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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이 있어 해나 씨 다니는 회사에 들렀다가 첫눈에 반해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요? 하긴 해나가 자기가 눈에 차는 남자가 없어서 그렇지,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는 많았지.”
“맞습니다. 한주 전자 내에서도 해나 씨는 이미 유명 인사고요.”
“그럼 자네도 해나와 같이 한주 전자에 있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따로 나와 제 사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주 그룹엔 못 미쳐도 제법 안정적으로 운영 중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우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하던 형우가 어느새 말도 놓고 허허 웃었다.
“부족한 게 많지만, 평생 해나 씨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해나 씨와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능글능글, 넉살도 좋게 대화를 이어 가는 인우 덕에 걱정과 다르게 분위기가 좋았다.
“인우 씨 가족과 상의는 된 건가?”
“먼저 해나 씨 아버님을 만나 뵙는 게 순서라고 생각해 아직 저희 부모님과는 만나 뵙지 않았지만,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빠른 두뇌 회전으로 순간순간 형우가 좋아할 만한 대답만 뱉어 내는 인우를 보며 해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해나는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빠와 인우의 대화를 가만히 듣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허허. 그래요. 그럼 먼저 부모님 만나 뵙고, 다시 날 정해서 다 같이 만나기로 하지. 안 그래도 나 죽으면 해나 저 녀석 어떡하나, 걱정 많이 했는데. 결혼할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다행이야, 다행.”
“네, 아버님. 조만간 다시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만 해 주세요.”
“그래요. 허허.”
순식간에 결혼 허락을 받아 냈다.
어안이 벙벙한 해나와 달리, 인우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아빠, 먼저 들어가. 이 사람 배웅하고 올게.”
“벌써부터 깨가 쏟아지네. 내 딸이 이럴 줄은 아빠도 몰랐어. 그럼, 잘 들어가요.”
해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핀잔을 하는 형우를 얼른 병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문은 이미 닫혔지만, 90도로 숙인 인우의 허리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제 가요.”
해나는 그런 인우를 일으켜 엘리베이터 쪽으로 인우를 끌고 갔다.
“연기가 정말 수준급이네요, 주인우 씨.”
해나가 콕 집어 말하자 인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연기라고 할 순 없죠. 거짓말을 좀 하긴 했지만… 해나 씨에 대한 말은 다 진짜니까.”
인우의 말에 해나가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
“예, 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맘 편하죠.”
해나는 갑자기 달려들어 끌어안더니, 아빠에게 결혼 허락까지 받은 이 상황이 어색해 괜스레 시비를 걸었다.
딱딱하고 도를 넘게 야무진 게 어쩔 땐 기계 같아 보이던 해나였는데, 처음 보는 아이같은 모습이 인우에겐 퍽 귀여웠다.
“뭐가 불만이길래 그래요?”
일부러 해나를 놀리려 한 말에 해나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불만이랬나? 그냥… 대단하다는 거죠, 뭐.”
인우는 해나에게 안긴 그 순간부터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누가 봐도 해나의 아버지로 보이는 장인어른과의 만남도, 괜스레 툴툴대는 해나도 전부 맘에 들었다. 행사장에서 두통에 절어 숨통이 막히던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맘이 편했다.
“오늘 갑자기 안은 거, 이런 스킨십도 계약서에 조항을 만들어야겠어요.”
퉁명스러운 해나의 말도 듣기 좋은 인우는 삐친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래요. 다시 상의해서 추가합시다. 일단 들어가서 쉬어요, 놀랐을 텐데, 미안합니다.”
인우의 사과에 할 말이 없어진 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인우의 너른 품이 좋았고, 따뜻했고, 설렜다. 그저 익숙지 않은 감정을 들키기 싫어 틱틱대는 것뿐이었다.
“네. 그럼 우리 아빠는 해결했고, 인우 씨 가족은 언제 만나 뵐까요?”
“일단 해나 씨 스케줄 보고 연락 줘요. 간병인은 구했어요?”
“아직요. 병원 통해서 내일 몇 분 만나 뵙기로 했어요.”
인우는 간병인도 구해 주고 병실도 업그레이드해 주고 싶었지만, 해나가 부담스러워할까 걱정돼 말을 아꼈다.
“그래요. 간병인 구해지면 연락 줘요.”
“네. 들어가세요.”
짧은 배웅을 마친 해나가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해나 씨.”
갑작스럽게 제 옷소매를 잡고 저를 불러오는 인우의 목소리에 빙글 몸을 돌린 해나가 인우를 올려다봤다.
“왜요?”
해나의 물음에 한참을 망설인 인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도 와도 됩니까?”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해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게 뭐예요. 애도 아니고.”
너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태어나 이만큼 부끄러워 본 적이 없는 인우는 자신이 잡은 해나의 옷소매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게…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한번 경험해 보니까 자꾸 바라게 됩니다. 원래는 두통이 심해지면 약을 먹든지, 집에 가 기절하듯 눕든지 하던 게, 이제는 그냥 해나 씨만 떠오릅니다.”
