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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1)화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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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에게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인우가 처음 냄새 때문에 구토를 한 후부터 데리고 가지 않은 병원이 없었다.

향수를 개발하고부터는 괜찮아 보여 묻지 않았지만, 인우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 어렴풋이 아직 다 낫진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혀 차도가 없었고, 향수는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게다가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냄새를 못 느끼게 한단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긴데. 결혼하려고 네 병을 이용하는 건 아니고?”

“제가 왜요. 제가 왜 제 약점까지 드러내며 이 결혼을 하려고 하겠어요.”

“그럼 오로지 네 병 때문에 그 여자랑 결혼하겠다는 거냐?”

“그럼 뭐가 더 있을까요. 이쪽에서 결혼은 다 비즈니스 아닙니까.”

인우의 뼈 있는 말에 영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인우가 꼭 빼닮은 부자의 버릇이었다.

그 버릇의 뜻은 생각 중이다, 하는 의미이고, 인우는 바로 알아챘다.

‘이제 한주를 이용해 볼까.’

인우는 2단계 작전을 펼쳤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워서 한주 전자 마케팅팀 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에요.”

인우가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한주의 사람, 게다가 마케팅팀 팀장이라는 소리를 들은 영호가 넌지시 물었다.

“큼… 한주의 사람이라…. 나이가 몇인데 팀장에 올라?”

“저보다 한 살 어립니다. 한주에서도 아마 최연소 팀장이라죠.”

영호는 철저히 능력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제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나가 제 사업을 하겠다며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해 모든 지원을 끊었지만, 보란 듯이 동종 업계에서 매출 1위를 차지한 인우를 곧 인정했다.

그리고 언제나 한주에, 본인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독하긴 한가 보군.”

독하다. 어찌 보면 나쁘게도 들리는 말이지만 아버지가 내뱉을 땐 달랐다. 

그건 분명 칭찬이었다.

“우연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모든 지원을 받으며 자란 온실 속 화초보단, 아스팔트 틈에서 자랐어도 꽃을 피우고 씨까지 뿌리는 민들레 같은 사람이 제 취향입니다.”

명백히 유라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영호는 집안도 좋고, 애교도 잘 부리는 유라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본인의 능력 면에서는 유라는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팔불출이 따로 없군.”

인우의 모습을 보니 꼭 인우의 친어머니와 만날 때가 생각났다.

죽을 만큼 사랑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리더니, 제 아들이라며 인우를 데려온 그 여자.

미워할 만큼 미워했다고 생각했는데, 10년 만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가슴 떨리던 그 여자.

돌연 옛 생각에 잠긴 영호에게 인우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버지, 처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저,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부탁한다는 인우의 말에 고개를 들고 인우를 바라본 영호는 흠칫 놀랐다.

다른 곳은 다 자신을 빼다 박았지만 눈만은 그 여자를 닮아서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절실히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이 결혼 반대야.”

“아버지….”

‘실패인가.’

인우가 속으로 실패 요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 영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단 만나 보기나 하자고. 내일 시간 괜찮으면 집으로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라. 만나 보고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남기고 서재를 나간 영호의 뒷모습을 보며 인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영호가 해나를 만나 보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해나는 누구보다도 영호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능력과 빠른 두뇌 회전, 똑 부러지는 언변까지. 

“내가 왜 이러지.”

사람들에게 연기를 할수록 그 콘셉트에 잡아먹히는 건지 뭔지.

점점 진심으로 해나의 칭찬을 하게 되는 자신이 낯설었다.

‘냄새를 못 맡게 되고, 두통이 사라지는 건 좋다. 그렇지만 계약으로 시작한 가짜 결혼일 뿐인데, 진심으로 오해나를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순간 인우의 머리에 두려움이 스쳤다.

해나를 좋아하게 되는 게 두려웠다. 또한 해나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너무 오랜 시간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모든 게 다 두렵기만 했다.

“기분이 좀… 더럽네.”

그래도 별수 있겠는가.

좋아하게 되는 건 둘째치고 이 지긋지긋한 두통을 벗어나려면 해나가 꼭 필요하니까.

[인우 씨, 이야기는 잘됐나요?] 

기다리기 답답했는지 해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인우는 지체 없이 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두 번째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해나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게 분명했다.

“네. 이야기는 잘 끝났고, 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보자고 하시네요.”

-알겠어요. 내일 저녁에 찾아뵙기로 해요.

“…….”

해나가 대답을 마쳤는데도 인우는 말이 없었다.

