠?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숍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아름이 자주 다니는 숍이라 가끔 따라온 적은 있어도 혼자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아름이 앉던 자리에 앉아 받는 훌륭한 서비스에 해나는 요 며칠 있었던 일들을 잊는 기분이었다.

“오늘 어디 가시는데 아름 씨도 없이 혼자 오셨어요?”

직원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던 해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남자친구… 부모님 뵈러 가거든요.”

해나의 말에 직원이 설레발을 치며 크게 외쳤다.

“실장님! 해나 씨 오늘 남자친구 부모님 뵈러 가신대요!”

“어머, 그래요? 오늘 힘 좀 줘야겠네!”

덩달아 잔뜩 흥분한 실장이 어느새 온갖 메이크업 도구와 제품을 더 가져오더니 해나를 치장해 주었다.

“원래 본판도 훌륭하신데, 제가 심혈을 기울였으니 이 정도면 프리 패스예요!”

거울을 본 해나가 새삼 놀랐다.

화장과 머리만 했을 뿐인데, 깊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마저 가려져 꼭 드라마 속 부잣집 딸내미 같았다.

뿌듯해하는 실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시 병원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딱 5시 50분이었다.

“10분 일찍 오셨네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병원 입구에 세워진 인우의 차를 발견한 해나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해나 씨도….”

일찍 오셨네요, 라고 말하려던 인우는 해나를 보자 입이 얼어 버렸다.

그간 냄새에만 집중해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딱히 없었는데.

한껏 스타일링한 해나의 어느 한 군데 빈 곳 없이 예쁜 얼굴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전 10분 일찍 도착하는 게 습관이라서요.”

인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해나가 자신도 일찍 왔다는 줄 알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인우는 그때까지도 해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출발 안 하세요?”

해나의 채근에 그제야 운전대를 잡은 인우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인우의 집으로 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고요한 분위기만은 편안했다. 이제 막 네 번째 만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느새 둘은 정적에도 편안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

집에 도착한 인우가 초인종을 누르자 집채만 한 대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인우가 현관문을 열고 해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 다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떨리는 이유가 달랐다. 해나는 긴장이었고, 인우는 설렘이었다. 

어렸을 땐 창살 없는 감옥 같던 집.

그래서 뛰쳐나온 후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던 집.

끔찍이도 싫었던 이 집에서 느끼는 설렘이라니.

제 손을 잡고 있는, 이 선물같이 나타난 여자 덕에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어찌나 많은지.

잡은 손과 잔뜩 긴장한 해나의 옆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인우가 제 손에 들어찬 해나의 손을 힘을 주어 고쳐 잡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긴 복도에 위축된 해나가 저도 모르게 인우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따뜻한 해나의 손에 인우는 걱정도 잊고 오로지 손의 감촉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왔냐.”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하자 영호가 쳐다도 보지 않고 대꾸했다.

인우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해나가 손을 놓고 영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해나라고 합니다.”

신문을 보고 있던 영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넨 해나가 밝게 웃어 보였다.

“큼… 그래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신문을 내려놓은 영호가 그제야 해나를 바라보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무시당했다고 화날 법도 한데 살갑게 구는 해나가 인우는 그저 신기했다.

“영광은 무슨.”

퉁명스레 뱉는 말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 영호를 지켜보던 인우가 해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영호가 보기에도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슈퍼모델 같은 유라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수수함이 인우와 꽤 잘 어울렸다.

“식사하러 가시죠.”

영호가 해나를 요목조목 뜯어 관찰하는 것을 느낀 인우가 자리를 옮기자 청했다.

“그래. 네 엄마가 오늘 준비 많이 했다.”

그 말에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인우가 해나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혜영을 마주친 인우는 부러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희 왔습니다.”

“왔구나. 그래, 반가워요.”

세팅을 마친 혜영이 해나에게 인사했다.

말은 반갑다고 했지만, 표정은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영호의 성화로 오랜만에 음식을 하게 된 혜영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우의 며느릿감이면 몰라, 인우의 며느릿감을 위해 요리까지 해야 하다니.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해나입니다.”

혜영의 표정이 누가 봐도 반기지 않는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해나는 또다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치고 밝게 웃는 해나에 혜영은 떨떠름하지만 인사를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앉아서 식사하지.”

영호의 근엄한 목소리에 자리에 앉은 해나가 혜영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모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오물오물 열심히도 먹는 해나에게 혜영이 넌지시 물었다.

“어때, 입맛에 좀 맞아요?”

“네. 하나하나 정말 다 맛있어요.”

“별 뜻 없이 식사나 같이하는 자리이니 편하게 들어요.”

묘하게 선을 긋는 혜영의 말에 해나가 작게 움찔했다.

하지만 움찔한 것도 잠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항상 멀리서만 뵙던 회장님과의 식사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살짝 입을 가린 채로 웃으며 대답하는 해나가 영호는 꽤나 맘에 들었다.

저 정도로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리는 게 물건은 물건이다 싶었다.

“그래, 인우랑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본격적으로 테스트를 하기 위해 영호가 말문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