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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9)화 (9/84)

@9

***

“오빠, 왔어?”

“네가 왜 여깄어?”

가뜩이나 예민한 인우 눈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유라가 보였다. 

당황한 인우와 다르게 유라는 제법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다.

누가 보면 유라의 집에 인우가 잘못 들어온 줄 알만큼 자연스러웠다.

“나 오늘 초대받아 온 거야. 회장님한테.”

“하, 나한텐 일언반구도 없이.”

초대받아 왔다는 당당한 유라의 말에 인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인상 좀 풀어. 곧 회장님 오실 텐데.”

“너 진짜 뭐냐?”

“오늘 회장님이 아마 결혼 이야기, 하실 거야. 앞으로 살 맞대고 지낼 사이인데, 이제 그만 좀 받아들여. 현실을 보자, 오빠.”

화가 날 만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 말에 인우의 분노가 차게 식었다.

“그래. 너도 이참에 알면 더 좋지.”

“뭐? 뭘 알면 더 좋아?”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회장 내외와 영우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회장님.”

유라가 애교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영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집인데, 그냥 아버님이라 불러도 된다, 유라야. 가자, 저녁 들러.”

유라가 수줍게 웃으며 뒤를 따랐다.

도착한 식사 자리엔 이미 인우가 앉아 있었다.

“빨리 왔구나.”

“네.”

“유라랑 이야기 좀 나누지그랬니.”

영호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지만, 인우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큰 식탁에 곧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모두가 수저를 드는데 인우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영호가 퍽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먹지 않고.”

“생각 없어요.”

인우의 말에 영호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 먹을 생각도 없는데 식사 자리엔 왜 온다고 한 거냐? 아비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영호를 향해 인우가 차분히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어디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들어나 보자.”

드디어 오늘 이곳까지 온 목적을 달성할 시간이었다.

영호와 식탁 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인우를 향했다.

“저, 결혼하겠습니다.”

인우의 말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영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하. 그래. 드디어 결혼할 맘이 들었어? 내가 어떻게 알고 또 유라를 초대했는지. 하하!”

“아버님……!”

유라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영호에게 아양을 떨며 인우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러나 인우는 오로지 영호만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는 한유라가 아닙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

“뭐야?”

“오빠!”

인우의 말에 영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우를 불렀지만, 인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애초부터 한유라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선택한 여자와 빠른 시일 내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충격을 받은 유라가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고, 회장 내외는 넋이 빠져 버린 듯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살피던 영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 짓죠. 유라야… 미안해. 우리도 지금 알았어. 일단 집에 돌아가 있어. 다시 연락 줄게.”

“진짜 너무해, 주인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인우를 노려보던 유라가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아수라장이 된 식사 자리에 혜영이 인우를 타박했다.

“너는 그런 얘기를 꼭 지금 이 자리에서 했어야 했니? 아버지가 유라를 왜 초대했는지 모르겠어?”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한유라를 포함한 모두에게요.”

인우의 말이 끝나자 영호가 곧장 인우의 뺨을 내리쳤다.

“아비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도 유분수지! 가라. 오늘은 더 이상 네 꼴도 보기 싫으니.”

혜영마저 벌떡 일어나 그대로 자리를 뜬 영호의 뒤를 쫓았다.

“…인우야, 너도 일단 돌아가 봐. 내가 어머니, 아버지랑 이야기 잘해 볼게. 얼굴 꼭 얼음찜질하고.”

“미안, 먼저 가 볼게. 형.”

***

운전석에 앉은 인우는 뺨의 통증보다 두통이 더 커 정말이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냄새에 시달렸는데, 하필이면 저녁 식사 자리에도 한유라가 옆자리인 통에 밥을 먹었다간 바로 구토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오늘 밤 잠도 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인우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해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간절하게 기다리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것만으로도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오해나 씨,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됩니까?”

-네? 지금요?

해나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듯했지만, 인우는 해나가 너무 간절해 어쩔 수 없었다.

“5분. 5분이면 됩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네…. 오시면 전화 주세요.

“네.”

전화를 끊은 인우는 미친 듯이 운전해 병원 앞에 도착했다.

그사이 걸리는 신호등이 거슬려서 모두 뽑아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도 무슨 정신인지 모를 만큼 다급했다.

“주인우 씨…?”