그냥 전화를 끊기는 아쉽고, 또 찾아가자니 이러는 자신이 우스웠다.

결국 알겠다며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해나의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인우의 귀에 꽂혔다.

-그럼… 오늘은… 안 오시나요?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인우가 저를 와락 안았던 그 순간,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내일도 가도 되냐고 묻던 인우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넌지시 물어본 말이었다.

묻고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안해 애꿎은 손톱 거스러미만 연신 뜯으며 초조히 답을 기다렸다.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인우의 온다는 대답을 들으니 안심이 된 해나가 그제야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뭐야, 나 이렇게 금사빠야? 무슨, 만난 지 3일 만에 이 남자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어?”

전화를 끊은 해나가 머리를 뜯으며 자책하는 동안, 인우 역시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오늘은 안 오냐고 묻는 목소리가 너무나 달았다.

언제나 해나에게 가는 길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인우가 휴대폰을 들기도 전에 눈앞에 해나가 보였다. 차를 주차한 인우가 성큼성큼 해나에게 다가갔다.

“나와 있었어요?”

“아빠가 잠들어서요. 할 일도 없고… 산책이나 할 겸.”

산책을 할 거였으면 병원에 딸린 산책로로 갔겠지만, 주차장에 있던 건 인우를 기다렸던 게 맞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너무 주책맞아 보일까 봐.

“주차장에서 산책이라…. 산책은 다 했습니까?”

인우의 말에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해나가 말을 흐리며 대강 대답했다.

“네, 뭐… 대충.”

해나의 대답에 불쑥 장난기가 솟은 인우가 짓궂게 물었다.

“그럼 산책은 다 했다 치고. 뭐 할 겁니까 이제?”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해나 씨가 부르지 않았습니까.”

인우의 장난에 해나가 지지 않고 맞섰다.

“부른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거예요.”

“왜 물어보셨는데요?”

“아니, 어제는 뭐 갑자기 들이닥쳐 포옹을 하질 않나. 오늘도 그렇게 갑자기 오실 것 같으면 준비라도 하고 있으려고요.”

해나의 말에 두 사람 다 어제의 포옹을 떠올려 버렸다.

“큼… 어젠 제 실수였습니다. 하루 종일 냄새에 시달려서 자제를 못 했어요.”

인우가 서둘러 한 사과에 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수…. 그냥 실수였구나.’

처음 안겨 본 품에 하루 종일 설레던 본인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저 탈취제일 뿐인 걸 잠시 잊고 설레다니.

기분이 급격히 다운된 해나가 말을 돌렸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따로 별말씀은 없으셨나요?”

해나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인우가 대답했다.

“아, 맞아요. 해나 씨가 한주 전자 직원이라는 데에 큰 흥미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아마 내일 회사에 대한 이야기도 하실 것 같고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네요.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제가 6시까지 여기로 데리러 오겠습니다. 도착해서 전화를 드릴게요.”

“네. 그럼… 내일 뵙는 걸로 하죠. 전 아빠 주사 맞을 시간이 다 되어 가서 올라가 볼게요.”

갑작스레 변한 해나의 태도에 인우는 혼란스러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장난도 받아치고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금세 기분이 안 좋아져 올라간다는데 잡을 수도 없었다.

“네…. 그럼 내일 보죠.”

인우의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해나의 기분은 점점 더 곤두박질쳤다.

병실 앞에 도착한 해나는 복도의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잡지도 않네.”

인우의 말 한마디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아빠의 일만 생각하기에도 벅찬데, 이런 감정까지 느끼는 게 버거웠다.

“그래. 뭐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서운해할 건 뭐 있고 좋아할 건 뭐 있어. 그냥 난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씁쓸함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을 위로한 해나가 병실로 들어갔다.

한편 인우는 집에 도착해서도 해나 생각뿐이었다.

“분명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부담스러웠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저렇게 갑자기 바뀔 수가 있나? 인우의 입장에서 해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

띠리리링.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인우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젯밤 해나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쳤더니 온몸이 찌뿌둥한 기분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인우의 머릿속은 온통 해나 생각으로 가득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비서의 인사에 대답도 않고 대표실로 들어간 인우 탓에 회사의 분위기는 얼음장이 되었다.

“메시지를 보내 볼까….”

인우가 고민을 하는 사이, 바깥의 직원들은 서로 대표실에 들어가길 미루고 있었다.

직원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인우는 메시지를 뭐라고 보낼지 한참 고민한 뒤에 눈을 딱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일도 미뤄 두고 한참 고민한 보람 없이 내용만 봐선 형편없는 메시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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