인우의 진솔한 말에 해나가 소매를 잡은 인우의 손을 놓았다.
거절인가 보다. 해나의 옷소매가 빠져나간 인우의 손이 어정쩡하게 굳었다.
“그래요. 계약금도 이미 받았고, 계약도 시작했는데. 인간 탈취제 역할은 톡톡히 해야죠, 나도. 오기 한 시간 전에 연락만 따로 줘요. 내가 혹시 여기 없을 수도 있고, 나도 준비는 좀 해야 하니까. 괜찮죠?”
거절하려는 줄 알았는데.
본인을 인간 탈취제라 지칭하며 수락하는 해나의 미소에 인우의 입꼬리도 따라서 씩 올라갔다.
“네. 좋네요. 진짜 들어가요.”
인우의 기분 좋은 웃음에 순간 가슴이 떨린 해나가 재빨리 뒤를 돌았다.
“들어갈게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해나는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그렇게 떠나 버린 해나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인우는 털레털레 주차된 차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나만 아쉽네, 나만 아쉬워.”
인우의 자그마한 투덜거림이 두어 번 메아리쳐 울렸다.
***
“여보세요?”
어젯밤 해나와 포옹을 한 덕분일까.
인우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평화롭게 늦잠을 자며 일요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단잠을 방해하는 벨 소리에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어… 인우 씨, 자고 있었나 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하는 해나의 목소리에 인우가 전화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은 자신을 탓하며 급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아니에요. 해나 씨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아니고요. 오늘 아침에 맡아 주실 간병인을 구했거든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연차를 냈는데, 인우 씨 부모님을 언제 뵈러 가나 해서요.
뜻밖의 소식에 인우는 졸음이 다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잠깐 기다릴래요? 내가 다시 연락할게요.”
-네.
해나가 기다린다고 했으니, 인우는 얼른 결판을 내야 했다.
인우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아버지의 반응이 어떨까 생각을 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일단 부딪쳐 보기로 다짐한 인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가는 시간이 못 견디게 답답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새어머니, 혜영이었다.
“회장님 좀 바꿔 주세요.”
-얘, 전화를 했으면 인사라도 해라. 내가 네 아버지 비서니?
“네.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좀 바꿔 주세요.”
인우는 혜영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바라는 대로 인사를 내뱉었다.
혜영의 한숨 소리 뒤로 영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영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노가 서려 있었다.
뺨 맞은 지 하루 만에 할 말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 사람,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아버지, 언제 시간 되세요.”
-소개받을 생각 없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놈이 소개는 무슨. 다 너 혼자 알아서 해라.
이런 식으로는 영호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인우는 재빨리 계획을 바꿨다.
“아버지, 오랜만에 점심 식사 같이해요. 일단 저랑만요.”
-점심 식사?
“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놈 얼굴 보고 싶지 않대도.
“제 병에 관한 거예요.”
인우가 병을 언급하자 영호의 대답이 없었다.
“가서 말씀드릴게요.”
-…그래.
됐다. 향수 사업을 시작한 후로 제 병이 나았다고 믿는 영호와 혜영에게는 절대 비밀이었던 일이지만, 영호에게 솔직히 털어놔야 진전이 있겠다 싶어 병을 언급했다.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든 걸 보면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집에 가서 혜영을 마주할 생각에 머리가 벌써 지끈거려 제 향수를 꺼낸 인우는 이내 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해나 목소리에 인우는 아버지를 만난 후 곧장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나 씨, 저 지금 아버지 뵈러 갑니다. 가서 말씀드리고 날짜 잡아 볼게요. 해나 씨는 언제가 괜찮으시죠?”
-어, 저는… 간병해 주시는 분이 내일부터 출근하시기로 해서요.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다 괜찮아요.
“네. 상의하고 연락드릴게요.”
-네.
짧은 통화를 끝내고 나니 조금이나마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웃은 인우는 서둘러 집을 나서 본가로 향했다.
“왔니?”
집에 도착한 인우를 맞이한 건 혜영이었다.
“네. 회장님은 어디 계세요.”
“서재에. 어떻게 구워삶았는진 모르겠지만 보자고 하시네.”
팔짱을 끼고 비꼬는 혜영을 무시한 인우는 그대로 서재를 향해 걸어갔다.
똑똑.
“들어와라.”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영호의 맞은편에 앉은 인우가 인사치레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여태까지 숨겨 와서 죄송하지만, 제 병은 나은 적이 없습니다.”
뜻밖의 말에 영호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향수 사업도,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겁니다.”
“왜… 좀 더 일찍 말하지 않고.”
“약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나에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게 제가 결혼을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네 병이 결혼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러냐. 뭐, 정신과 의사인가?”
“아뇨. 냄새가 안 납니다.”
“뭐?”
“그 사람은 냄새가 안 나요. 게다가 그 사람과 있으면 제가 다른 냄새를 못 맡아요. 느껴지지가 않아요. 처음 그 사람을 만나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 꼭 이 결혼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