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려던 참에, 인우의 눈앞에 해나가 나타났다.

그 순간 인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가 해나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안겨 놀란 해나가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인우는 더 세게 안아 왔다.

“으… 미쳤어요?”

버둥거리다 결국 벗어나는 건 포기한 해나가 어금니를 꽉 물고 인우를 다그쳤다.

“미안합니다. 잠시만요. 5분만요. 오늘 너무… 너무 힘들어서 그럽니다.”

전화상의 목소리보다 더 간절한 듯한 목소리에 해나가 몸에서 힘은 풀었지만 목엔 빳빳하게 더 힘을 준 채 말했다.

“이것도, 계약서에 쓸 거예요.”

“뭐든… 쓰세요.”

어쩐지 잔뜩 지쳐 보이는 목소리에 약간 안쓰러운 기분이 든 해나가 인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요…. 그쪽이 내 구원잔데,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해나의 품에 안겨 해나의 토닥임을 받고 있으니, 인우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두통이 빠르게 멎고 이내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해나야?”

분명 그랬는데, 갑자기 해나를 불러 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인우가 급하게 몸을 떼었다.

“아… 빠?”

몸은 떼었지만 인우가 해나의 어깨를 그대로 잡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로 해나의 아빠와 마주쳤다.

인우도, 해나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멈춰 있는데, 형우가 다가왔다.

“누구쇼. 댁은.”

해나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는데, 인우가 긴장한 목소리로 몸을 반으로 접어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엥???”

인삿말에 놀란 해나가 인우를 쳐다보자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 해나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뵈러 왔습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형우는 잔뜩 서운한 말투로 해나를 찾았다.

“해나야… 아빠한텐 그런 말 없었잖아….”

길을 막은 세 사람의 뒤로 차가 빵빵댔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일단, 올라가서 이야기해요.”

순순히 올라가는 두 남자의 뒤에서 해나는 빠르게 두뇌 회전을 하는 중이었다.

병실에 도착한 해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세 병을 챙겨 아빠와 인우를 그 옆의 휴게실로 이끌었다.

“앉으세요.”

해나의 앉으라는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해나 옆에 앉으려 들었다.

해나는 침착하게 아빠를 우선 앉히고, 인우 옆으로 가 앉았다.

“해나야, 아빠 옆에 앉지….”

아빠의 서운해하는 표정에 아차 싶었지만 인우와 아빠를 같이 붙여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는 폴대랑 놔야 하니까 넓게 앉으라고 그랬지.”

대충 둘러댄 말에 표정이 풀린 아빠를 보며 해나는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인사해, 아빠. 그… 내 나, 남자친구….”

남자친구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민망한 해나가 인우를 쳐다보자, 인우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주인우라고 합니다. 해나 씨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습니다.”

인우의 말에 형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왜 이렇게 어디서 본 것 같지?”

아빠의 말에 해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티브이에서 몇 번 봤을 거야.”

“아! 그… 우리 같이 봤던 드라마에 나온 그 사람 맞지?”

인우의 출중한 외모 탓에 형우는 그가 배우라고 확신했다. 인우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르고, 해나는 웃음보가 터졌다.

“아니, 아니. 배우는 아냐. 뉴스에서 봤을 거야. 그… 한주 그룹 둘째 아들이라고 몇 번 나왔어.”

해나의 소개에 인우를 보는 아빠의 눈빛이 바뀌었다.

“네. 한주 그룹 둘째 아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결혼을 허락받으러 온 거니까요, 그냥 저를 저 자체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우의 제법 강단 있는 말에 해나의 아빠는 턱 끝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래요. 우리 해나랑은 언제부터 만났죠?”

“1년이 채 안 되었습니다.”

1년은커녕 이틀밖에 안 되었지만 인우는 그 정도 거짓말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1년이라…. 해나야, 어쩜 아빠한테 1년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순간 해나 자신에게 향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해나를 보던 인우가 해나 대신 대답했다.

“저희 둘 다 이제 30대다 보니, 해나 씨가 신중히 생각한 후에 말씀드리자고 했습니다.”

“맞아요, 아빠. 괜히 말했다가 아빠가 기대했는데 헤어지면 실망할까 봐.”

인우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해나가 자연스레 맞장구를 치는 모습이 정말이지 1년쯤은 만난 커플 같았다.

“그럼 우리 해나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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